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나타날 영광(榮光)” (로마서 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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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마당을 밟고있는 주일날 두 시간이 일주일동안 그들의 믿음생활의 전부(全部)인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되 왜 교회에 다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2-13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이르시기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일 날 주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는 일주일동안 내가 살아가면서 나의 몸으로, 나의 생활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주일예배는 참 예배인 우리의 일상의 삶으로 드리는 영적예배의 준비(準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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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苦難: sufferings)은 성경 전체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主題)중에 하나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고난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의 고난(苦難)은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犧牲)으로 그 절정(絶頂)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사람들의 고난과는 그 종류를 달리 합니다.
인간의 고난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삶 그 자체에 있는 내재적(內在的)인 문제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고난당하실 필요가 없으며 인간의 고난밖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의 영광에 이끄시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청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고난의 연속(連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가운데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는 그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장차 그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봄으로, 그는 사단과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은 장차 그들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봄으로 현재 당하는 고통가운데 인내해야 한다고 역설(力說)합니다. 이 영광(榮光)은 믿는 사람들만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영광이 나타날 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양자됨의 약속이 실현될 것인데, 이를 기다릴 때 우리 믿는 사람들, 모든 피조물, 성령이 각기 탄식함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영광나라의 시기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장차 우리에게 임할 미래의 사건이지만, 약속을 변개(變改)함이 없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미 실현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부르시고, 미리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시간적 제약 가운데 과거의 삶을 살았고,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미래를 예견하며 살아갈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시간적 제약이 없어 우리의 장래 일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종종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것을 변개함이 없는 분이신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약속한 것을 식은 죽 먹듯이 너무나 쉽게 깨뜨리면서 살아갑니다. 해서, 도무지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주님이 이런 분이라면 여러분은 그러한 주님을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현재 당하는 고난들(τά παθήματα)을 말할 때, 이 고난들속에는 모든 종류의 아픔, 환난, 역경과 고통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 파세이마(πάθημα)는 외적인 고난, 불운, 어려움, 악(惡)과, 내적으로 당하는 고통과 근심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우리의 약함, 모욕, 박해, 역경, 차별등 모든 종류의 해(害)당함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그러한 많은 어려움과 환난(患難)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고,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恩惠)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苦難)도 받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잘 감당함은 소망중에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는 쪽으로 나가는 삶이며, 이 고난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여(賦與)된 특권(特權)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지금 보기에는 매우 가혹하고 심각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경과(經過)함에 따라 지나갈 고난입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영원합니다.
이 영광은 19절에 이른대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나타남을 피조물(被造物)들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합니까?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들은 더 이상 본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의 영광스런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썩어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동물과 나무들과 풀들과 바다의 물고기들과 자연의 모든 것들이 죄아래 놓이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를 범한 까닭이 아니라 피조물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함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만물 가운데 인간을 으뜸으로 지으시고 다른 피조물을 주심은 창세기 1:28-29에 이르신 대로 인간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소유로 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해서, 인간을 위해 지어진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썩어짐의 운명(運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영광의 때를 고대함은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삶을 소유하게 될 때,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저주에서 풀려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들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땅은 사단의 세력에서 회복되어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이때, 믿는 사람들의 영광이 나타나고, “새 땅”은 구속함을 얻은 믿는 사람들의 땅이 될 것이고 피조물도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받고 자유(自由)함을 얻게 됩니다.
피조물과 함께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영광의 때가 이르기를 고대합니다.
23절에서,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했습니다. 우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축복의 보증(保證)을 갖고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탄식함으로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구속함을 받을 그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22-27절에서 바울은 삼중 탄식(歎息)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통 중에 탄식하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속으로 탄식하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탄식은 실망과 소망없는 중에 하는 한탄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의 탄식(歎息)은 그들 환경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된 이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양자됨과 몸의 구속을 소망하는 간구의 탄식입니다.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말씀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현실일 뿐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일뿐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망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에 의지하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지탱되어집니다. 믿음을, 생활가운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장식물 정도로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과 이 믿음에 의존하는 소망(所望)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참 소망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歎息)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軟弱)함으로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놓칠 수도 있는데,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소망함을 붙잡아주시므로 잘 견뎌냅니다. 모든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어달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기 위하여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무슨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를 때가 많이 잇는데 이 때 하나님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어주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우리 인간 편에서 바라봄이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 편에서의 기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우리중 어떤 사람의 삶은 실패의 연속(連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신앙이 경건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참으로 신실한데도 그의 형편을 보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실패의 발자국들을 따라가 보니 그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실패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의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현재 우리 눈에 비치는 바울은 위대한 능력의 사도요, 만사형통(萬事亨通)했던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갖가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3절이하에서, 그는 자기가 겪은 온갖 수고와 고난을 기록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그의 고생은 끝이 없고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바울과 우리들의 실패와 고난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 안에서 선을 이룹니다.
29-3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미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섯 동사는 과거(Greek 동사로는, a-orist: undefined tense)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이를 믿고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이미 이루어진 일과 같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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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함을 기뻐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특권입니다. 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 우리가 지불하는 고난의 삯에 비하여 말할 수없이 크고 귀한 까닭입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하는 사람들은 석사학위를 위해서 2년의 세월이 고통스럽더라도 잘 참고 견딥니다. 박사학위를 하는 사람들은 5-6년의 긴 세월을 잘 견뎌내고자 합니다. 이는 그 다음에 그들에게 주어질 특권과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영광과 특권은 세상 학문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학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세상에서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더 중요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시는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355절 3절의 가사는,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여전히 “멸시, 천대와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시고 가게 하고, 나는 세상에서 존귀와 영광과 모든 권세를 받고자” 하는 삶이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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