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전파하는 것” (고후 4:1-6)
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게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괴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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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의 집사 직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랜드캐년(Grand Canyon)을 여행하다가 저녁 어스름한 때에 절벽 가까이에 다가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데 운이 좋게도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 매달려서 겁에 질려 소리칩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습니까? 누구 날좀 도와주세요.”
한동안을 불렀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습니다.
그는 절망감에 훌쩍 훌쩍 울면서 거의 포기한 듯 중얼거립니다. “제발 나좀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너를 구해 주마. 너의 하나님이다.”
“주님이 거기 계시니 저는 이제 살았습니다. 저를 빨리 붙잡고 올려주세요.”
“너는 교회의 직분자니까 나를 잘 믿겠지?!”
“주님, 제가 주님을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매주일 교회에 나갈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도 가끔은 나가고요, 성경도 시간이 나는 대로 읽고 기도도 생각나는 대로 하고요, 변변치 못하지만 십일조 생활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질문은 나중에 하시고 우선 올려주시기나 하세요.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아요.”
“아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네가 나를 믿느냐?”
“그럼은요. 제가 틀림없이 주님을 믿습니다. 아이고 빨리 살려 주세요. 나 죽습니다.”
“그래? 네가 나를 믿는다면 이제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그렇지만......주님.....나뭇가지를 놓으면......”
“정말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한참동안 그 집사님은 머뭇머뭇 무엇이라 말할 것같이 있다가 소리칩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이 없소?”
평안시에는 믿음이 있는 것같이 보이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곤경이나 위기 상황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일 때는 어렵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절망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판단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의 방법만 헤아립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고 물리쳐 버립니다.
한 타운(town)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사단이 이쯤이면 여기서는 더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다른 타운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그동안 사용하던 물품들을 무빙세일(Moving Sale)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고 그들의 삶에서 넘어지게 하고 그에게 굴종하게 하는데 사용된 물품들 중에 교만과 자만과 완고와 게으름과 미룸이란 품목들이 고가의 가격표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전시한 품목들 중에 가장 비싼 품목은 절망(낙심)이었습니다.
고객이 묻습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비싼가요?”
사단은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이 절망(낙심)이란 도구를 사용하여 거의 모든 사람의 삶속으로 파고들어 온갖 종류의 해악을 끼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가장 아끼는 도구입니다.”
키에르케고르(Sören A. Kierkegaard, 1813-55)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하는 일이 조금만 틀어지면 낙심하고 절망할 때 그 사람은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어떤 실패를 경험하면서 또 다른 시도(試圖)를 하는 대신에 낙심하여 그저 주저앉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생에서 넘어지기 쉽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패배(敗北)는 실패(失敗)가 아니라 낙심(落心)이요 절망(絶望)입니다.
2
1절에서 바울은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일군이 되어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의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또한 긍휼하심을 베푸시어 낙심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직분을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여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여서 항상 평안함 가운데 거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리할 때 이 사람은 젖먹이의 믿음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과 시련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것을 능히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어미사자가 새끼사자를 강하게 키우기 위하여 일부러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과 같이, 우리를 시련의 절벽 아래로 내몰아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우리가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함으로 우리의 삶에서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직분을 감당할 때 우리의 낙심함은 사단이 바라는 바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낙심의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주기를 원합니다. “너는 그것을 할 수 없어. 너는 절망일 뿐이야.”라고 우리가 포기하고 그에게 굴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절망의 속삭임’에 쓰러지지만, 이 때에도 하나님을 전력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직분을 잘 감당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도 긍휼의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2절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 했습니다.
교인들 앞에서는 멀쩡한 말을 하는 목사가, 장로가 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을 함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신이 직분자이거나 교인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자신을 모르는 사람 중으로 숨어드는 일은 잘못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사기나 기만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도무지 어떤 분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말씀의 능력과 효력을 무효로 만드는 사람인데, 이는 기실은 그가 말씀을 믿지 못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찌 저 모양이냐?’ ‘저런 사람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는 죽어도 안 다니겠다.’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저런 사람도 축복하시고 구원하신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은 안 믿겠다.’ ‘저런 사람이 가는 천당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까닭이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까닭이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게 하는 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것이며 이 사람은 사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지언정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되면 이 사람의 삶이 바뀌게 됩니다. 전에는 직분이 부담이 되었는데 이제는 직분이 귀하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구원의 보증이신 성령께서 이 사람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매 이 사람의 삶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어 가는 까닭입니다.
직분자의 일을 감당하되 영광스럽고 귀하게 여기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나 보지 않는 곳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간교한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사람을 바라보며 ‘나도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다.’ ‘저렇게 가난과 어려움 가운데도 평안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의 하나님이 저를 도우시나 보다.’ ‘저 사람의 삶을 보니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가 보다’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9-20절에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믿음의 사람은 그의 입술과 삶의 복음 증거를 통하여서 각 사람 마음에 교만으로 인하여 드러나지지 않고 있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갖게 만들며 그 자신이 믿음의 사람인 것을 무언(無言) 중에 삶으로서 스스로 천거하게 합니다.
3절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그의 입술과 삶으로 전파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시요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영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른 삶의 모습으로 전심을 다하여서 증거하였기 때문에 그의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확신이 바울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망하기로 작정된 사람일뿐입니다.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昏迷)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 신”인 사단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로 계속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단이 사람들로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방해함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취는 것을 차단함인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도 하나님을 찾는 사모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보는 바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외형이 아니라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미쁘시고, 신실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공평하시고, 정직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타락함으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고 아담과 이브의 자손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르고 의지하고 그분에게 순종하던 믿음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전에는 불순종의 결국이 죽음인 것을 알고 이를 두려워하였는데, 한 번 불순종의 죄를 범하매 그 양심이 무디워지고 영원한 죽음의 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5절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그 가운데 갖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Savior)이시며 오직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가 온전하고 바른 삶을 살기에 힘씀은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요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무슨 신령한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과 오직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이 주어짐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종이 됨을 아울러 증거합니다.
6절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고 하심은 창세기 1장 3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고 하심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이 있기 전의 상태에 대하여 창세기 1장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기 전 천지는 창조되기는 하였지만 혼돈이요 공허요 흑암의 깊음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빛을 비추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취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은 혼돈이요 공허요 흑암의 깊음뿐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소망이 없고 절망과 죽음의 깊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심으로 소망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사도 요한의 증언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3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4절). ...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9절)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머물며 어두움의 임금인 사단의 노예로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움은 절망이요 죽음인데, 하나님은 소망과 생명의 빛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추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두움의 삶을 벗어버리고 빛으로 나오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 8-9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과연 빛의 자녀들인지 아니면 여전히 어두움의 자녀들인지는 우리의 삶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곧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이로써 우리가 빛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영혼의 깊은 잠에 취하여 있어서 죽은 자들과 함께 누워있는 것을 원치 아니 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일어나서 그리스도의 밝음 가운데 머물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우리의 입술과 삶으로써 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3
하나님의 귀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자만과 완고와 강퍅과 미룸과 절망의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 믿는 사람을 넘어뜨리고자 하나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자 할 때 우리를 결코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나온 사람은 돌이켜 어두움으로 숨어드는 일을 행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일을 벗어버리고, 속임과 간교의 일을 더 이상 행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온전하고 정직한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짐을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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