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고후 3:1-3)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靈)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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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20세기 교회를 진단할 때, 현재 기성 교인 중에 10%는 이미 죽었고, 80%는 잠들어 있고, 오직 10%만이 살아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알렌 교수는 교인 중 20%는 주일예배에 출석하지 않고, 25%는 하나님께 기도드린 경험이 없고, 35%는 가정에서 성경 읽는 일이 없고, 40%는 하나님의 소유인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있고, 60%는 기독교 서적을 전혀 읽지 않으며, 75%는 교회에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85%는 전도를 한 명도 못했으나, 교인들 100%가 (천국이 있으면) 천국에는 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통계조사를 발표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 교회들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한국 교회들을 축복하여 주시는 까닭은 교회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10% 내외의 순수하고 열성적인 교인들로 말미암는다고 믿습니다.
목회자 모임에 가면 큰 교회를 사역하는 목사님들은 왠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같고 작은 교회를 사역하는 목사님들은 어깨가 처지고 주눅이 들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큰 교회 목사님은 어떤 특별한 목회의 비결이 있길래 교회가 성장하나?’ 알기를 원하여 그 주위로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큰 교회 목사님들은 그들의 목회 능력이 뛰어나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으며,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그들의 목회 능력이 어딘지 부족하여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거나 자책감을 갖습니다. 이는 교회와 교인들의 숫적, 영적 상태가 목회자의 사역을 평가하는 추천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입학허가를 받기 위해서, 또 졸업한 다음에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기타 새로운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추천서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때가 많습니다. 해당자를 잘 아는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쓴 것이라면 이는 지원자의 인물 됨됨이나 내적 자격요건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외적 조건들만을 가지고 학생이나 직원을 모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경제학과의 예에 있어서,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의 (이제는 작고한) 밀톤 프리드만(Milton Friedman) 교수의 추천서는 곧 취직보증서와도 같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일단은 그의 추천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고 그의 추천을 받은 사람에 대한 그의 평가가 공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추천서는 요식(要式) 행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추천서를 부탁할 때부터 좋지 않은 평가-추천서를 써줄 사람에게는 아예 요청을 하지 않습니다. 저도 가끔 추천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어떤 추천서는 쓰고 나서 뒷맛이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공정한 추천서를 쓰면 그 사람에게 불이익(不利益)이 돌아갈 것같기에 적당한 미사여구의 문구(文句)를 사용하여 추천서를 썼을 경우입니다.
편지는 추천서보다는 더 광범위한 것으로서 추천서와 마찬가지로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는 글입니다. 편지에는 추천서(추천의 편지)를 포함하여 공적인 성격을 띤 요식(要式)의 편지가 있는가 하면, 보통은 수신자와 발신자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입장에서 쓰여집니다. 편지를 읽는 사람은 발신자가 어떤 뜻으로, 어떤 바람으로서, 어떤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명한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가 친구와 신학상 의견의 차이로 관계가 소원(疏遠)하여지고 마침내는 원수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1년이상을 말을 않고 왕래도 없이 지내던 중,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설교말씀 가운데 은혜를 받고 친구에게 화해의 편지를 썼습니다. 다섯 통을 보내면서, 이제나 저제나 친구로부터 소식을 기다렸지만 그 친구로부터는 종종 무소식이었습니다. 브루너는 큰 결단을 하고 친구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 어느 추운 겨울 날 집을 나섰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자기 집 문 앞에 서있는 그를 본 순간 얼음장같았던 그 친구의 마음은 녹아지고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브루너 그 자신이 편지가 되어 친구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외치는 소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서도 불평의 마음을 가지고 떠난 사람들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편지였다고 한다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발신자 그 자신이 편지가 되어 우리에게 배달되신 분입니다.
2
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시 자천(自薦)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맡거나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고 함은 추천서의 유익성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바울도 여러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천거하는 글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했고, 고린도후서 8장에서 모금한 돈을 가져오는 일로 디도와 그 일행을 천거하되,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로 동행하는 자라(17-19절). ...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23절)”고 함으로써 강력한 추천을 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 교회에 유대주의 선생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추천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의 장장의 추천서들을 갖고 왔습니다.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한, 그들이 어떠한 크리스천인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는 추천서이었을 것입니다. 그위에 그들은 자기소개서(=자천서)를 작성해 왔습니다. 그들의 출신이 어떻고, 학벌이 어떻고, 업적이 어떻다는 내용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을 잘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들을 교회의 선생으로 임명하기 위해서는 추천서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미사여구로 가득한 그들에 대한 추천서와 자기소개서를 보고 그들을 선생으로 받아들인 선택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새로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된 거짓 교사들은 그후 그들의 전임자로, 또 고린도 교회의 개척자로 사역한 바울에게 (예루살렘 유대주의 지도자들의) 추천서가 없었음을 문제 삼아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는 변변치 못한 사람이니까 그의 말을 듣지 말라고 부추깁니다.
