Sunday, September 14, 2014

“겉사람은 후패하나” (고후 4:16-18)

“겉사람은 후패하나” (고후 4:16-18)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하여서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그곳이 어딥니까?
죽음이라는 이 세상 삶의 종착역(終着驛)입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진행하는 속도가 나이와 비례합니다. 다섯 살 아이는 시속 5마일의 속도로 진행하기 때문에 구경할 것 다하면서 가는 데도 여전히 제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종착역이 영원히 이르지 않을 곳으로 여겨집니다. 스무 살의 청년은 시속 20마일의 속도로 달립니다. 시속 20마일이래 봤자 그렇게 속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직도 창밖을 통하여서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한눈을 좀 팔더라도 생이란 차를 운전하는 데 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마흔 살 장년의 나이에 이른 사람은 40마일의 속도로 달려가기에 이제는 제법 속도감을 느끼며 자기가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음을 느끼나 아직은 여유가 있는 듯이 주위를 둘러봅니다. 예순 살이 넘어 60마일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사람은 이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딴전을 피우며 운전하다가는 사고가 날 것입니다. 전에는 이것저것 다 둘러보아도 아직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 모든 사물이 휙휙 지나가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종착역에 이를 것이 점점 가시화(可視化)됨에 따라 조금은 초조하고 불안하여집니다. 조금 더 나이 들어 팔십이 지나면 이제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고 했습니다.
속도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생에 대한 후회감과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을 세상에 대한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생의 종착역 뒤에는 분명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련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많아짐은 어쩐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요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6-1900)의 「도리안 그래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란 소설을 잘 아실 것입니다.
평생을 외형적인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겉사람이 우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도리안 그래이는 소원대로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의 초상화(肖像畵)가 대신 나이를 먹어갑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젊고 아름다운 용모를 유지하는 도리안 그래이를 칭송하지만 자기의 서재에서 추하게 늙어가는 그의 초상을 혼자서 확인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그는 분(憤)을 삭일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일그러지고 추하게 변한 자기의 초상을 칼로 찌르고 또 찌릅니다. 그랬더니, 초상은 변하여 그의 젊을 때의 미남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대신에 자신은 가슴에 칼을 꽂은 채 초상화의 늙고 일그러지고 추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죽어갑니다. 도리안 그래이는 겉사람으로 영원히 아름답고 젊은 모습을 간직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겉사람이 젊음을 간직하는 대신에 그의 속은 죄와 허물의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이 되어 그의 초상화에 반영된 것입니다.
 
2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4장에서 “낙심하지 아니하다”를 세 번(1, 8, 16절) 반복하고 있습니다.
반복(反復)은 강조(强調)를 표현하는 것으로써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낙심해서는 안 되며 낙심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1절에 “이러하므로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했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맡은 자이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빛의 자녀로서 밝고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8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했는데, 이는 우리 미련하고 연약한 인생이란 육체에 ‘이 보배’-하나님의 영광 (또는 영광을 아는 빛)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능력의 복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할 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속사람을 날로 새롭고 강건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함과 주장함을 받는 사람은, 따라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매일 새로워짐을 경험합니다.
제가 아직 한국에 있을 때 한 미국인 선교사를 알고 지냈는데 그분의 이름이 아일라 깁스(Ila Gibbs)입니다. 이분은 당시 60세의 나이에 인공심장을 소유하신 분이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사시면서 서울 영락교회 청년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치고, 또 매주 목요일마다 광주에서 인천까지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시면서 4시간의 거리를 보수도 받지 않고 오셔서 저희 교회의 선교사 지망 청년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영어성경 가르치기가 끝날 때쯤 되면 그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숨도 몰아가면서 쉬시지만, 저의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시고 난 다음날 아침은 또 새로운 기력을 회복하십니다. 그리고는 명랑하고 활기 있게 저에게 인사를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매일 하루 분량의 신선하고 새로운 생기를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주신다’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나이듦에 따라 얼굴과 목에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백발로 바뀌어감이 반드시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현상이지만은 않습니다. 정작 서글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나이가 듦에 따라 자기는 무용(無用)한 사람이라, 무익(無益)한 사람이라,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정신의 노쇠(老衰)입니다.

