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7, 2014

“바울의 변경된 여행계획” (고후 1:12-2:4)

“바울의 변경된 여행계획” (고후 1:12-2:4)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 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었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2: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1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위(魏)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굴이 준수하게 생겨서 임금(衛靈公)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미자하를 찾아와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위나라 국법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를 임금의 허락 없이 사용한 사람은 발이 잘리우는 월형(刖刑)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미자하는 다급한 나머지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 갑니다. 뒤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은 미자하에 대하여, “효자로다. 어머니를 위해 다리가 잘리게 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니!” 하며 칭찬합니다.
하루는 임금을 모시고 과수원으로 갔습니다. 미자하가 복숭아를 하나 집어서 먹는데, 하도 맛있어서 자기가 먹다가 남은 반을 임금에게 드셔보라고 올립니다. 그러자 임금은,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 주는구나. 제 입에 넣었던 것도 잊고 나에게 주니!” 하고 그의 임금 위하는 마음에 감탄합니다.
그 뒤 미자하의 얼굴이 거칠어지자 임금의 사랑이 식어지고 그가 죄를 얻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미자하를 보고 말하기를, “이놈은 일찍이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내 수레를 탄 일이 있었고, 또 지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내게 먹게 한 일까지 있었다.”고 욕합니다. 미자하의 행동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칭찬 받던 일이 죄를 얻게끔 된 것은 미묘한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과 미움의 변화 때문인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에 드는 동안은 미자하의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 맞아 더욱 친하게 되지만, 한번 임금에게 밉게 보이게 되자 미자하의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게 되어 더욱 멀어진 것입니다(「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일을 가끔 봅니다. 어느 목사님을 끔찍이나 위하는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자기 남편 보다도 목사님의 것을 더 챙겨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옆에서 보면,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목사님이 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돕고 모든 모임과 예배에 빠짐없이 참예합니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관계가 틀어지자 이번에는 목사님의 하는 일마다 저지하고 비방함에 가장 선봉이 됩니다. 인간의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마음’ 속의 사랑과 미움이 뒤바뀐 까닭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대부분이 한 때는 바울을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상당수 고린도 교인들이 넘어가서 바울을 반대하고 나섭니다. 전에는 연로(年老)하고 왜소(矮小)한 외모와 눈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나타남에 사랑과 경외를 금할 길이 없었는데, 지금은 바울의 하는 일 하나 하나가 못마땅합니다. 떨어져 있는 바울이 이래라 저래라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같고, 그가 그러는 것이 아무래도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그는 변덕스럽고 경솔한 사람처럼도 여겨집니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해놓고서는 또 갑자기 여행계획이 변경되었다고 말하는 그가 못마땅합니다. 전에는 그의 사도권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유대주의 거짓교사들)이 그에 대해서 “그가 무슨 사도냐?”고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그의 사도권도 의심스럽고 아무튼 그에 관한 모든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2
바울은 현재 그를 향하고 있는 비난(非難)에 대해서 똑같이 맞받아치기 보다는 하나님의 더 큰 영광에 대해서 증거할 기회로 삼습니다.
12절에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였다고 했습니다. 즉, 그 마음에 어떠한 간교나 속임이 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대하듯이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하였습니다.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함은 어떤 이권이나 보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지방 선교는 자비량(自備糧) 사역이었습니다. 사역의 대가로 생활비를 지급 받음이 마땅하지만 처음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고전 9:12) 이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빛을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로써 바울의 자랑꺼리는 하늘나라에 쌓여갑니다.

13-14절에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직선적(直線的)인 사람입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은 화를 낼만한 이유가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고 칭찬을 하는 것은 칭찬할만하기 때문에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짐짓’ 아닌 것을 그렇다 하고 그런 것을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하고 말한 것 이상의 다른 어떤 의도(意圖)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솔직하고 직선적으로 대하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이 그들을 권면할 때에 고칠 것은 고치고 지킬 것은 지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이를 때에 신앙으로 서로 돌아본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에게 자랑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5-16절에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 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라고 쓴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두 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뜻이 있었음을 말씀함입니다.
바울이 아직 소아시아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때 바울의 그리-스 여행계획은 해로(海路)로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 지방에 먼저 도착하고 그곳에서 육로(陸路)로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서 모금한 것을 가지고 다시 고린도로 내려와서 배를 타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가난한 성도들에게 모금한 물질을 전하여 준 후에 그는 로마로 갔다가 서바나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롬 15:28).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 머물 때에 갖고 있던 장차의 여행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여행계획이 뜻하지 않은 사정으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그 자세한 사연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으나 고린도전서 16장 5-10절의 내용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아시아 사역의 기간을 연장시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8-9절에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廣大)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바울의 계획이 변경된 것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보는 바대로, 바울의 2차 전도여행 계획지는 그의 마음에는 소아시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매 그는 그의 선교지를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6-7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소아시아에서의 전도를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향해야만 했었습니다. 바울의 바람 가운데는 서바나에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몫을 바울에게 허락지 아니하시고 다른 사람의 몫으로 돌리셨습니다.

