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2, 2014

“새 언약의 일꾼” (고후 3:4-11)

“새 언약의 일꾼” (고후 3:4-11)
           
 
  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 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18세기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長壽)인 88세까지 살았습니다. 그의 85회 생일 때 주위 사람들이 그의 건강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웨슬리목사님은, “첫째, 날마다 운동을 합니다. 둘째, 60년 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활동함으로 밤에 숙면(熟眠)을 취했습니다. 셋째, 50년 간 여행 중에도 규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넷째, 슬픔이나 걱정 등은 빨리 잊어버렸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훌륭한 믿음, 놀라운 순종, 아낌없는 헌신과 직분의 감당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귀머거리, 벙어리와 장님의 삼중고(三重苦)를 극복한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의 조언입니다. “맹인인 나는 맹인이 아닌 당신에게 한 가지 힌트밖에 줄 것이 없습니다. 내일이면 맹인이 될 사람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사람처럼 그렇게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도록 하십시오. 마치 내일이면 다시 아무 것도 못 만지게 될 사람처럼 모든 것을 만지며 그 촉감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마치 내일이면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 사람처럼 그렇게 꽃의 향내를 맡고 음식의 냄새를 맡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직분을 맡은 일꾼으로서 우리의 삶 또한 이래야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궤계는 하나님을 위한 그들의 일을 내일로 미루게 하지만, 새 언약의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은 오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최선을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20세 이상의 장정의 수가 육십만 명이나 되었지만 믿음의 사람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한때 백성들의 불신앙과 패역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극에 달합니다. 민수기 14장 11-12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위한 모세의 중보의 기도로 인해서 하나님은 노를 거두시고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가운데 다 멸하시지 아니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은 40년 광야생활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믿음이 장성해진 까닭이 아니라 모세, 여호수아와 갈렙을 비롯한 소수의 의로운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모세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오릅니다. 40일을 밤낮으로 시내산에 거하다가 내려와보니 백성들과 자기 형 아론이 그새를 못 참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칭하며 그것에 절하고 춤추고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세는 두 돌판을 내어던져 깨버리고, 금송아지는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합니다(출 32:19-20).
두 번째 산에 오를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9-23).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얼굴로 대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태양도 너무 밝아 바로 쳐다보면 눈이 멀어버리는데, 하물며 태양을 지으신 하나님이야 더욱 광채가 찬란하여 그 존귀하신 얼굴을 감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영광(榮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보드”(דבכ)는 영광의 본체(本體)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광채(光彩)입니다. 햇빛의 따사로움을 받으며 태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광채를 받으며 하나님의 계심을 경험하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해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얼굴에 난 광채로 인하여 그를 주목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해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 설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여호와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있는 광채는 근원적인 광채가 아니었기에 차츰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건으로 덮은 모세의 얼굴의 가려진 광채를 주목하며, 새 언약의 그림자요 모형인 불완전한 율법을 마치 영광의 본체인양 착각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여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9-11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는데,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께서 본체의 영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모세의 수건으로 가리워진 영광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은 더 큰 영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하였습니다.

2
4-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 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자천할 필요가 없는 것’, ‘너희(=고린도 교인들)가 우리의 편지인 것’, 그리고 ‘너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심비에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인 것’에 대한 확신은 바울 스스로가 가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주신 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또 이 확신이 바울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며 오직 이러한 확신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한다고 바울은 증거합니다.

6절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천거서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확신을 주시고 그로 인하여서 만족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 일행을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으신 일을 만족케(충분케, 잘 감당하게) 하십니다.
“만족케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오”(ἱκανόω)는 ‘잘 감당하게 하다’ 또는 ‘충분케 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을 잘 감당케 함이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에서 집사(deacon)와 목사(minister)란 말이 나왔습니다. 일꾼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인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신실한 일꾼은 주인의 것을 탐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주어진 일을 충성되게 잘 감당합니다. 주인의 일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고 했습니다. 그 위에 이 새 언약의 일꾼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한 것인지 우리 각 사람이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문(儀文)은 율법을 말하는데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한 것은 바울이 율법의 역할을 부인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세와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제사장들이 의문의 일군들--구 언약의 일군들이었는데 그들의 역할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의문 곧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께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입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사람에게 오매 그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죄의 결과가 죽음입니다.
의문--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을 초래하는 죄’를 깨닫게 되었는데 율법은 우리를 살릴 힘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다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어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한 율법은 또한 우리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은 죄를 생각나게 하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요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은 그와 같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영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가 먼저 영으로 살아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이 죽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이제 의문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됩니다.
성령으로 살리심을 얻은 새 언약의 일군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의 생의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바뀌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나를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그전에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 없는 사람 같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이 즐겁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7-8절에 “돌로 써서 새긴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의문의 직분의 영광은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사십 일을 함께 거하며 말씀한 까닭에 얻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일시적이요 따라서 없어질 것인데도 감히 주목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일군에게 허락하신 영광은 근원적이요 지속적인 것이기에 모세가 맡았던 의문--구 언약의 직분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은 모세가 감당했던 의문의 직분, 정죄의 직분과는 달리, 복의 근원, 영광의 근원, 광채의 근원인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미암는 귀한 것입니다.
모세의 영광은 결국 없어지고 대체될 모형적인 것이었지만, 새 언약의 영광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광이요 광채이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9절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의문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문의 직분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죄인인 것을 선포하게 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꾼된 신약 백성들에게 맡기신 의의 직분은 죄를 깨달은 사람--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롬 1:17) 의의 복음,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선포케 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직분도 영광스러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는 생명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함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이 일 감당함을 뒤로 미루어야 하겠습니까?
이 일을 감당할 때 그저 침묵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10-11절에 “영광 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과거 모세를 비롯한 구 언약의 일군들이 맡았던 의문의 직분도 영광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요 한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더 큰 영광이 이르매 이제 사라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사람을 살리는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 있을 영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직분을 영광스럽고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알레산더 듀프(Alexander Dupe)는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인도에서 일생을 바쳐서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다가 늙고 쇠약해져서 고향에서 그의 여생을 보내다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귀국했습니다. 그의 귀환을 환영하는 식장에서 그는 인도에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지원자를 호소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호소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혼의 구원함을 얻지 못하고 죽어갈 불쌍한 인도인들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사람들의 무감각한 반응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긴급출동한 의사의 응급조치로 간신히 정신을 되차린 듀프선교사는 자기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다시 강단에 서게 해달라고 눈물로 청했습니다. 그는 쇠약하고 지친 노구를 이끌고 강단에 서서, “빅토리아 여왕이 지원병을 호소할 때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원했는데 인류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만왕의 왕 예수님이 선교사를 보내고자 하시는데 한 사람의 지원자도 없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나는 이제 조국 스코틀랜드에 내 뼈를 묻으러 왔지만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한 사람이 저들의 영혼을 염려하여 겐지스 강변에 해골을 묻으러 왔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비감(悲感)한 심정으로 인도인들을 위한 그의 영혼 구원의 의지를 전할 때 장내는 울음 바다가 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에 선교사로 지원하여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 언약의 직분, 영의 직분을 맡기를 원하십니다.
이 직분이 참으로 귀하고 영광스러운데 우리가 이를 잘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원함과 기쁨으로 새 언약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새 언약의 일군의 직분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지 깨닫게 되고 이 직분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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