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27, 2013

“하나님의 자녀됨” (로마서 8:12-17)

                                          “하나님의 자녀됨” (로마서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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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로부터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기본질서와 원칙들이 마련되어졌는데, 이 원칙에 따르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한 교부들의 지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정통(orthodox) 보수주의자들이 되었고, 이들과 반하는 교회정책을 갖고 있던 주변 소아시아, 이집트, 시리아 교회들은 이단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단으로 불림을 받던 교회들에 이단적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통교회에서는 금지되고 이단이라 불려지던 교회에서는 시행하던 일들 중 요즈음은 거의 대부분의 정통교회가 “성경적”이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많음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성경의 해석은 지난 2,000년 동안 동·서양의 문화, 사상과 관습의 차이와 변화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여 왔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성경해석을 달리 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시대가 요구하는 진리가 성경이외의 것이라고 하여 “성경의 진리” 자체를 변개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혹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예: 고린도전서 11:2-6에 나오는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
아전인수적(我田引水的)인 성경해석을 하면서, 자기만이 성경말씀을 올바로 전달하는 철저한 정통보수(正統保守)이요 자기만이 바른신앙의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아집(我執)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뒤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뜻을 무너뜨려내리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바울과 같이, 자기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복(順服)시키되,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그 사람의 부족한 믿음이나 나와 다른 색깔과 생각들을 용납하는 아량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옛것을 돌아보아 좋은 것은 그대로 지켜나가되, 잘못된 것은 버리고 새로운 좋은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개인신앙도 그렇고 교회전체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개인신앙에서나 교회정책에서 좋은 습관들은 계속 잘 이어나가야 할 것이지만, 우리가 버려야 될 나쁜 습성은 빨리 버리고 우리가 아직 믿음의 사람으로서 행하지 못하고 있는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꼭 지켜나가야 할 것들은 빨리 받아들여 지켜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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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에서 “우리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바울은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 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빚을 졌습니까? 우리의 진 빚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빚이요 구원의 빚입니다. 혹은, 우리가 갖고있던 죄와 허물의 빚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으로 우리는 채권자되시는 우리의 주인 하나님 앞에 감히 서지 못하고 피해 다녔는데,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갚을 길 없는 빚을 다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을 다 탕감해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우리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도 탕감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로와진 자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은 그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은혜의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 이르게 함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고 함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안목(眼目)의 정욕(情慾)과 이 생의 자랑대로 살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告白)하고 주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였었는데, 그 약속(約束)을 저버리고 여전히 세상사람들과 다름없는 정욕과 자랑의 삶을 일삼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에게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날마다 죽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죽을 그때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며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만나는 체험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아무 일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며 그분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소망입니다. 나의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할 때 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듣거나 잘못 보아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함에서 우리는 창세기 2 장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명령이 생각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옛뱀이 유혹한다 하더라도 왜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만 먹을 뿐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까?
창세기 3장 2-3절에 이브의 말을 보면,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자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하신 말씀과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명하심이 아닙니다. 의심(疑心)과 불확실한 마음을 갖고있던 이브에게 뱀이 확신 있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뒤집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말씀하실 때, 이브는 아직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명령을 주심은 2장 16-17절인데,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이브를 만드심은 2장 21절의 사건입니다. 이브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금지의 명하심을 듣지 못하였는데도 여자를 가혹하게 벌하심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는 아담에게 그 하나님의 명령을 이브에게 가르쳐 알게 할 책임을 주셨을 것입니다.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음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하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담은 제대로 가르쳤는데 이브가 제대로 주의하여 듣지 못하여 이러한 엄청난 징벌(懲罰)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브에게 더 큰 벌이 주어진 것으로 보아 이브의 부주의함 혹은 불순종이 타락(墮落) 죄의 더 큰 원인이었던 같습니다.

이 교훈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인지 혹은 그 뜻이 제대로 해석된 뜻인지 의심스러우면 지체 없이 성경을 찾아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바로 해석하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을 변하시키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귀히 받으십니다. 말씀은 듣지만 여전히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은 잘못 듣고있는 사람들입니다.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구약시대의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졌던 바가 없는 칭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해당하는 권세입니다. 신약백성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종”이란 칭호는 받았지만 “아들”이란 칭호를 받은 바 없습니다.
마태복음 11:11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말씀하셨는데, 천국에 들어갈 지극히 작은 성도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까닭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실 때가 있지만, 포악(暴惡)한 주인으로 힘없는 종을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나무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부르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의 영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後嗣)니”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됨도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후사로서 우리에게 유업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가나안땅에서의 안식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영원한 평안의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남자와 아내의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룸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직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입니다.타락하기 전입니다.
플라톤의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어떤 영지주의에 속한 교파들은 이 구절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 아담과 이브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헬라어의 안드로-구노스(ἀνδρό-γύνος)가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 상태일 때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영어에도 androgyny (혹은 androgynous)란 단어가 있습니다. hermaphrodite란 단어는 자웅동체, 양성동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남성과 여성이 문자 그대로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타락함으로 납자와 여자가 갈려지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남자에게는 땀흘리는 수고가 더해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자가 구원받는 방법을 이들은 구원받는 남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본래 하나님의 섭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통적인 교회의 해석은 이 한 몸을 이루는 본래의 모습으로의 회복을 우리 인간의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전하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 이루는 연합(聯合)이라고 봅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와 한 몸을 이룸으로  우리의 옛모습을 회복시켜주고자 하심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영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의 영과 죽을 몸이 살게되었습니다.

결혼을 하여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혼인서약을 합니다. 혼인서약에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즐거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도 함께 나눌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이러한 서약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에만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고난에도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예수님을 위한 일은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할 것이며 예수님을 근심시켜드리는 일은 결단코 버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습 중에 예수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연령과 신앙경륜과 직분여하를 막론하고 그 잘못된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러한 영광을 받기에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도 우리가 감당하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놓인 영광이 큰 만큼 우리는 고난을 감당하되 즐거운 마음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초대교회의 순교 당하는 환난(患難)도 없고 공산치하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고통도 없습니다. 다만 평안한 가운데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정과 욕을 죽이는 것이 고난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 고난이 순교(殉敎)나 종교의 자유를 차압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고난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된 까닭이며 인간의 성정은 자기의 권한 가운데 놓인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목숨을 포기하면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주일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피아노연주 구경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전 재산을 포기하여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나의 물질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드리는 대신에 나의 사욕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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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 됨은 우리 신약백성들에게 허락되어진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입양되어진 아들로서 하나님의 독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 중에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권이 큰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된 자로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며, 영광에 참예함을 사모할 때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육신의 약함으로 인한 고난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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