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7, 2014

“근심하게 한 자에 대한 용서” (고후 2:5-11)

“근심하게 한 자에 대한 용서” (고후 2:5-11)
           
 
  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든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
 

1
채근담(菜根譚)에 “간악한 자를 없애고 아첨꾼을 막자면 그들에게 따로 도망갈 길을 남겨 두어야 한다. 이를 하나도 용납할 수 없게 만들면 쥐구멍을 막는 것이나 같다.”라고 했습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대들어 고양이로 낭패를 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병법(兵法)에도 성을 포위 공격할 때는 슬며시 동서남북 중 한 곳은 포위를 허술하게 하라고 합니다. 만일에 도망칠 길조차 없다면 성 안의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공격하는 측도 설령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손실이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인간 관계에서도 궁지에 몰린 상대방을 끝끝내 추궁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변명이라도 아량을 갖고 수용하는 대범함이 필요합니다.

어느 맹인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김선태목사, 「서른 세 번 도전 끝에 이룬 신화」중에서).
어느 추운 겨울밤에 그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요란하게 짖어댑니다. 사모님이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는데, 시커먼 사람이 앞마당에 서있습니다. 사모님은 겁에 잔뜩 질려서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상황을 앞이 보이지 않는 목사님께 말합니다. 목사님은 사모님을 안심시키고는 밖으로 나와 밤손님에게 정중하게 인사합니다. “추운 밤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입니다. 우리 방에 들어가시지요.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끓여서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나는 돈은 없지만, 필요하시다면 옷가지나 여비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절대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앞을 못 봅니다.” 목사님의 말을 다 들은 후 도둑은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냥 가겠습니다.” 하고는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목사님이 버스에서 내려 육교를 넘어오는데, 어떤 사람이 그의 등을 툭툭 치면서 말을 건넵니다. “실례합니다. 저는 얼마 전 밤에 목사님 댁에 찾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날 밤에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마음을 바꾸어 땀 흘려 일하면서 떳떳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번데기 장사를 하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돈 많이 벌면 목사님을 꼭 찾아 뵙겠습니다.”
목사님은 이 사건으로 매우 귀한 것을 깨달았는데, 한 사람을 사랑으로 대한 결과가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함입니다. 만일 도둑이 그의 집을 찾아온 밤에 “도둑이야!” 하고 소리를 쳤다면 궁지에 몰린 도둑이 흉기로 사람을 다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그를 따뜻하게 대하매 그의 마음까지도 움직여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혜 없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잘못들에 욕설과 매로서 일관합니다. “저게 누굴 닮아서 하는 일이 저 모양이야? 또 그러려면 차라리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마라!” 큰 잘못을 범할 때 또 야단치기를, “저게 왜 태어나서 이렇게 괴롭히나? 아유, 저게 자식이 아니라 웬수지...” 이러할 때 그 자식은 부모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고 반항(反抗)하고 더욱 더 극으로 치달아 나중에는 정말 쓸모 없는 사람으로 전락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의 작은 잘못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렇게 징계하심은 이로써 자녀가 그 잘못을 깨달아 하나님의 선하신 길로 돌아오게 하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7-9절에서,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기에 당연히 있을 것이지만 이로써 우리를 죽는 지경에 빠뜨리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는 우리를 곤경과 급기야는 죽음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허물로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사망에 해당하는 우리의 죄(罪)에 대해서는 우리를 징계하시고 죽이시는 대신에 차라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단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우시는데, 곧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살리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심은, ‘우리의 죽음에 이르는 죄’에 대한 형벌이 너무 커서 우리가 그 징계를 견디지 못하고 더욱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을 아시기에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심입니다.

2
5절에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근심하게 한 자”라고 했는데 누가 무엇을 가지고 근심하게 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근친상간(incest)의 죄를 범한 자라고 하는데 바울이 내린 처방을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근친상간의 죄는 마치 누룩과 같아서 온 떡덩어리에 번질 것이기에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교인들 중에서 내어쫓으라고 했습니다(고전 5:13).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육신은 멸하지만 영은 주 예수의 날에 혹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고전 5:5).
이 징계가 가혹한 것 같음은 음행(淫行)의 죄는 전염성이 강하기에 건전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근심하게 한 사람’의 허물은 이와는 달리 전염성이 강한 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2차 방문했을 때 그를 비난하고 불의를 행한 자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도 그렇지 않음은 그런 일을 행한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 그룹이기에, 아니 한 때는 상당수의 고린도 교인들이 여기에 가담했기에 여기서 그들을 말한다고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근심하게 한 사람의 허물이 무엇이든 간에 바울은 그것이 ‘그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 근심이 바울과 상관없는 일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였기에 더 이상 근심거리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 사람의 허물이 너무 큰 것이라 그에게 무거운 징계를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잘못을 범한 것이기에 징계가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의,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6절에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그 사람을 징계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으로 족하다는 뜻입니다.
학교나 기타 기관에서와 같이 교회에서도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징계를 가할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장소이기 때문에 처벌하는 일이 없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교회의 당회와 공동의회에 치리권이 있으며 이렇게 함은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치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한 두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잘못을 범한 사람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징계를 위한 징계가 아니라 회개를 위한 징계가 되어야 합니다.

