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14, 2014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15)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15)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13   기록한바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
이탈리아의 위대한 바이올린 주자(奏者)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가 수준 높은 청중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이올린의 줄 하나가 뚝 끊어집니다. 순간 청중들은 깜짝 놀랍니다. 파가니니가 이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숨을 죽여 가며 주시하고 있는데,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또 한 줄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래도 파가니니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을 가지고 연주를 계속합니다. 얼마 안 있다가 세 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집니다. 파가니니는 잠시동안 연주를 멈춥니다. 그런 후에 바이올린을 한 손으로 높이 들고는 “줄 하나와 파가니니”라고 외칩니다. 그는 다시 노련한 기술과 뛰어난 솜씨로 그가 선택한 곡의 연주를 마저 끝냅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그에게 보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에도 이와 같이 줄이 계속 끊어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출세의 줄이 끊어지고, 건강의 줄이 끊어지고, 금전의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소망 중에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의 줄’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의지하던 장로님이 등을 돌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권사님이 뒤에서 그를 비방하고, 열심히 도와주던 집사님이 멀어지면, 그의 목회가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고, 그 교회는 그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던 것이 하나 둘 끊어질 때에도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줄’입니다. 장로님은, 권사님은, 집사님은 목회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지만 그를 사랑하사 외아들을 십자가상에서 대속물(代贖物)로 주시고 그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항상 변함이 없으십니다. 목회자가 이를 깨닫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 다시 전적으로 매달릴 때 그는 그가 감당하는 목회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고자 할 때 그에게 철저한 실망과 배반을 경험케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십니다. 이러할 때, 이 목회자가 경험하는 철저한 실망과 배반은 그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쓴 약’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담임목사님이 아니라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때로 실망하고 때로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목회자가 증거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전혀 실망함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온전하시고, 홀로 기쁨과 소망의 근원(根源) 되시기에 그렇습니다.

2
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ἐν ὀστρακίνοις σκεύεσιν, in earthen or clay vessels)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보배”란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또는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볼 수 있는데, 또 다른 해석은 우리가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이고 드러나니까 어떤 것으로 해석하여도 좋습니다.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this precious treasure--this light and power that now shine within us(이 귀중한 보배--즉, 지금 우리 안에서 비취고 있는 빛과 능력)”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우리 인간의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육체입니다.
우리의 부서지기 싶고 나약한 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귀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고 생명을 주는 복음을 증거할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은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생명의 복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의 사건을 잘 압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괴롭히던 미디안과 싸움을 하고자 할 때 기드온에게 모여든 백성의 수가 3만 2천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명하시어 이중 2만 2천 명을 돌려보내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사사기 7장 2절은,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自矜)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일만 명을 물가로 내려가게 하시고 그들이 물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서 두 그룹으로 구분케 하십니다. 즉, 물을 마시되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과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개의 핥는 것같이 핥아먹는 자들로 나누게 하십니다. 물을 핥아먹은 사람의 수가 삼백 명이었는데 이 삼백 명만으로 수십만 명의 미디안 군대와 대적케 하십니다. 이 삼백 명으로 미디안 군대 진중에 들어가서 그들을 치는데,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 세 대로 나뉘어서 미디안 군대의 진중에 숨어 들어간 삼백 명의 용사가 일제히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할 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적군들끼리 서로 칼로 죽이는 역사를 이루시어 기드온과 삼백 용사로 큰 승리를 거두게 만드십니다.
삼백 용사가 든 항아리의 영적 의미는 사람의 육체요,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횃불은 성령의 불--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빈 항아리와도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되 성령(복음)의 능력으로 채우셔서 ‘이 세상 신(=임금)’인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복음의 능력과 빛이 어두움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심은 이 세상 임금을 물리치고 구원의 놀라운 사역이 이루어짐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서 바울은 이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느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할 수만 있으면 만사형통(萬事亨通)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평안하고 유복한 삶을 바람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항상 그렇게 평안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험산준령(險山峻嶺)이 놓여있고 연속적인 파도가 몰려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원치 않는 환경과 형편 가운데 놓여질 때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의 자세와 내면의 상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쁨이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그의 심령을 가득 채워서 찬송이 나옵니다.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송가 469장 4절)