바울이 16절에서 말씀하는 겉사람(ἔξω ἄνθρωπος=outer man)은 사람의 육체와 함께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배를 받는 영역입니다. 속사람(ἔσω ἄνθρωπος=inner man)은 사람의 깊은 곳, 곧 영(靈)의 영역인데, 하나님의 사람은 속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2-23절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을 지배하는 두 가지 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의 법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 아래 놓이기를 원하는데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배를 받는 지체(肢體)라고 표현된 겉사람은 죄의 법 아래 놓여있고 사단의 유혹으로 나를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성령의 다스리심 아래 놓여있는 속사람은 이 세상 임금인 사단도 어쩌지 못하는데, 죄의 법 아래 놓여있는 겉사람은 끊임없이 미혹당합니다. 종착역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겉사람의 껍질인 육체만 후패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의 미혹 앞에 겉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후패되어 갑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여기서 몸이라 번역된 헬라어 소마(σώμα)는 사람의 육체(사륵스, σάρξ)와 생각과 의지를 포함한 겉사람 전체입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에게는 겉사람의 활동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 중심에서 주님을 나의 삶에서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기 전까지는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겉사람에게 지배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나의 속사람의 바람대로 생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6절에서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through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강건하게 해달라고 간구드리는데, 이는 성도의 속사람은 오직 성령의 다스리심에 놓인 까닭입니다. 이 속사람이 성령을 통하여 강건하여 진 사람은 그의 주장과 생각을 성령께 양보함으로써 겉사람--성품--까지 변화되어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말씀을 사모함과 하나님과 기도로 깊은 교제를 가짐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러할 때 육체라는 겉사람의 껍질 속에 감추어진 겉사람의 알맹이--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는 우리의 자아(自我)는 속사람과 함께 새로워지고 강건하여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서 바울은 이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겉사람)도 살리시리라.”고 역설(力說)합니다.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은 평안하고 유복한 가운데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높이기 보다는 자신을 높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련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지 않고, 찾지 않고 있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때로는 환난을 주심으로 강권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어려움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고 말하실 분은 오히려 그 마음에 걱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고, 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잘못을 범함에도 부모의 징계가 임하지 않는 경우는 그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여 버린 자식으로 여길 때입니다. 혹은 참아들이 아니라 의붓자식일 경우입니다.
징계의 수단으로서의 고난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거나 우리에게 어려움이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생에서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잠시 뿐이요 경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현재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큰 것이며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가장 큰 고통도 생의 종착지에 다다를 때에 그칠 잠시 뿐의 고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턴넬(Tunnel)의 고통이요 다른 하나는 동굴(Cave)의 고통입니다. 턴넬의 고통이란 끝이 있는 고통입니다. 고통이 끝없이 긴 것같지만 어둠의 연속이던 턴넬의 끝에 다다를 때 밝음이 오듯이 사라질 고통입니다.
동굴의 고통이란 끝이 없는 고통입니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항상 그 동굴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중하게 여겨지건 경하게 여겨지건, 모두 끝이 있는 턴넬의 고통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그 턴넬의 길이는 짧습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연단의 한 방편으로 여겨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를 발합니다.
동굴의 고통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속적인 것인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끝과 함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고통이란 육체의 죽음 다음에 이어지는 영원히 죽는(eternal dying), 그러나 죽음과 고통의 끝이 없는 영속적인 죽음이요 고통입니다.

이생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이 아무리 크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잘 견디어나가는 사람은 이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맞이하게 됩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현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각종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중한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 중한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찬송하며 산 사람에게는 그 중한 환난이 경한 것으로 여겨질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는데,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위로의 말씀을 합니다.
우리의 여러 가지 다른 고난이나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할 것은 우리의 바라보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지나갈 잠시의 영광이나 기쁨이나 평안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인이 남편을 병으로 잃고 외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잃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청난 빚까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단 5분만이라도 하늘 나라를 보여주십시오. 그리하면 제가 이 고통을 견디겠나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그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네게 하늘 나라를 보여주면 너는 지상에서 단 일초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게 된다. 고통을 참고 견뎌라. 하늘 나라는 반드시 있단다.” 이것이 위로가 되어 그분은 소망 중에 그에게 임한 고통을 잘 견디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현재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은 다만 잠시 뿐이요 지나갈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과 상통하는 크리스천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4-25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잠간이면 지나가는 현재의 세상에 속한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상과 기업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3 
늙음에 관한 글입니다. “당신은 마흔 살에도 늙을 수 있고 여든 살에도 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이에서도 만일 당신이 늙었다고 생각하거나 배울 것을 모두 배웠다고 여길 때, 당신은 정말 늙은 것입니다. ‘나는 너무 늙어서 그것을 못해’라고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내일을 약속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청년의 활동에 아무 흥미를 못 가질 때,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자기가 말하고 싶을 때, 달콤한 옛날들이 회고될 때 당신은 정말 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사람의 속사람은 성령께서 다스리심으로 인하여 매일 새로워집니다.
이 사람은 겉사람의 껍데기인 육체의 늙고 병듦에도 낙심하거나 소망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을 무용지물로 여기지 않을 것인데, 이는 속사람을 주장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겉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날마다 새로워지고 강건하게 되고, 소망 중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이 사람은 또한 현재에 환난이 임하더라도 온전히 잘 견딜 것인데 이는 그가 바라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한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매일 속사람이 강건하고 새로워지는 삶을 살고 겉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건강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찾아 행하되 하나님의 축복하심 가운데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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