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2, 2014

“수건을 벗은 얼굴로” (고후 3:12-18)

“수건을 벗은 얼굴로” (고후 3:12-18)

 
 
  3: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히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들이 어떤 인종(race)과 성(sex)과 계층(class)이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예수님의 형상을 그 마음과 머리에 그리고 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2,000년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셨겠습니까?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지금 이란-이락 부근인 갈대아-우르 사람이었기에 얼굴은 다소 검은 색을 띠고 머리카락은 약간은 곱슬거렸을 것입니다. 2,000년 동안 세상을 유리하다가 피가 타인종과 많이 섞여버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모습과도 많이 다르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양화가가 그린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 흔히 금발의 머리에, 백인의 얼굴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영화에도 백인 배우가 배역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백인은 백색 그리스도(White Christ)를 그 마음속에 갖고 그들의 백인 우월주의를 합리화시키기를 원합니다. 이런 면에서, KKK(Ku Klux Klan) 단원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백인 우월의 수건'으로 마음을 덮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 이전 미국의 흑인들이나 남미(South America)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검은 색 혹은 갈색으로(Black or Colored Christ) 칠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에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고통당하고 가난하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함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평화(Peace)와 화해(Reconciliation)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해방(Liberation)의 혁명가로서만 오신 것입니다. 한국의 1970-1980년대의 민중신학(Minjung Theology)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고통과 억압의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앞면과 밝은 빛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부자는 부자의 하나님을,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지배층은 지배층의 하나님을, 피지배층은 피지배층의 하나님을, 남자는 남자의 하나님을, 여자는 여자의 하나님을 각각 그들의 ‘편견과 굴절의 수건'으로 덮여진 마음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수건을 쓴 얼굴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평생 병들지 않고 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고 처리를 해주는 보험회사원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생에 차 사고가 나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아니하면 차보험회사(Car Insurance Co.)나 건강보험회사(Health Insurance Co.)의 클래임 에이전트(claim agent)를 찾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차보험료나 건강보험료는 그래도 낼 용의가 있습니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만일 죽음이후에 지옥(地獄)이란 곳이 실재로 존재하는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료 지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세축복(現世祝福)이라는 수건을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말씀 속에서 현세축복만을 찾고자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말씀하지만, 이 말씀이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의 눈에 보일 리가 없고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은 그저 그가 명령하고 강청하는 대로 순종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하나님은 그가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셔야 하고, 병이 낫게 해달라고 하면 병을 반드시 고쳐 주셔야 하고, 높은 지위를 달라고 강청하면 반드시 높은 지위를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시면 그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해서,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은 피곤하시고 고달프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많고 ‘이런 사람들을 위한 수건’으로 가려진 가짜 복음(false gospel)이 참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2
1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이같은 소망”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것이요, 의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가 맡기신 직분에 대하여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과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합니다.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광채는 그 끝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덮은 까닭은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광채가 점차 사라질 것이기에 그 결국을 드러내지 않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함은 덮여지고 가리워진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고자 함이 아니요, 그의 증거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러나 저희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그 얼굴에 수건을 쓴 까닭에 이스라엘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 모세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신 것과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 한 것은 모세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 때문도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편견과 강퍅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모세의 얼굴에만 수건이 덮여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도 수건이 덮여져 있어서 약속의 말씀이신 구약을 읽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5절에서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 했습니다.
14절의 부연 설명입니다.
“오늘까지”라고 한 것은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는데’(갈 3:24), 그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현재까지란 뜻입니다. 구약에 예언되어진 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이 그의 생을 통하여 밝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오늘까지” 전혀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덮은 수건 외에 또다른 ‘편견과 완고의 수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덮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수건에 덮여진 모세의 얼굴--‘가리워진 모세의 광채’ 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바라보는 것도 두려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더더욱 두려워서 피하고자 했습니다.
‘두려움의 수건’이 그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안일과 편견과 고집의 수건들’이 그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들의 경배의 대상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를 통한 ‘모세의 하나님’이었으며, 그것도 잘못 이해되고 왜곡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도자로 삼으심으로써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모세의 등뒤로 숨어서 모세의 그늘에 가려진 채로 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4-35절에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대함으로 보기를 원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는 그 얼굴의 수건을 벗고 영광의 광채를 바라보았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하신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글(토라,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을 잘못 해석한 그들의 잘못된 마음의 눈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편견과 안일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수건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간구하고 주의 영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으로 우리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만날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쇠사슬에서 놓임을 받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 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번번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참 자유자가 아니며 여전히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종의 멍에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과 하나님(혹은 교회)의 일을 하는 데 상충함(conflict)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물론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당연히’ 세상의 일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보통사람(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의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여깁니다. 이는 아직도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일은 무시(無視)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 6:33)”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을 믿고,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이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변명(excuse)의 수건’으로 그 마음을 덮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 일은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는 대신에 자기가 하지 않는 일마다 이래서 저래서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고 자기 주장을 전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허락하신 일을 무시(無視)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의 일 다음에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육(靈肉) 간에 강건(剛健)함을 허락하십니다. 적은 수면을 취하고도 피곤치 않게 만드십니다. 시간의 상충을 피하는 지혜를 또한 허락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진리의 말씀에 의지해서 행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신실한 분이시며 진정으로 우리로 자유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신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방법이요 지혜입니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시던 집사님이 있었는데 이 분이 잔병으로 육신이 연약하여져서 목사님께 ‘도저히 더 이상 새벽기도를 나올 수 없노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저윽이 실망하였지만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그분에게 권면하기를, “지금 새벽기도를 쉬시면 안됩니다. 그리하시면 더욱 몸이 연약하여지고 나중에는 주일예배에도 빠지겠다고 말씀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계속 나오십시오. 제가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집사님의 병을 낫게 해주실 것이며 더욱 건강한 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목사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주의 종의 간곡한 부탁이기에 마지못한 심정으로 새벽예배에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간신간신 참석하였는데 목사님의 간곡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보다 더욱 건강한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담대함과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까?
여기서 성소는 “지성소”를 의미하는데 곧 하나님의 찬란하고 밝은 영광이 머물러 계신 곳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때를 얻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을 씻기시매 휘장이 찢어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길을 통하여서 담력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왜 어떤 사람은 아직도 영광 가까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온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특권과 효력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체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니요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자마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9절)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1절)”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는데, 예수님을 3년 가까이 따라다닌 빌립은 어째서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아직 그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받기 전이어서 그들 마음을 덮고 있던 ‘욕망과 편견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벗겨주시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영광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고, 영광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행하되 죽음도 사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고집과 편협과 교만과 왜곡과 안일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어떠한 방법과 모양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여러분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해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여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아니 하였다면, 그리스도 안에 참 자유자의 기쁨과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아직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참 기쁨과 참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카보드: דבכ)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모세의 얼굴에 덮인 여호와의 영광의 뒷면의 광채가 아닌,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앞면의 광채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의의 직분, 영광의 직분이 참으로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질 것이며, 이 직분을 위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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