바울의 삶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바울을 욕하고 중상한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이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확신하기에 싸이지 아니합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사역한 교회의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해서, 목회자로서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내게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낙심하지 않음은 사단의 기뻐하는 일을 하지 않고자 함입니다.
그에게 수많은 핍박과 환난이 몰려옵니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를 수도 없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감당하는 사역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같이하시고, 말씀하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버려진 자가 아니라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하심을 더욱 견고하게 느낍니다.
바울이 당하는 환난이 극에 달하여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가혹한 태형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하고, 배가 풍랑에 파선하여 그의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에도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회의(懷疑)하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에게 영생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습니다.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죽인 것(τὴν νέκρωσιν τού Ἰησού)”이란 바울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the death of Jesus, RSV, NIV; the dying of the Lord Jesus, KJV)입니다. 따라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늘 삶 가운데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삶 가운데 늘 생각하여 깨달아 안 사람에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의 놀라우신 은혜가 그 가운데 나타납니다. 성령이 이의 보증(保證)이 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4-5절에서 바울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탄식할 것이 없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를 살리시는 이의 영이신(롬 8:11 참조) 성령께서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이를 우리 마음에 증거해 주십니다.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산 자”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의 효력)을 바라봄으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자입니다(요한 5:24 참조). 육체적 죽음의 위험에 처해짐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 (그가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서 다른 이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자 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생명)을 우리 마음에만 간직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두움(=사망)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도 빛(=생명)을 비추기 위하여 육체적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자 함입니다.
어차피 육체는 죽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12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이란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직면하게 되는 죽음의 위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적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증거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북한에 숨어 들어가서 선교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그 중에 한 사람이 증언하는 북한에서 행해진 공개처형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반동으로 몰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 사람의 크리스천이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공개처형장에 끌려오기 전에 이미 두들겨 맞아서 온 몸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을 개를 끌 듯 질질 끌어오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의 속주머니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작은 성경책이 땅에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반동으로 몰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침내 총살형을 당하였는데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태연하고 평안하여 보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육체적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을 강건케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보증(保證)을 그들에게 보이신 까닭입니다.

13절에 “기록한 바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고로 또한 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인용한 기록이란 시편 116편 10절을 가리킵니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그의 믿음의 고백은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7-8절).”고 함입니다.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고로 증거하겠다고 서원합니다.

바울도 이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구원을 베푸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하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증거해야 할 것인데, 그리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며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길가에 늘어선 무리들과 함께 제자들은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누가 19:38)고 소리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 19:40).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에 대하여 잠잠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케 하십니다.

14절에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믿는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 그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 20장 5절은 ‘첫째 부활’이라고 했는데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복이 있고 거룩한 것은(계시록 20:6)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며 면류관과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랑과 상급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 이는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여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인하여는 우리에게 자랑과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항상 그의 기쁨과 면류관으로 여겼는데, 이는 그들이 바울의 복음 증거함을 듣고 받아들여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까닭입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그들을 권면할 때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고 말씀합니다.

15절에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육체적 죽음의 위험--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에 처해지기를 자청하고 그의 믿는 바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기에 힘씀은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은혜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져서 더욱 더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발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더욱 더 커다란 영광을 돌리고자 함입니다.

3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처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비방은 우리 자신들 때문에 야기된 것들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세상을 편하게 살고자 하다가 겪는 는 나 자신을 위한 고난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고난 당함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되고자 작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을 위한 고난은 참으로 값진 것이며 이를 잘 감당할 때 그만큼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도 클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의 복음 증거함을 통하여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접할 수 있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더 많은 입술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