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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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살다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과연 아버지가 자기를 용서해주실 지 몰라서 먼저 아버지께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불효소자 아버지께 문안인사 드립니다. ....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온데, 아버지께 불효한지라 아버지께서 안 받아 주셔도 할 수 없사오나 ... 만일 아버지께서 저를 받아주신다면, 그 증표로 집 앞에 있는 떡갈나무(Oak Tree)에 노란 리본 한 개를 매놓아 주십시오.“
이윽고 아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차에 오르고 고향을 향하여 옵니다. 기차에서 내려 그의 마을에 가까이 올수록 심장이 박동쳐 옵니다. 그의 집 앞에 있는 떡갈나무의 꼭대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과연 노란 리본을 매달아 놓으셨을까? 매달아 놓으셨다면 어디다가 매어놓으셨을까?’
골목 모퉁이를 돌면서 그의 눈에 떡갈나무 전체가 눈에 들어오자 그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리본을 한 개만 매달면, 아들이 혹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서 갈까봐 수백 개의 노란 리본을 나무 전체에 매어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어머니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방탕하다고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사랑을 쏟을 대상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는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남루한 모습으로 돌아올 때 “아직도 상거가 먼데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누가 15:20)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순종치 않고 떠나 그 마음이 이방 우상에게로 향하여 있을 때도 하나님 아버지는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로마서 10:21)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간 사랑의 극치(極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들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시되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불순종하고 불의한 삶을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골고다 십자가 언덕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의 인간사랑을 확증하심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 무슨 토를 달 여지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으로 체험하였을 때 한동안 즐겨 부르던 찬송이 404장입니다.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2.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부모 된 사람들은 자녀들을 키우면서 그들을 향한 부모로서의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쏟아 붓는 사랑은 어떤 반사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저 나의 자녀이기에, 나를 향하여 아빠, 엄마라고 부르기에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세상에 속한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측량할 수 없습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함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질문합니다.
8장 29-30절에 보는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미리 아시고, 또한 미리 아신 우리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우리를 미리 부르시고, 미리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8장 18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장차 나타날 일이라고 했는데 30절에서는 이미 되어진 일처럼 기술하고 있음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약속은 변개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31-3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부르신 자들인 우리에게 보장되어진 사랑을 네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Nobody can be against us. v. 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반문합니다.
구약의 예(例)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청종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에 서서 말씀하실 때 주변의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평지(平地)에서 싸우든지 산악(山岳)에서 싸우든지 아무도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장 되시며 깃발(=여호와 닛시) 되실 때, 우리의 외부의 적도 내부의 적도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둘째는, 아무도 우리를 송사(訟事)할 수 없습니다. (Nobody can bring any charge against us. v. 33)
혹, 우리의 적이 분수를 모르고 우리를 대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송사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연고(緣故)입니다. 우리가 비록 죽을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없어졌으므로 우리를 송사(訟事)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Nobody can condemn us. v. 34)
혹, 우리의 대적이 실수로 혹은 막무가내로 송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변론자(Advocate)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재판장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므로 사단이 아무리 우리의 죄를 정하려 하더라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재판장과 재판장 우편에 앉으시는 특권을 갖으신 변호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懇求)하시므로 대적이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넷째는,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Nobody can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v. 35)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마음 속에서 깨달아 알 때,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환난(患難)이나 곤고(困苦)나 핍박(逼迫)이나 기근(饑饉)이나 적신이나 위험(危險)이나 칼이나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사회적 곤난(困難)이나, 정치적 핍박이나, 경제적 헐벗음이나 가난이나, 군사적 위협이나 해함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오래참음으로 어둠의 권세의 대적과 송사와 정죄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하는 모든 시도에서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대적과의 싸움에서 이기되, 간신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모든 권세와 정사 위에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5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울은 39절에서는 이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며, 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에게 알게 하여주신 까닭입니다.
35절에서 세상의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군사적 어려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한 바울은 그 범위를 우주(宇宙)와 하늘의 권세(權勢)와 다음 세상에까지 확대(擴大)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견고한가 웅변적(雄辯的)으로 말합니다.
38-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死亡)이나 생명(生命)이나 천사(天使)들이나 권세자(權勢者)들이나 현재(現在) 일이나 장래(將來) 일이나 능력(能力)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선언합니다.
3
믿음으로 의로와진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일입니다. 해서, 세상의 사람들로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느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그 사랑이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얼마나 헌신하게 합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 “아멘”으로 나아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읽고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아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October 27, 2013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룸” (로마서 8:28)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룸” (로마서 8:28)
1
전도서 7장 8절에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라고 했습니다.
격언에도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라고 했고, 또 독일속담에도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다”란 말이 있습니다.
한해의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 보다는 끝을 어떻게 마감하느냐가 더욱 중요하고, 인생의 시작이나 중간이 어떠한 것보다는 끝을 어떻게 마감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 3백 명을 조사해서 분석해 본 결과, 그들 중 50%는 어려운 가정이나 문제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결국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것에 따라서 나중에는 훌륭한 삶을 살기도 하고, 좋지 않은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시작보다는 마지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결코 낙심하지 않고, 단념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랍니다.
