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0, 2013

“죄(罪)의 법과 하나님의 법” (로마서 7:14-25)

“죄(罪)의 법과 하나님의 법” (로마서 7: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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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토라--하나님의 율법(律法)대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의로와져 보려고 했습니다. 사무라이 정신(精神)을 발휘하여 당당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천국에 이르러 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 이것을 실천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과 언어와 행동을 조심하면 할수록 자기는 더욱 더 찢어지는 인간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도덕적인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나의 의사며,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의는 당신이시고 나는 당신 때문에 선함을 입었습니다. 아무 공로없이 주님의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절규하며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진정과 기쁨과 평안이 깃들었고 새로운 생명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통상적으로 율법은 ‘토라’라고도 하는 모세 5경의 계명입니다. 좁은 의미로서는 십계명을 가리키고 넓게는 구약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에게도 율법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전체가 우리의 율법책입니다. 율법이란 말이 유대주의적 냄새가 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이제까지의 로마서를 통해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것은 단 하나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지표요 등불입니다. 왜 신약성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여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의 모양으로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본체이신 그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 사랑함을 보이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샘솟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자발적으로 원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킴은 우리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너무나 불가능함을 느끼게 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느끼는 단계(段階)가 있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한 사람은 그 학문의 끝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시작을 하면 그 내용을 조금은 알 것 같고, 얼마쯤 하면 그 내용이 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이젠 반대로 학문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는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네 번, 다섯 번 읽은 후에는 마치 성경의 내용을 꽤뚫어 아는 척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열 번 스무 번 읽고 본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게 되면 이제는 성경을 다 안다, 성경 내용이 쉽다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 앞에 자신의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가 고백하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미천함을 고백할 뿐 아니라 그 말쑴울 지킴은 더더욱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로다” 고백함은 그의 죄가 다른 사람 보다 더 큰 까닭이 아니요, 그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한 까닭에, 말씀의 거울 앞에 남들보다 많이 다가선 까닭에, 다른 사람들보다 인간의 부족함을 더 많이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바 하나님의 법대로, 선과 의의 법대로 살지 못하고, 원치 않는 바 사단의 법대로 악과 죄의 법대로 살고있음을 고백하며 탄식합니다. 기독교 초기 초대교부들은 대체로 이 7장 후반부의 바울의 모습을 그가 아직 구원 받기전의 모습을 회상하며 기술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만 요즘은 소수의 성경학자들만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후로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온전함을 향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구원받은 바울의 고백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우리의 전신과 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은 100미터 전방에서는 자신의 흠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10미터, 5미터, 1미터, 거울 바로 앞에 이름에 따라서 자신의 결점과 부족을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결함이 많은 사람인가를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러한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은 모든 것이 바른 줄 압니다. 단지 말씀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만이 더욱 더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게되고 해서 이러한 못생긴 나를 사랑하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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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문제는 내 속에 나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자 원하는 마음 말고 이를 방해하는 사단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나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함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실제로의 나의 행동은 그와는 거리가 멉니다.

연애를 해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나의 행동이 나의 마음의 원함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면 이러 이러한 말을 해야지 잘 준비하고 연습도 해봅니다. 그러나 막상 만나서 그를 대할 때면 내가 준비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여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대신에 그를 화나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 속에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텐데 하면서도 표현은 마음의 원함과는 계속 반대로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는 그 사람을 죽도록 좋아하면서도 “갑돌이와 갑순이”의 가사처럼 ‘제까짓것’ 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여 관계가 소원해질 때가 있습니다.
연애를 할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마음에 원함대로 잘 표현하지 못한 것같이, 하나님을 사랑함에도 나의 사랑하는 마음과 원함을 잘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의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난 표현이 달랐다고 해서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화가 나거나 실망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궂이 잘 보일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든--기뻐하든지 화내든지--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의 원함과는 달리 표현된 행동에 그만큼 더 실망하고 화가 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해서, 나의 원함과 달리 행동했을 때 나의 행동에 대해 실망하고 화나기까지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실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람직한 실망입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망으로 인해,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해야지” 결단하고 나의 행동을 고쳐 나간다면, 우리는 이러한 자기 반성과 결단과 고침으로서 성화되어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의 잘못된 행동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의 행동에 실망이 크면 클수록 내가 그만큼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원하는 대로 기쁨을 주지 못함은 나의 마음 얕은 곳에 그를 화나게 함으로 쾌락을 즐기는 삐뚤어진 본성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절에, “내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함 이후로 사단이 인간의 마음 얕은 곳--바울은 이를 지체라고 표현--에 삐뚤어진 심성을 심어놨습니다. 남이 기뻐함을 보고 함께 즐거워하는 선한 심성과 함께, 남의 고통함을 보고 즐거워하는 악한 심성이 병존합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그러한 마음이 있음을 아십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경가운데 불구경, 싸움구경과 사고구경이 있습니다.
건물이 불로 인하여 무너져 내리는 것과 불에 휩싸인 사람들이 안타까와 하는 것, 사람들이 서로 치고 박아 피투성이가 되는 것, 차들끼리 충돌하여 사고를 당하는 것--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짜릿한 쾌감을 느낍니다. 안타까와함은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모습이요, 남의 불행에 쾌감을 느끼는 것은 사단이 몰래 우리 인간에게 심어준 모습입니다.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했습니다. ‘한 다른 법’이라고 함은 악의 법 (사단의 법)이고, ‘내 마음의 법’이란 선의 법 (하나님의 법)인데,   세상을 지배하는 죄(사단)의 법이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를 그 아래로 잡아온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약한 의지로는 이 권세를 이길 수 없어서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우리의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게 합니다. 해서, 바울은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의 법 아래 놓인)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우리가 탄식만하고 좌절하고 실망가운데 몸부림치고만 있지않아도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약한 의지로는 고칠 수 없는 이것--곧, 내가 원함은 하지않고 원치 않는 그것을 함--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도우실 때 능히 고칠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는 바대로 바울이 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선한 싸움(struggle) 가운데 깨달은 것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마음에서 섬기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서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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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혹, 우리가 온전히 육신으로는 마음에서 원하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는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부족을 당연시(當然視) 여기거나 변명꺼리로 삼지않고, 우리의 부족함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 살되,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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