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0, 2013

“율법(律法)과 죄(罪)” (로마서 7:1-13)

                                                  “율법(律法)과 죄(罪)” (로마서 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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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조 중기에 상진이라고 하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농촌 길을 가노라니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농부가 있길래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는지 물어봅니다: “여보시게, 검은 소와 누렁 소중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나?” 농부는 밭가는 그곳에서도 대답할 수 있을 터인데 궂이 밭둑길까지 나와서 그냥 말해도 될터인데 그 선비의 귀를 빌어서 귀에다 대고 일러줍니다. 상진이 농부에게 왜 그냥 말하지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농부는 또 가만히 대답합니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칭찬받는 소는 좋겠지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좋겠느냐?” 말합니다. 농부의 말을 듣고 상진은 평생에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사물과 환경을 긍정적으로 보며 생을 보내면서 영의정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무심코 범하는 잘못으로 인하여 자녀들이 삐뚤게 나갈 수 있습니다.  형제와 비교하여 칭찬을 듣는 자녀는 교만하여질 수 있고, 다른 형제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자녀는 열등감으로 어둡게 자라거나 사람을 미워하는 바음이 그 가운데 자라납니다.
부모의 비교의 소리를 듣고 자란 그들이 그 자녀들에게 또 상처를 주는 말을 합니다.
부모의 말 실수는 또 자녀들이 듣는 데서 이웃 사람이나 교회 사람들을 흉보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이러한 말을 들을 때 부모가 흉보는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나 장로님, 혹은 목사님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 자녀가 좀 더 자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흉보는 부모님의 신앙이 별 볼 일 없이 보여서 교회생활에 염증(厭症)을 느끼고  등한시(等閑視)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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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서 의로와짐의 결과와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음을 설명하고,                                              
6장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성화의 삶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시고 죽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신령하게 부활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서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의의 병기로 드려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라--설명한 바울은 7장에서 그러한 우리를 방해해온 그리고 여전히 방해하고 있는 죄와 율법의 문제를 다룹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기 전--아직 그리스도밖에 있던 이방인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 사람은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그 사람은 그것이 죄인줄 모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은 사람의 잘못은 죄와 율법을 자기 나름대로는 안다고 하는데, 제대로 이해(理解)한 것이 아니라 오해(誤解)하여 믿음이 자라지 않고 성화(聖化)되어지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해서 영적으로 단단한 음식을 씹어 먹지 못하고, 늘 젖이나 빠는 간난아기의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함에 결혼한 여자의 남편과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고 재미있기 위해서는 남편이 사랑스럽고 남편을 위해서 자꾸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남편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고 남편이 무섭고 엄하게만 느껴지고 남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소박맞지 않으려는 의무감에서만 나온 일이라면 그 일은 아내로서의 일이지만 부담스럽고 굴레에 묶인, 해서 일생이 고통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자유를 갈구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사람도 있지만 인간은 그를 조이고 동여매고있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습니다. 스티브 멕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빠삐욘(Papillon; 나비)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의 자유를 향한 탈출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붙잡히면 또 탈출을 시도하고 끊임없는 자유에 대한 도전(挑戰)입니다.