7절에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χαρίσασθαι) 위로할 것이니(παρακαλέσαι)”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용서(forgiveness)와 위로(comfort)는 그 사람의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뉘우치고 고치고자 함이 역력한데도 불구하고 그를 궁지(窮地)로 몰고가는 것은 그로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기회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잘못에 대한 뉘우침이 있을 때는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의 상처를 위로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히 할 일입니다.
1장 3-7절에서 ‘위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심이 우리가 온전하기 때문에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의 잘못한 일에 대해서 적절히 야단을 칠 뿐만 아니라 야단을 친 후에 자녀의 잘못을 용서하여 더 이상 그 일을 문제삼지 않으며 책망으로 인하여 자녀가 받은 상처를 어루만져줄 줄 압니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사랑으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징계하는 것도 죄를 범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요, 징계한 후에 용서하고 위로하는 일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입니다.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칭찬(稱讚)도 책망(責望)도 지나치면 잘못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징계가 너무 중하여서 그 징계 당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교회 밖으로 몰아낼 때 이는, 그렇지 않았으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도 있었을 사람을 그리 한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사단이 기뻐하는 일을 행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8절에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고 권면합니다.
“저희에게”라고 한 한글성경의 번역은 잘못입니다. 헬라어 원어에도 ‘저에게(αὐτὸν)’라고 되어 있고, 모든 영어성경(RSV, KJV, NIV, TLB, TEB 등등)이 ‘him'이라고 번역한 대로 ‘저에게’가 맞습니다. 곧, 근심하게 한 사람--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징벌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가 그를 징계하듯이, 하나님도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에 징계하십니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도 이러합니다. 한 성도의 잘못에 대해 교회가 징계를 가하지만 그 징계가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할 때, 또 징계 후에 더욱 큰 용서와 위로의 사랑으로 그를 품어줄 때, 이것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9절에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편지는 3-4절에서와 같이 고린도후서라기 보다는 그 이전에 쓴 편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후서 이외에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적어도 한 통 이상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 내의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지적하고 이의 해결책에 관하여 쓴 편지(고린도전서 혹은 추가로)를 보냈으며 또 그 후에(또는 같은 편지 안에서) 벌받은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편지를 보냈을 것입니다. 8절은 이에 대한 반복적인 권면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그의 사도권에 대한 직접적인 변론은 피하면서 ‘그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 지금은 어떤지’ 그의 권면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순종 여부로 판단하고자 합니다. 그가 권면하는 대로 고린도 교인들이 잘 따른다면 이는 그의 사도권이 어느 정도 회복됨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의 사도권은 여전히 공중에 떠있는 상태가 됩니다.

성경에서 누누히 강조하는 것이 순종(obedience)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제사는 드리지만, 예배는 드리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그 사람에게는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에게서 왜 하나님의 신이 떠났습니까?
순종이 없어서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사무엘은 순종치 않은 사울에게 말씀하되,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전 5:1 참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심으로 영원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음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 뛰어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믿음 이전의 믿음’--곧 순종(順從)입니다.

바울이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라고 말씀하는 것은 그의 처방하고 권면하는 일이 사사로이 개인의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확신함입니다.

10절에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의 죄범함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용서하면 그 죄범함이 그에게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바울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용서는 그 개인의 관용함으로 그리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용서로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죄범한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였다고는 하나 그 다음의 모습은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지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경우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바울도 이것을 알기에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용서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와 원수되었을 때에, 그를 죽음에 내어주었을 때에도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모른다 부인하고, 저주한 사람도 그 앞에 다시 나아올 때 그를 품어주시며 사랑으로 대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그 사람을 대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함은 용서가 아니라 회피이고, 다시 ‘사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하겠다’는 표현입니다.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은 사랑과 용서와 위로인데, 사단에게 속한 일은 증오와 반목과 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우리에게 죄범한 사람까지 용납하고 위로하고 다시 사랑하게 하시는데, 사단의 궤계는 우리로 반목하고 분리해서 다시는 사귐이 없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반목과 불화와 분리가 사단의 궤계인지 몰라서 이 길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아서 여전히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함은 회개한 우리의 죄를 덮어두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범한 자를 용서하라고 하실 때 그 용서는 회개한 그의 죄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으며 우리 머리와 입술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넘어뜨리기를 원하는, 우리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하는 사단에게 알면서도 속지 않는 비결입니다.

3
사랑과 용서라는 단어를 교회만큼 많이 오용(誤用)하고 남용(濫用)하는 장소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사랑과 용서의 실천이 교회만큼 인색(吝嗇)한 장소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심하게 욕하고 싸우다가도 술한잔 같이 하면서 해결하고 말짱하게 새롭게 이어나가는데, 이러한 모습을 교회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한번 틀어지면 그 다음에는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서로 쳐다보지도 않든지, 아니면 교회를 갈라서 종교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단의 궤계(詭計)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열심인 사람을 넘어뜨리기를 좋아합니다. 믿음이 크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넘어뜨리고 속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단은 하나님을 근심시켜드리기를 원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미혹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사단에게 속한 사람들이기에 다시 속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간(離間)하고 속여서 사단의 궤계에 빠지게 하기를 원하며 결국에 그의 지배 아래로 끌어들이기를 원합니다.
해서, ‘(잘못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정죄하게 하고, ‘(잘못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반목하고 분리하게 합니다. 이에 미혹되는 사람들은 사단을 기쁘게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마음입니다.
‘인간적인 용서’라는 이름 아래 있는 회피나 무관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로서 나를 반대하는 사람까지 품어주고 껴안는 친화(親和)의 용서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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