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12, 2014

“장막집이 무너지면” (고후 5:1-10)

“장막집이 무너지면” (고후 5:1-10)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嘆息)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保證)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
영국 인간유전자위원회의 위원인 존 해리스(John Harris) 박사는 ‘가까운 장래에 인간은 지금보다 2배 이상 오래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는 ‘앞으로 50년간 노령과 관련된 질환의 치료와 인간신체의 노화를 중단시키는 기술의 개발로 인간수명의 극적인 개선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화의 신비가 풀리고 노화방지책이 마련되어지면 젊고 건강한 장수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생명공학자들의 추정을 종합해보면 수십 년 내에 인간의 수명이 120-150세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백년 이내에 인간의 수명이 1,200세까지 연장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합니다.
만일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이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류의 조상들 중에 969세로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창 5:27) 보다도 무려 200세 이상을 더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놈(게놈) 프로젝트의 발전으로 병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하고, 복제인간 제작의 실현으로 낡아 못쓰게 된 인체의 부품들을 대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바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의 영원무궁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세상이 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인간 다스리심의 섭리를 거스리는’ 의학과 과학의 에 발전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사람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셨을 때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옛뱀의 유혹을 받아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는 바람에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거두어 가신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첫 번째 사람들과 이들의 자손들에게 1,000세의 한정된 수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사람들이 점점 교만하여져서 하나님 없는 자 같이 행하고, 또한 창세기 6장에서 보는 바대로 일군(一群)의 하나님의 아들들(파수천사들의 타락, 에녹 1, 2서 참조)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함으로 인간 세상에 죄가 관영(貫盈)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을 120세로 현저히 줄이셨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을 줄이시되 자연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늘에 있던 물층(Water zone)을 터뜨려 버리심으로써 인간의 수명을 현격히 줄이시고, 또 바벨탑 사건으로 세상을 더욱 척박하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 주전 2500년경이고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난 사건이 주전 2100년경이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한 것이 주전 1446년, 다윗의 시대가 주전 1000년경인데, 1,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인간의 수명은 노아의 950세(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산 것으로 미루어 홍수로 인한 수명축소의 피해를 보지 않았음, 창 9:28-29), 아브라함의 175세(창 25:7-8;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 모세의 120세(신 34:7), 그리고 다윗의 70세(왕상 2:10-11; 대상 29:27-28)로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120세까지의 삶을 허락하셨는데, 인간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환경이 계속 파괴(破壞)되어 (ecological aspect, 롬 8:20-21 참조) 인간의 수명 단축에 일조(一助)하였습니다.

연 ‘생명연장의 시도는 비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생명 의약을 발전시키고 자연 환경을 개선하되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의 섭리에 순응하여 질병이 없고 공해와 오염이 없는 쾌적한 삶의 환경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서 120세 전후를 향수하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리심의 섭리를 거역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욕심을 내어 이 세상에서 천세(千歲), 만세(萬歲)를 누릴 요량으로 신체의 부분들을 교체하면서까지 살고자 하고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드는 일을 감행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인류를 물로 다시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 하나님의 높이에까지 높아지고자 하여 바벨탑을 쌓았던(창 11장) 옛 인간의 어리석은 죄를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2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한정된 삶에 대해서 지나치게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잠시뿐인 삶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주 끝이 아니라 그 다음에 더 좋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함은, 우리의 본체인 영혼(靈魂)이 거하던 육체가 후패하여져서 더 이상 영혼을 담을 수 없게된 상태를 말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12장 6-7절에서 장막집이 무너짐을, “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짐을 지나치게 애석(哀惜)하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이요,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로 타락하지 않은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영원히 거하게 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영원한 집”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덧입을 옷인데, 이 옷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부활의 장)에서 썩지 아니할 것이요(42절), 영광스러운 것이요(43절), 신령한 것(44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케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嘆息)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삶 자체가 고통과 고난의 연속입니다. 아무 염려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질병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 탄식하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낡지 않는 신령하고 영원한 몸을 사모한다고 말씀합니다.