이조시대 양반들의 귀향지에서의 삶은 비교적 자유가 많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귀향에서 빨리 풀리기를 원함은 물론 복권(復權)을 바라는 마음에서이겠지만 또 다른 것으로서는 자유한 것 같지만 보이지 않게 그들을 붙잡고 있는 끈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은 마음에서 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가고,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함이 나에게 있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놓이게 된다고 하여 그 율법을 지키려 할 때 하나님의 율법은 나에게 큰 부담이요 속박입니다. 이 율법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까지도 나에게는 무서운 남편이요 그 분이 명한 율법을 지키지만 내게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이 무서운 남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늘 내 마음 속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남편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고 세상의 남자를 만나 그와 짝할 때, 나에게 엄하고 무서운 율법과 동일하게 보이는 그 하나님께서 나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아 그러지도 못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함이 없기 때문에 율법의 시킴대로 사는 나의 삶은 평안 대신 고통입니다.
많은 옛 여인들과 우리의 할머니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행복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상전인 남편의 몸종과도 같은 삶을 살면서 이것이 여자의 운명이거늘, 또 시집가는 딸에게도 이것이 여자로 태어난 팔자요 죄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요즈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와 같이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며 그것이 바른 믿음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반대의 극(極)은 이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유로부터는 동떨어진 방종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율법을 될 수있는 대로 안 지키는 것이 바른 크리스찬의 삶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자유를 주시려고 함이십니다.
잘못된 결혼관계는 폐하고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던 율법의 모양으로 비춰진 전 남편인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로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만 보였습니다. 내가 조그마한 잘못을 하더라도 징벌하는 그러한 분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참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의 오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은 이전부터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비하시고, 치료하시고, 거기 계시며, 우리에게 승리주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우리의생각(imagination) 가운데 무서운 하나님을 마음 속에 그린 것이고 해서 무섭고 우리를 억압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이 부담스럽고 지키기 싫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른 하나님의 모습--내가 두려운 마음으로 내 멋대로 색칠한 그런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항상 사랑해주시며 내가 떠나있을 때에도 나를 기다리고 계신 은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실, 호세아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호세아로 음녀 고멜을 사랑하고 용서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용서와 사랑이 그러함을 알게 하셨지만 미련한 인간은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의 옷을 입고 닥아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스런 남편이신 하나님을 우리로 알게 하신 다른 사자(messenger)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자유 의사로 인간을 짐짓 사랑하는 세상보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을 택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억지로 이 사람과 네가 결혼해야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여 세상의 조건과 결혼하는 그 결혼보다는 내가 사랑하기에 결혼하는 그 선택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참 남편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되 삼강오륜이나 다른 법에 메이는 그러한 의무로서 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의 이목(耳目)을 의식(意識)하여서 할 것도 아니요, 마음에서 샘솟는 사랑하는 님이기에 나의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러한 마음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6절에, “이제는 우리가 얽메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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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외면적인 모습--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하나님을 미루어 판단하여 하나님은 무섭고 징계하시는 분이라고 짐작하였는데 그렇다고 하여서 우리로 잘못 판단케 한 율법이 잘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 지킴이 우리에게 부담이 된 것은 그 율법의 존재목적을 우리가 오해한 까닭이지 율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어떤이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았던 종들은 잘 경영하여 배로 증식함으로 주인이 기뻐하는일을 하였는데,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자기의 게으름은 탓하지 않고 주인에 대해서 자기의 편견을 말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러나, 이 게으른 종이 그 주인을 판단함은 주인이 그러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삐뚤어져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거울에 삐뚤어지게 비쳤을 뿐입니다. 이 주인은 굳고 악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부드럽고 종들까지도 사랑하는 해서 ‘종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거기서 즐거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의 어떤 적은 부분을 지키지 못함을 징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심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질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더라.” 이 말씀은 율법이 없을 때, 혹은 율법을 알지 못할 때, 탐심이 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는 원인을 살펴보면, 사고로 죽는 경우를 제외하면 암(癌)으로 죽는 경우가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해서, 요즘은 몸의 어디가 조금 아픈 듯하면 ‘암이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대의학이 발전한 것 같지만 암을 초기에 발견하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이 죽습니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하거나, 6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강하던 사람인데 갑자기 죽었다고 하면서 병명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는데 아마 그 많은 경우가 암(癌)으로 사망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죄는 마치 이 암(癌)과도 같은 것입니다.
50년전의 사람이 암인줄 모르고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것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암으로 인해서 죽은 것인데 다만 그것이 암인줄 모르고 죽은 것입니다.
현대의학이 사람의 몸속에 있는 병의 원인을 암으로 밝혀내는 것--진단하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한 율법의 역할입니다. 사람의 병을 암으로 밝혀내었다고 해서, 의사의 진단이 죄(罪)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진단이 죄가 아니지만 병을 고치고 환자를 살리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환자가 살기 위해서는 의사의 치료와 약과 환자의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또는 믿음의 기도로 나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죄(罪)라는 병이 있습니다. 율법은 무엇인가 하면 이 죄가 우리를 하나님께로붙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죽게하는 병이라고 밝히는 의사의 진단입니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이 환자를 죽게 하는 것도 아니고 살리는 것도 아니었듯이 이 죄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진단하는 이 율법도 우리를 죽게 하거나 살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병고침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병을 치료하여야 하는 데, 우리의 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치료되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럴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선한 것’이란 율법입니다.
의사의 진단으로 내 몸에 병인줄 모르던 것이 병으로 밝혀졌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이 율법으로 우리 몸 속에 있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죄를 죄라고 진단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해서 우리는 이 죄의 병원균을 죽이는 치료를 해야합니다. 그 치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진단하기 위한 것일 뿐아니라 예방의학의 목적도 있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청결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병을 예방하는 생활이며, 혹은 건강식품을 먹는 것이 병에 대한 치료와 건강을 유지하며 질병에 대한 예방의 목적도 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은 병에 대한 진단이요 치료의 첫걸음일 뿐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병으로부터 예방되어지고 건강함을 유지하는 성화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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