17절에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한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방을 두 번 방문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하였던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저 임기응변적으로 계획을 세웠다가 바꾼 것이 아닙니다. 처음 고린도 지방을 두 번 방문할 계획을 세울 때 바울의 마음에는 분명히 이로써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줄 소망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의 계획이 변경된 것은 사리사욕을 좇는 일로 변경된 것이 아님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세상 이익으로 인하여 ‘그리 한다’고 하였다가 더 큰 세상 이익이 그 앞에 올 때 ‘그리 하지 못 하겠다’고 한 일이 없습니다.

18절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었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의 행동의 근거를 하나님의 미쁘심에 두고 있습니다.
“미쁘시다(πιστός)”는 말은 믿음이 많다, 믿을만하다,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바울 자신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예(Yes)’ 했다가 '아니라(No)'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라 항상 ‘예’만 하기를 원합니다. 그가 지금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할 계획을 변경해야 함은 어떤 육체적 소욕을 따라 행함도 그가 신실하지 못한 변덕스러운 사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그에게 임하셨기에 부득불 변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에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5장 40절 이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실라(실루아노)를 데리고 가는데, 루스드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 디모데를 만나매 그도 함께 데리고 갑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고린도 지방에 이르러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데, 그들이 증거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항상 예가 되었음을 말씀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죽기까지 ‘예’로써 그리하였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심정은 다른 방법이 있으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구원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잔을 마시는 것이 그의 몫일진대 아버지의 뜻대로 ‘예’로써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바울 또한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항상 하나님 앞에 ‘예’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 지방을 두 번 방문하는 것이 그의 원함이었지만,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임하시매 그 뜻을 따라야 하는 그의 행동--여행계획의 변경을 고린도 교인들이 순수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현실은 이러한 바울의 바람과는 달리 그를 반대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위시한 반대파들에 의해서 바울이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육체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되어지고 있습니다.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때로 우리 인간의 계획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변경되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는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도 우리 인간의 생각에는 더디 오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아멘’으로 대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

21-22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의 변경된 여행계획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따른 것이라고 변론하는 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우리들을 위한 (변개함이 없는) 구원계획에까지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구원하시는 증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보증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보증(ἀρραβών)이라고 함은 어떤 일을 확실히 수행할 것을 약속하는 증표입니다.
집을 매매할 때 집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팔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는 계약금 혹은 선불금(downpayment)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 계약을 확실히 이행하시겠다는 표시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1장 13-14절에서 “...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려고 ...”라고 말씀합니다.

23절에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의 고린도 여행계획을 변경한 이유가 소아시아에서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열린 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음을 언급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지방을 방문한 것이 두 번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4절에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라고 했고, 13장 1절에,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된 대로 그의 2차 전도여행때 고린도에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에 명시되어있지 않은데 아마도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심화될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친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였지만, 2장 1절에서 보는 바대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바울은 상한 마음으로 근심만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바울은 적어도 한 차례 이상의 서신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2:3).

고린도 교회 방문을 연기 또는 취소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인간적인 바람은 그가 가서 고린도 교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가 먼저 번에  방문해서 얻은 결과는 실패와 상심뿐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뜻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에 대한 잠시의 방문이 취소된 것을 바울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4절에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로 염려하고 해결을 바라는 뜻은 그들 위에 좌지우지하는 사람으로 군림하려는 뜻이 아니요 모든 문제가 원만히 잘 해결되어 그들의 기쁨을 크게 하려는 뜻입니다.

2장 1-2절에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고 질문합니다.
바울은 그의 원함과는 달리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고린도 방문이 실패함에 다시는 그들에게 근심거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렇게 말씀함은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근본적인 의도는 근심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주려고함이요, 바울 또한 고린도 교인들을 인하여서 기쁨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3절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같이 쓴 것은”에서 그 편지를 고린도전서 혹은 고린도후서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바울이 쓴 어떤 편지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바울은 그의 두 번째 방문의 실패로 인하여서 원래의 여행계획의 변경을 놓고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 계획을 뒤로 미루게 하셨습니다(고전 16:5-9, 고후 2:12).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하거나 나무라거나 그의 속뜻은 이를 깨달은 그들로 종국에 기쁨이 넘치게 하고 또한 그들의 기쁨이 넘침으로 인하여 바울의 기쁨도 크기를 바람입니다.

4절에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 언급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 편지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속썩이는 자녀들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고, 타이르고, 편지합니다. 그들이 듣기 싫은 말을 하는 것도, 나무라는 것도 그들을 가슴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사랑하기 때문인 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3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참으로 중요한 것은 서로 신뢰하고, 하기에 비난보다는 용납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좋아질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우리, 변덕스러운 인간의 ‘알 수 없는’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더욱 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 속에 꿈틀거리는 미움의 마음까지도 덮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의 비난거리가 될 때 같이 비난하고 중상하지 않은 예를 보임 같이, 애매하게 다른 사람에게 욕을 당할 때에도 같이 다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의 힘으로 참아야 할 것이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사람의 약함까지 덮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약속으로 ‘예’가 되어주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에게 ‘예’가 되어주신 것 같이, 또한 바울이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예’가 되려고 힘썼던 것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일에 ‘예’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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