이러한 부추김이 바울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제 다시 너희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천하여야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가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목회했고, 그곳을 떠난 이후에도 고린도 교회 내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때로는 방문하고 때로는 편지를 써서 문제해결을 위한 도움을 주고자 했던 바울인데, 유대주의자 선생들의 부추김으로 추천서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2,000년전 바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도 불신(不信)--바른 신뢰관계가 결여된--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안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던 목회자의 이력(履歷)이, 교인들과 목회자간에 오해가 있거나 다툼이 있으면, 갑자기 문제꺼리로 등장합니다.
뉴저지에 위치한 제법 큰 교회에서는 목사와 교인들간에 갈등이 발생하자, 2년동안이나 담임으로 시무하던 목사님의 학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조회(照會)를 한 결과 이력서에 사용한 학력이 허위였음이 드러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 교회를 시무하는 목회자들 중에는 이력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요는 학력이나 다른 경력이 문제가 아니라 신뢰관계의 결여가 문제입니다.
추천서 혹은 자기소개서가 필요한 것은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지 잘 모를 때 그나마 차선책(次善策)으로서인데, 고린도 교인들에게 새삼 바울의 자기소개서가 필요하겠습니까?
바울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알지 못하는 다른 교회에 가고자 할 때에도 고린도 교인들의 추천서나 자신의 자기소개서가 필요치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겠느냐?”
고린도 교인들이 설령 바울에 대해서 좋은 천거서를 써준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필요치 않음은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 상태 그 자체를 보는 것이 바울의 목회가 어떠하고 목회자로서 자질(資質)이 어떠함을 아는 척도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의 다소 과장(誇張)되거나 미화(美化)된 추천서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 타인에게는 부정적으로 비춰질지라도,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기도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곳에서 사역을 하였다면 이것보다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품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인 신앙상태가 바로 바울의 목회에 대한 추천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절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따로 천거서가 필요 없음은 바로 고린도 교인들 그 자체가 바울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는 천거서(συστατικός ἐπιστολή, 천거의 편지)라고 언급하다가 2절에서는 단순히 편지(ἐπιστολή)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천거서(추천의 편지)가 흔히 다소 형식적이요, 과장되고 미화된 편지인 반면에, 고린도 교인들 자체로서의 편지는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객관적이고 생생한 증언입니다. 그들에게 좋은 면이 있다면 바울의 목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요, 그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이 있다면 이 또한 바울이 한 목회의 약함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라고 하는 편지는 한 번 쓴 후에 잊어버리고 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판에 쓴 것이기에 그가 어디를 가나 항상 갖고 다니는 것이며 생각날 때마다 읽고 또 읽게 되며, 따라서 그 내용을 놓고 항상 기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어떠한가는 감추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난 모습이요 해서, 뭇사람이 알 수 있고 과장되거나 미화되지 않은 (편지의)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갖고 있는 약함이나 문제도 좋은 의미로--그 자신의 약함이요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의 사역이 어떠함을 짐작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통하여 그가 평가받는 일을 당연하고 합당한 일로 여깁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잡음도 있지만, 바울은 그보다는 전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그들이 바울의 전도와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고 변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됨을 기쁨이요 보람으로 여깁니다.
3절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靈)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우리의 편지”라고 부른 바울은 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니”라고 했습니다. 2절에 이어 3절에서도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그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보고자 함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의 사역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었듯이, 그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은 성령이라는 재료로 바울이라는 펜을 사용하여 성도들의 마음판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신앙상태를 보시고 그들을 때로는 위로하고 때로는 책망하고 교육하여 온전케 하기 위해서 친히 쓰신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편지를 통하여서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의 은혜와 사랑이 어떠하며, 그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心碑)에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이 역동적(dynamic)이요 변혁적(reforming)입니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변화에 따라 편지의 내용이 뭇 사람에게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잘 전달될 수 있습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은 그 편지를 통하여서 그의 뜻이 무엇이며 바람이 무엇인지 전달하기를 원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많은 책들이 있고 저자도 각각 다르지만 최종적인 저자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편지들--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은 모두 결국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지역교회에 속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편지의 내용물입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어떠한지 짐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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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15절에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또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로서 그 주변 사람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해야 할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냄새’와 혼합될 때 악취(惡臭)를 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주위사람들로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르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와 선하신 뜻을 알게 해야 할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물’이 그 편지에 떨어짐으로써 편지지(片紙紙)가 세상의 물로 인해 번져서 그 편지의 내용이 알아보기 어렵게 되거나 변질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뜻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먼저 교회에 다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편지의 내용물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모습으로 뭇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하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히 나타나지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편지의 내용물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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