3절에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할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로부터 허락되어진 신령한 옷(=몸)을 입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요 소망인데, 이는 벗은 자들로--따라서 부끄러운 자들로 발견되지 않기위함입니다. 썩어질 육신을 떠난 믿는 사람의 영혼은 낙원(樂園)에 이를 것인데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때까지 영혼의 상태로 거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그리스도)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했고 16절에서 “주(=그리스도)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공중에)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비로소 하늘의 신령한 옷을 덧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믿는 사람들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신령한 것으로 감싸주시기 때문에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믿지 않던 사람들의 영혼은 그들의 죄악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로 있기에 벌거벗은 모습이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는 아직 그리스도의 공중재림과 칠년환난과 주님의 지상재림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천상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것과 같이 이미 아무 시간의 간격도 없이 영원하고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들 앞에 펼쳐집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의 영혼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의 영혼은 그의 지상에서의 육체를 떠나는 동시에 영혼의 상태로 머무는 낙원을 거쳐서 눈깜짝할 사이에 (영혼이)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덧입고 영원한 삶을 사는 천국--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낙원에 도착한 영혼은 아무 시간의 간격도 없이 곧바로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새하늘과 새땅의 시민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낙원과 천국은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 이어 반복하여 “탄식한다(스테나조: στενάζω)”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시는 대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비롯한 믿는 사람들의 탄식은 고달픈 인생에서 벗어나 영원한 무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염세주의자의 비관적인 탄식은 아닙니다.
그가 소망 가운데 탄식하며 바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옷으로 덧입고자 함입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 바울은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嘆息)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 가운데 발하는 탄식은 죄에게 종노릇하는, 썩어지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 온전한 몸의 구속(redemption)으로 말미암아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덧입고자 함입니다.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保證)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우리로 영원한 생명의 옷으로 덧입게 하실 것인데, 우리는 이를 이 세상을 사는 동안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로 이것을 믿게 하시며 알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증(아라본: ἀρραβών...guarantee, downpayment, 보증수표)으로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14절에서 바울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라고 했습니다.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환난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담대함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이 끝나면 영원한 세상이 전개될 것이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명의 옷으로 덧입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증으로 성령의 인을 치셨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은 매 순간, 매일 그리스도와 온전히 함께 동행하며 사는 삶은 아닙니다. 여전히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을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가 발견합니다.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 살 동안에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주고 나를 지탱시켜주는 것은 믿음으로의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도 눈에 보이는 까닭이 아니요 믿음으로 행하는 연고입니다.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요 믿음을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의 장막집이 무너져내림--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까닭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불확실함이 그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함 가운데 이 세상 장막집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 삶을 더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1장 23-24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 두(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담대함으로 원하는 바는 이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거하는 삶이지만, 이 세상에서 그에게 복음증거의 사명이 있기에 바울의 전도를 받고 설교를 들을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삶도 유익이 있습니다.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거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한 떠나서 주님을 만날 때에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을 위해서 증거하고 행한 일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9장 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심판에 관하여 혼동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8 참조).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와 바울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믿는 사람은 ‘징벌과 사망의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계시록 20장 12절). 믿지 않던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에서 행위록에 기록된 대로 그들의 믿지 않은 행함으로 인하여서 영원한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심판이 있는데, 이 심판은 그들이 수고한 대로 상급을 주시기 위한 심판입니다. 이는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8절에서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했고, 또 3장 12-15절에서는 믿는 사람들의 공력에 따라서 상을 받는 사람도 있고 불 가운데서 부끄러운 구원밖에 얻지 못할 사람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 주님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주님의 날이 이를 때에 우리가 맡은 달란트를 얼마나 잘 경영하였는가 주님께서 물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장막집이 무너져 내릴 것을 두려워하여 소망이 없는 자의 삶을 살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바라봄이 없이 이 세상이 마치 나의 전부인양 온통 이 세상 삶에 탐닉하는 모습으로 살 것입니까?

바울과 같이 담대함으로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생명의 옷, 하늘나라의 처소로 덧입혀지기를 사모하되, 이 세상 살 동안에도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행하고 수고한 대로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수 년 혹은 수십 년 내에 우리의 수명이 150세가 된다고 하더라도 아니 천 세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 앞에 감사와 찬송을 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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