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0, 2013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 (로마서 6:15-23)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 (로마서 6: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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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을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가 그가 힘들게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안되어 보여 트럭 뒤에 타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고맙다고 몇 번을 인사하고 트럭 뒤에 올라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운전사가 거울로 뒤를 보니 그 사람이 여전히 무거운 짐을 등에서 내려놓지 않고 힘들게 있습니다. 운전사는 트럭을 세우고 그 사람에게 왜 짐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힘들게 지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트럭에 타고 가는 것만 해도 미안스러운데 어떻게 염치없이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가는 우리를 ‘구원(救援)이라고 하는 트럭’에 태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트럭에 태워주셨을 때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죄의 짐도 내려놓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트럭’에 타고 가는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죄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구원 트럭을 타고 가면서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를 구원하여주셨는데, 이 죄의 짐은 내가 담당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의 홀가분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짐은 죄의 짐뿐만 아니라 염려와 근심의 짐들도 있습니다.
구원 트럭을 타고 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들--죄의 짐, 염려와 근심의 짐, 슬픔과 좌절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버지니아에서 공부할 때 금요일 저녁에는 대학원생들 성경그룹을 인도하고 토요일에는 대학생들 예배와 성경공부를 인도하였습니다.
대학원생들의 성경공부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20명 정도 모였는데, 그 중에는 유학 와서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 있었습니다. 연결기도(Chain prayer)로서 성경공부를 끝내는데, 아직 기도를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어느 날 믿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하게 느끼고 자신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를 원하여서 기도의 입술을 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감사에 대한 표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데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라 말이 생각한 대로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변소깐에 구더기만도 못한 저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여주심을 감사합니다. ......”
그 다음에도 무엇이라고 기도하였지만 기억이 없고, 고개 숙인 모든 사람들이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그의 표현에 모두 이를 악물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습니다. 결국, 누군가가 터뜨린 웃음을 시발로 하여 모두 배를 잡고 깔깔 웃고 말았지만, 그의 표현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 상태를 가리키기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한 사람이 가는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헨나’(γέεννα)는 원래는 히브리어적 표현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온 것인데, 이곳은 온갖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고 또 소각하기 위해서 불을 지피는 곳이었습니다. 해서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연기가 끊임없이 하늘로 오르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더러움과 악취의 극치의 곳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의 종국은 변소깐의 구더기 신세보다도 못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는 극에서 극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고 은혜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젊어서는 성질이 포악한 노예상선의 선장이었지만 그의 나이 23세에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연안을 항해하다가 험한 폭풍을 만나게 되고 그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 작은 간구를 드립니다. 그가 폭풍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해하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매 절마다 ‘주님의 은혜’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χαρίς)는 ‘태양에서 발산되는 햇살’과도 같은 것으로 태양보다 더 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광채입니다.

뉴톤이 세상을 떠나기 2-3년 전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목사가 찾아오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한 후에 성경말씀을 읽어내려 갑니다. 그 친구목사가 고린도전서 15장 9-10절을 읽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구절에서 뉴톤은 감동적인 독백을 합니다:
    “나는 마땅히 되어야 할 내가 아니냐. 아, 얼마나 불완전하고 부족한가! (현실의) 나는 내가 바라는 내가 아니야. 나는 내가 소망하는 내가 아니야. 나는 곧 이 육신을 벗어버릴 거야. 육신이 있으면 모든 것이 불완전과 피투성이지. 나는 마땅히 되어야 할 내가 아니고, 내가 희망하는 내가 아니지만 내가 죄와 사탄에게 노예 되었던 과거의 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그 사도(바울)와 함께 충심으로 인정할 수 있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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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6장 전반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이 세례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가 필요한 것은 ‘의에 이르고 구원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4장 아브라함의 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그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도, 율법도, 행위도 다 그 후에 따릅니다.
우리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함에 이른 사람에게 세례--“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왜 필요합니까?
바울은 명백히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로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이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함에 이른 사람이 싫어하고 떠나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에 거하고 죄를 짓는 삶입니다. 그것은 내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단의 종속물인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마음과 행실로 사랑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바울은 1절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의로움과 죄는 서로 상치되는 것으로서 의로와진 사람은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값싼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 사해주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일부러 죄짓는, 죄지으면서도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긍휼을 거두신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하나님께 항의(抗議)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중에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세례”가 우리에게 필요함은 우리가 마음으로 미워하는 죄에서 떠남이, 벗어남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도우심으로 불법과 불의에서 떠나 의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완전(完全)에 이르는 삶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 성화되어지는 삶은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를 수 있는 삶이 아니며, 우리의 결단과 간구와 함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6장 후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실천적인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겠노라--죄의 법 혹은 그늘에서 벗어나겠노라”하는 것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실천도 없고, 부족함도 깨닫지 못하고 또 해서 간구함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을 무의미하게 믿지 않는 자와 다름이 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성화의 결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디모데전서 4장 7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성화의 끝--곧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하다’(γυμνάζω)는 운동선수가 체육관에서 땀흘리며 훈련하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과 땀흘리는 연습만 가지고도 부족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우심입니다. 이릴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우리를 의의 병기, 순종의 종으로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종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종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있는 사단에게 속한 사람들은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짐승의 표를 이마나 오른 손에 갖고 세상을 살아가고, 요한 계시록 7장과 14장, 에스겔서 9장에 있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표 또는 어린양의 표를 이마에 받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세상에서의 삶은 비슷하거나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짐승의 표를 받은 세상에 속한 자의 종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요 사망인 반면, 하나님의 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의 종국은 생명이요 상급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단에게 권세가 넘어간 세상에 살면서 짐승의 표를 받고 이 사단이라고 하는 짐승에게 경배하는 그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결국이 하나님의 진노이었는데 하나님의 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17-18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았건 알지 못하였건,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의 결국은 로마서 2장 5절에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진노요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나타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되고, 사형의 선고를 받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형장을 향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사면(赦免)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해서, 우리 입술에는 감사함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이르는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19절에서 권면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1-22절에서 바울은 죄의 종노릇하던 옛 사람과 의의 종이 된 새 사람의 열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가 죄의 종노릇할 때 무슨 열매를 얻었습니까?
열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5장 4, 8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1장 43절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열매 맺지 못하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열매 맺음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열매 맺음이 없겠습니까?
믿음의 결과 혹은 표현이 열매인데 왜 열매 맺음이 없겠습니까?
이 열매가 무엇입니까?
이 열매는 밖으로는 전도의 열매이며, 내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내적인 변화--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선포합니다.
죄 아래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과 은혜 아래서 의(義)이신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것이 그렇게 큰 구별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으로 그의 주되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의로와지고 구원함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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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까?
우리는 먼저 의와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믿음 생김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그의 마음에 들게됨이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이 믿음이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이라고 하는 완전함에 이르도록 결단하고 연습하고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실천과정에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는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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