뉴잉글랜드의 감리교단의 스테픈 올린이란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가 교회를 개척했는데, 사람들은 안 오고,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목회는 너무 힘들어서 고생 고생하다가 목회를 그만두려고 작정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목회를 못하겠으니 그만 두어야겠습니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에 그는 큰 바위 앞에 서서 곡괭이를 들고 바위를 팝니다. 아무리 곡괭이로 바위를 찍어도 바위가 깨어지지 않으니까 그는 “아무리 일해도 소용이 없잖아. 이제 더 이상 일하지 않을 테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커다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이 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일을 그만두려고 하느냐?”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곡괭이로 바위를 쳐봤자 텅텅 튀어 오르고 바위는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음성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바위가 깨어지든 안 깨어지든 네가 알 바 아니다. 너의 할 책임은 곡괭이로써 바위를 찍는 것이다. 바위가 깨어지고 안 깨어지는 것은 네가 생각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 음성에 그가 꿈에 회개하고 다시 곡괭이를 들어 힘껏 바위를 치니까 바위가 꽝 소리가 나더니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잠이 번쩍 깼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든 안 하든, 열심히 기도하고 설교 준비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심방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구나! 내 맡은 달란트 책임을 내가 충실히 다하면, 나중에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하던 일이 잘 안되면 실망하거나 환경을 탓하거나 포기해버립니다. 그것이 교회 일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우리는 그저 순종하고 충성하라고 말씀합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실 것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에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패한 것에 대하여 간접적 복수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苦難: sufferings)은 성경 전체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主題)중에 하나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고난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믿음에 연단되기를 원하시는데, 사단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그들을 유혹해서 그들을 낙심하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때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서 성도들이 가는 모든 길에서 보호해 주시고(시 91:11), 그들을 자기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십니다(신 32:10, 슥 2:8).
중요한 것은 성도들은 고난 당하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라 행동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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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우리 인간 편에서 바라봄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은 믿음의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 그 자녀의 자녀, 자녀의 자녀의 자녀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45편 20절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과 선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악인과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들의 결국이 잘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 편에서의 기술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서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됨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름을 받은 자들을 반드시 축복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서 하나님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인치신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져 주십니다.
때로 우리 앞에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을 그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성도이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요, 전에 있던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낸 바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증거하게 하기 위함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귀하신 이름을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요, 위로의 말씀이요, 사랑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일진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요셉은 아름답고 놀라운 꿈을 꾼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그의 꿈과는 동떨어지게 전개되는 것 같았습니다. 당장에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대신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구덩이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전 20개에 팔려 애굽으로 종살이를 가게 됩니다.
애굽에서는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있게 되었으나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게 되고 13년의 세월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하여 주게 되고 그 꿈의 해석이 맞아 30세에 애굽의 국무총리에 오르게 됩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그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에 형들에게 자신이 종으로 팔려갔던 그 길이 축복의 길이요, 성공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10년 후를 생각하고, 20년 후를 생각하고, 30년 후를 생각하면, 바로 지금 겪는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연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 욥이 당한 고난이 얼마나 컸습니까?
욥은 그가 고난 당하는 이유도 모르고 고난당하였습니다. 그의 전 재산이 다 날라 가고, 그의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몸에는 악창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붙잡은 끈을 놓지 아니하였을 때, 하나님은 욥을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욥기 42장 12절에서 욥은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형편에서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의 환경에서 나는 하나님께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신 자’를 종국에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의 삶은 실패의 연속(連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신앙이 경건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참으로 신실한데도 그의 형편을 보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실패의 발자국들을 따라가 보니 그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실패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의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현재 우리 눈에 비치는 바울은 위대한 능력의 사도요, 만사형통(萬事亨通)했던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갖가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3절이하에서, 그는 자기가 겪은 온갖 수고와 고난을 기록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그의 고생은 끝이 없고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바울과 우리들의 실패와 고난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 안에서 선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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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찬송가 작가 중에 하나인 화니 재인 크로스비(F. J. Crosby)가 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9천 곡의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책의 ’나의 생명 되신 주(42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434장),‘ ’오 놀라운 구세주(446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492장)‘ 등을 작시하였습니다.
화니 크로스비는 10대에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가서 주사를 잘못 맞아 장님이 되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면서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눈이 밝아서 활보하고 다니는데 나는 주를 사랑하고 믿는 사람인데 이렇게 눈이 어두워서 이제 내 인생은 망쳤으니 나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너무나 야속합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크로스비야, 네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의 눈 어두워진 것 알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눈이 어두워진 것이 너에게 큰 복이 되게 하겠다. 너는 눈이 어두웠으니 사람이 못 보는 것 영안(靈眼)으로 보게 되고 사람이 못 듣는 것 영의 귀를 열어 주어 사람이 못 깨닫는 것 영의 마음을 열어 주마. 그래서 눈뜨고 네가 일생을 산 것보다 더 영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마.”
