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聖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로마서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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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홉(Anton Chekhov, 1860-1904)의 “귀여운 여인”이란 작품에 올렝카라고 하는 여인이 등장(登場)합니다. 그가 연극 극장을 경영하는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그의 말하는 것이 온통 연극에 관한 것이 됩니다. 연극을 보는 것이 왜 우리 인생에 유익이 되는가? 연극공연을 하는 사람의 의미등등 이 남편도 올렝카를 통하여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죽고 맙니다. 곧이어 올렝카는 목재상을 경영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 귀여운 여인 올렝카는 나무에 대해서 생각하고 목재의 예찬론자가 됩니다. 나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또 동네사람들과 대화할라치면 목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그도 죽고 이제는 주둔 군대의 수의장교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또 동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크리스찬으로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와 짝하여 사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됩니다. 세상과 짝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처럼 이야기하게 됩니다.
성령님과 짝하는 사람은 성령님의 눈과 귀와 입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성령님의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갓결혼한 남자와 여자는 별로 닮은 점이 없는데 이들이 오랫동안 같이 살게 되면 서로 닮아 갑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 같아집니다. 남편이 김집사님을 미워하면 부인도 김집사님이 싫어집니다. 부인이 이장로님을 좋아하면 남편도 이장로님이 좋게 여겨집니다. 부부의 금실이 좋으면 전혀 달랐던 얼굴생김이었는데 생김새도 비슷해짐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닫혔던 마음 문을 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경배드리는 일에 관심을 갖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셨는데,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란 말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께서”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은 바로 “성령”이고, 해서, “성령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에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세상사람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교회에 분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주니께로 나오게 한 분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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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은 로마서 전체의 클라이막스(Climax)요 기쁨의 장입니다.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 때, 나는 죄인이요 죽을 목숨이더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내가 의로와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을 사는데도 한가지 나를 괴롭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고통이 있습니다, 괴로움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고자 하는데 왜 여전히 죄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허물을 범하고 살아갑니까?” 이때 그리스도의 영께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합니다: “네가 죄와 허물을 범하고 있지만, 너는 죄에게 종노릇하여 죽음에 이를 것이 아니라, 너의 육체는 죄아래 놓여있지만 너의 영혼은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의 종이기 때문에 사망이 너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25절에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죄의 법을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울이 8장에서 말하고자 함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을 위하여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죄아래 놓여 죄짓는 것으로 고통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더 많이 더 깊이 체험함으로서 죄를 이겨가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되 우리의 관심이 여전히 세상 것이요 교회내에 여전히 분쟁이 있다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교회까지 오게는 하셨지만,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보다는 성령을 방해하는 인간의 역사가 더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죄를 정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벌에 이르는 심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를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보는 바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종노릇할 것이 아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죄있는 인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에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일 때, 우리는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6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지만, 우리의 자아와 탐심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지 못할 때,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좇아 여전히 사망에 거하는 자요,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아뢰고 성령께 전심으로 의지할 때, 성령은 우리의 연약한 가운데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
9-11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믿는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靈) 안에 있는” 이란 의미이며, 곧 "성령 안에 있는”의 뜻입니다.
9절에는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으로 삼위를 총칭하여 하나님이라 불렀고, “하나님의 영” 또한 “성령”입니다.
또 9절 후반에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했는데, 이것 역시 성령의 다른 표현입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이 또한 성령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아버지의 영,“ ”하나님의 영“이 다같이 성령인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다같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리 닮았다고 하더라도 두 개의 별다른 개체(個體)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영을 갖고, 아들은 아들의 영을 갖는 것이지, 아버지의 영혼이 아들에게 전가(transmigration)되지 않습니다. 아들의 고통을 아버지가 이해하지만 그 고통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별다른 두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은 곧 아들의 영입니다.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과 성령이 모두 같은 하나님의 영--하나의 영입니다. 해서, 아들의 영혼이 번민할 때, 아버지의 영혼에 번민함이 있습니다.
9절에 “하나님의 영--곧, 성령이 너희 속에 거하시면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고 했습니다. 해서, 우리는 사망의 생각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의 생각을 갖습니다.
10절에 “그리스도께서--곧,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바깥사람--몸은 육신의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영은 의를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산다”고 말씀합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아버지의 영--곧,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영이 사는 것만을 언급(言及)했는데, 11절에서는 10절에서 육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몸이 마지막 때에 부활되어 살 것을 말씀합니다.
앞으로 수십년 내에 공상소설이나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복제인간(cloning)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작은 물체나 동물의 복제는 이미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복제인간이 만들어지는 때가 온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복제인간의 제조가 인류의 산업이나 의학에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인력이 부족한 나라에 복제인간을 적당히 만들어냄으로 생산공정을 도울 수 있고, 불의의 사고로 팔·다리를 잃는 사람은 헌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의 옷으로 말짱하게 살 수 있고...... 그러나, 그것이 창조주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건일까요?
구약의 바벨탑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멸망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물에 잠기지 않을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음으로서 흩어짐을 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면만을 고려할 때 이는 재난 다음에 더 큰 재난을 면하고자 하는 준비성이 있는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무너뜨리신 것은 이들 인간의 준비 가운데 하나님께 의지하는 대신에 자기들을 의지하는 불신앙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들은 물로 인한 멸망을 막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복제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봄에서 떠나 인간의 과학과 지식에 의존하고자 함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대항함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소망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바 된 썩어질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교만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해산의 고통과 함께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순리일진데 복제인간의 제조는 이러한 순리를 거스리는 역리일 것입니다.
더더욱 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현대과학은 사람의 겉 모습은 복제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그가 지으신 인간 중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성령은 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personality)과 의지(will)를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닌 인간의 창작물--복제인간 속에 거하려 하시겠습니까?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복제인간은 활동한다 하더라도 죽은 자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믿지않는 사람들도 말하자면 복제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다고 말하지만 죽은 자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복제인간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인데, 인간의 창작물--영혼(soul)이 없는 복제인간에게는 심판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여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을 복제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믿는 사람의 원본(original)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믿는 사람의 복제품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거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message)로 볼 때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성령이 없는 복제품의 생각은 아마도 지극히 기계적이고 계산적일 것이며 그들은 이 세상의 임금--사단에 의해서 지배되어질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세상이 온다면 인류는 사단의 수중에 빠지게 될 것이며, 얼마 있지않아 노아 때와 같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일시적 심판을 가하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최종적인 심판을 가하실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경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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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자유자가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영의 생각인 생명과 평안을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의로 인하여 영의 살림을 받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영의 살림 뿐만아니라, 장차 우리의 죽을 몸도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대로 썩지 않을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됨을 받습니다.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인도함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바라기는, 성령이 우리 각 사람안에서 주인으로서 거하시고, 동행하시고, 역사하시는 각 사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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