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7, 2013

“보이지 않는 소망” (로마서 8:24-25)

                                                   “보이지 않는 소망” (로마서 8: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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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그의 사람들에 대한 축복이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 세상 삶 속에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축복하시매 그의 세 아들과 그의 아내와 세 자부들이 홍수 중에 구원을 받습니다. 노아를 포함한 그의 여덟 식구가 구원받음은 그가 백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에 오래참음으로 하나님의 명하심을 지켜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40일 낮밤으로 계속된 홍수에 다 죽었지만 그와 그의 식구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지시하심만 의지하여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아직 그와 그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온전히 소유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내 사라가 죽을 때 그 땅의 한 조각 막벨라 굴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심은 그에게 많은 가축을 소유하게 함을 통하여서도 보이셨습니다.
또한 그의 소원이었던 자녀 이삭을 허락하시고,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지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를 대신한 번제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을 달라고 매달리며 밤이 맞도록 그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비록 그의 아비 이삭과 형 에서를 속임으로 그의 삼촌 라반의 집으로까지 도망하지만 그곳에서 두 아내와 두 첩을 얻게 하시고 또한 많은 가축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그에게 열두 명의 아들을 주시고 그들로 선택받은 커다란 민족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 요셉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그 과정의 삶에서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13년이 세월이 흐른 다음에 결국에 그의 꿈대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며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 다윗을 축복하시매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그의 평생에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나라를 부강하게 하시며 그의 반열에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동방 우스 땅의 의인 욥을 축복하십니다. 사단이 그를 시험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셔서 그의 소유된 가축들을 약탈당하고 대풍에 그의 일곱 아들들과 세 딸들이 죽임을 당하고 물을 빼앗기고 그의 몸에는 악창이 나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지만, 결국에 전보다 커다란 소유물을 허락하시고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허락하시므로 부와 영화를 회복하십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하는 축복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떤 모습으로 마쳤습니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역할을 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다가 결국에 헤롯에게 목 베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왕 같은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사시다가 가난한 자와 없는 자, 억눌린 자의 친구로 생을 사시다가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는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는 혹시 나중에 한 자리 할 줄 알았지만, 결국에 로마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십자가상에서 거꾸로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나오는 대로 헤롯 왕 때에 칼로 목 베임을 당하여 죽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밧모섬에 귀양보내지고 노년은 소아시아 지방에 머물면서 가난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신약성경 13권의 저자인 사도 바울은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 저명한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게 되고 소아시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로마 등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매맞고 갇힘의 연속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에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신약시대를 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부하고 평안한 삶이 아니라 가난하고 매맞고 갇히는 삶을 살다가 순교당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구약시대를 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많은 눈에 보이는 축복을 허락하시고, 신약시대를 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축복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약에는 있는데 구약에는 없는 계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내세의 영원한 삶이 계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죽으면 다 시올이라고 하는 지하세계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계시하시기 전이라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때가 찬 경륜이 이르기 전인 까닭에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시는 대신에 그를 바라보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계시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하고 풍성하신 축복이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알게 하셨기에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이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의 축복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만드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 삶에서 너무 복을 추구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며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의식주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πίστις)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며, 세상의 미혹을 뿌리치게 합니다.
사랑(ἀγάπη)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어질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두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소망(ἐλπίς)은 현재 보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고(롬 8:24-25 참고), 우리의 믿음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말씀합니다.
구원과 관련하여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표현하는데 바울은 여기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소망은 ‘믿음의 미래적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의 자리에 ‘소망’으로 바꾸어 놓아도 무방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현실일 뿐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망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에 의지하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지탱되어집니다.  믿음을, 생활가운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장식물 정도로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과 이 믿음에 의존하는 소망(所望)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참 소망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과 상통하는 크리스천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장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이란 ‘소망하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우리의 소망하는 것들, 보지 못하는 것들이 실현화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 현재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와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소망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시잠간 뿐이요 현재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나라에서의 기업입니다.
또한 그 나라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실 상급과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즉, 소망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복 받은 사람들 같지만 신약의 성도들에 비교하면 그들이 받았던 복은 그저 사소한 것일 뿐입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본 사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4-26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미래적 표현’인 소망은, 눈에 보이는 잠간이면 지나가는 현재의 세상에 속한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상과 기업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래)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소망의 인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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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다른 환경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는 소망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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