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7, 201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 (로마서 8:12-17)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 (로마서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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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적인 부모가 어떤 사정으로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든지 또는 버려진 아이가 고아원에 자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그 고아원에서 계속 자라 세상의 풍파를 자기의 힘으로 헤쳐나가든지 아니면 어떤 재단이나 개인의 소개로 다른 집에 양자로 입양되어지기도 합니다.
고아원에서 계속 자라날 경우, 고아원 원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아이가 자라난 다음에 사회적응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고아원 원장이 참으로 고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교육에 열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아이의 사회적응 정도와 사회에서의 기반마련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일정한 연령이 되면 고아원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고 혼자 힘으로 사회를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보다 몇 배 이상 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하고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가 어떤 개인이나 재단을 통하여서 입양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어느 가정에 입양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이가 입양된 곳이 동성연애자 부부의 집이라고 한다면, 이 아이는 자라면서 심각한 부부관 또는 윤리관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보는 많은 일들이 정상적인 가정의 삶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정상적인 가정에 입양되기는 하였지만, 양부모가 아이를 홀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를 입양하는 미국사람들 중에는 자녀가 없어서 양자를 입양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아이가 있으면서도 박애정신이나 동양아이에 대한 호기심으로 입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동양아이를 입양하였는데, 그 이후에 아이가 말을 잘 안 듣는다든지 아니면 이런 저런 이유로 싫어져서 아이를 멸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젠가 동부에 살 때 유원지에 갔다가 미국인 여자가 자기 친자식인 듯 보이는 아이와 거의 같은 나이또래의 동양아이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의 아이가 그의 손을 잡고자 할 때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데 동양아이가 그의 다른 손을 잡고 가고자 하니까 그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화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아이와 입양된 아이를 동일한 사랑으로 양육하지 못할 것이면 왜 애꿎은 아이를 입양하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입양된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차별을 느끼며 자랄 것이며 이렇게 자란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살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아가 분에 넘치는 가정에 입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에 넘친다고 함은 그 양부모가 사랑이 넘치고 그 가정이 참으로 화목할 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성장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는 가정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가 입양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고, 입양되어진다고 하더라도 그저 남의 아이를 돌아보듯이, 아니면 자신의 박애정신을 스스로 충족하기 위한 양부모에 의하여 양육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아이들은 그의 친부모라 할지라도 쏟아 붓지 못하는 그러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양부모라고 할지라도 입양된 자녀에게 가장 친근한 사랑을 쏟아 붓는 부모이기에 입양된 아이가 그들을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애정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이에게 양부모는 인간으로서 그의 성공의 터전이요 그 양부모를 통하여 받은 사랑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 가운데 고아와 같이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머물고 있던 고아원은 사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이었습니다. 해서, 사랑은 물론 없고 소망도 없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가정을 동경하고 있던 우리에게 어느 날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 방문하시고 그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가신 곳이 바로 하나님이 부모 되시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가정에 양자로 편입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양부모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인가 알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되, 친자녀 이상으로 사랑을 쏟아 부으시며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게 하십니다.
그의 사랑을 경험한 믿는 자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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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빈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바울은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빚을 졌습니까? 우리의 진 빚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빚이요 구원의 빚입니다. 혹은, 우리가 갖고있던 죄와 허물의 빚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으로 우리는 채권자 되시는 우리의 주인 하나님 앞에 감히 서지 못하고 피해 다녔는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갚을 길 없는 빚을 다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을 다 탕감해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도 탕감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로와진 자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은 그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은혜의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 이르게 함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고 함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안목(眼目)의 정욕(情慾)과 이생의 자랑을 가지고 살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告白)하고 주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였었는데, 그 약속(約束)을 저버리고 여전히 세상사람들과 다름없는 정욕과 자랑의 삶을 일삼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에게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날마다 죽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자아가 죽는 그때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며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만나는 체험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아무 일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며 그분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소망입니다. 나의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할 때 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듣거나 잘못 보아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함에서 우리는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명령이 생각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반드시) 죽으리라.”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옛 뱀이 유혹한다 하더라도 왜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만 먹을 뿐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까?
창세기 3장 2-3절에 이브의 말을 보면,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자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하신 말씀과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명하심이 아닙니다. 의심(疑心)과 불확실한 마음을 갖고있던 이브에게 뱀이 확신 있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뒤집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구약시대의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졌던 바가 없는 칭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해당하는 권세입니다. 신약백성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종”이란 칭호는 받았지만 “아들”이란 칭호를 받은 바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천국에 들어갈 지극히 작은 성도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까닭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Abba Father)라고 부르짖느니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실 때가 있지만, 포악(暴惡)한 주인으로 힘없는 종을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나무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부르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로마라고 하는 강성한 제국이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많은 종들을 거느리며 생활했는데, 그 주인이 자식이 없거나 종들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자나 충직한 자가 있을 때 그를 자기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종이었다가 양자가 되는 사람은 현격한 신분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찰톤 헤스톤이 주연한 ‘벤허’라는 영화에서도 유대인인 벤허는 친구의 모략으로 로마 군함의 배 밑창에서 노예로 전락하지만 전쟁 중에 죽게 된 로마의 장군을 구하고 그의 양자로 편입되매 그의 신분은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지위가 됩니다.

우리가 전에는 소망도 없던 고아와도 같은 자이요 사단의 종노릇하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로 편입됨으로 인하여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바”는 아람어로 한국어의 “아빠”와 동일한 의미로서 아버지를 향하여 최상의 친근감으로 부르는 호칭입니다.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의 영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고 말씀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것이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後嗣)니”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됨도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후사로서 우리에게 유업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가나안땅에서의 안식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영원한 평안의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결혼을 하여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혼인서약을 합니다. 혼인서약에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즐거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도 함께 나눌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이러한 서약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에만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고난에도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예수님을 위한 일은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할 것이며 예수님을 근심시켜드리는 일은 결단코 버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습 중에 예수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연령과 신앙경륜과 직분여하를 막론하고 그 잘못된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러한 영광을 받기에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도 우리가 감당하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놓인 영광이 큰 만큼 우리는 고난을 감당하되 즐거운 마음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초대교회의 순교 당하는 환난(患難)도 없고 공산치하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고통도 없습니다. 다만 평안한 가운데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정과 욕을 죽이는 것이 고난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 고난이 순교(殉敎)나 종교의 자유를 차압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고난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된 까닭이며 인간의 성정은 자기의 권한 가운데 놓인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목숨을 포기하면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주일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피아노연주 구경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전 재산을 포기하여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나의 물질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드리는 대신에 나의 사욕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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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 됨은 우리 신약백성들에게 허락되어진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입양되어진 아들로서 하나님의 독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 중에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권이 큰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된 자로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며, 영광에 참예함을 사모할 때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육신의 약함으로 인한 고난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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