그 말을 듣고 화니 크로스비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영감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눈뜨고는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눈뜨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바빠서 못 깨닫는 진리를 그 마음속에 깨달았습니다. 한평생에 그는 찬송가를 9천 곡이나 적고 수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나의 눈이 멀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을 믿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괴로움 때문에 나는 오히려 천상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게 되었고 성전의 기둥으로써 주님 앞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이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다시 한번 인생을 산다 해도 눈뜨고 사는 것보다도 눈을 감고 살기를 원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실명이란 고통을 불행으로만 보지 않고 그 모든 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받들어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어두움도 밝음도 성공도 실패도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불행도 삶도 죽음도 다 합동하여 아름다운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을 믿으심으로 끝까지 인내하시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시는 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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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장 8절에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라고 했습니다.
격언에도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라고 했고, 또 독일속담에도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다”란 말이 있습니다.
한해의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 보다는 끝을 어떻게 마감하느냐가 더욱 중요하고, 인생의 시작이나 중간이 어떠한 것보다는 끝을 어떻게 마감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 3백 명을 조사해서 분석해 본 결과, 그들 중 50%는 어려운 가정이나 문제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결국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것에 따라서 나중에는 훌륭한 삶을 살기도 하고, 좋지 않은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시작보다는 마지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결코 낙심하지 않고, 단념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랍니다.
뉴잉글랜드의 감리교단의 스테픈 올린이란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가 교회를 개척했는데, 사람들은 안 오고,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목회는 너무 힘들어서 고생 고생하다가 목회를 그만두려고 작정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목회를 못하겠으니 그만 두어야겠습니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에 그는 큰 바위 앞에 서서 곡괭이를 들고 바위를 팝니다. 아무리 곡괭이로 바위를 찍어도 바위가 깨어지지 않으니까 그는 “아무리 일해도 소용이 없잖아. 이제 더 이상 일하지 않을 테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커다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이 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일을 그만두려고 하느냐?”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곡괭이로 바위를 쳐봤자 텅텅 튀어 오르고 바위는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음성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바위가 깨어지든 안 깨어지든 네가 알 바 아니다. 너의 할 책임은 곡괭이로써 바위를 찍는 것이다. 바위가 깨어지고 안 깨어지는 것은 네가 생각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 음성에 그가 꿈에 회개하고 다시 곡괭이를 들어 힘껏 바위를 치니까 바위가 꽝 소리가 나더니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잠이 번쩍 깼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든 안 하든, 열심히 기도하고 설교 준비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심방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구나! 내 맡은 달란트 책임을 내가 충실히 다하면, 나중에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하던 일이 잘 안되면 실망하거나 환경을 탓하거나 포기해버립니다. 그것이 교회 일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우리는 그저 순종하고 충성하라고 말씀합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실 것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에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패한 것에 대하여 간접적 복수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苦難: sufferings)은 성경 전체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主題)중에 하나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고난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믿음에 연단되기를 원하시는데, 사단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그들을 유혹해서 그들을 낙심하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때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서 성도들이 가는 모든 길에서 보호해 주시고(시 91:11), 그들을 자기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십니다(신 32:10, 슥 2:8).
중요한 것은 성도들은 고난 당하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라 행동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2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우리 인간 편에서 바라봄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은 믿음의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 그 자녀의 자녀, 자녀의 자녀의 자녀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45편 20절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과 선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악인과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들의 결국이 잘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 편에서의 기술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서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됨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름을 받은 자들을 반드시 축복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서 하나님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인치신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져 주십니다.
때로 우리 앞에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을 그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성도이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요, 전에 있던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낸 바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증거하게 하기 위함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귀하신 이름을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요, 위로의 말씀이요, 사랑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일진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요셉은 아름답고 놀라운 꿈을 꾼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그의 꿈과는 동떨어지게 전개되는 것 같았습니다. 당장에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대신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구덩이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전 20개에 팔려 애굽으로 종살이를 가게 됩니다.
애굽에서는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있게 되었으나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게 되고 13년의 세월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하여 주게 되고 그 꿈의 해석이 맞아 30세에 애굽의 국무총리에 오르게 됩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그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에 형들에게 자신이 종으로 팔려갔던 그 길이 축복의 길이요, 성공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10년 후를 생각하고, 20년 후를 생각하고, 30년 후를 생각하면, 바로 지금 겪는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연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 욥이 당한 고난이 얼마나 컸습니까?
욥은 그가 고난 당하는 이유도 모르고 고난당하였습니다. 그의 전 재산이 다 날라 가고, 그의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몸에는 악창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붙잡은 끈을 놓지 아니하였을 때, 하나님은 욥을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욥기 42장 12절에서 욥은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형편에서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의 환경에서 나는 하나님께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신 자’를 종국에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의 삶은 실패의 연속(連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신앙이 경건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참으로 신실한데도 그의 형편을 보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실패의 발자국들을 따라가 보니 그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실패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의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현재 우리 눈에 비치는 바울은 위대한 능력의 사도요, 만사형통(萬事亨通)했던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갖가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3절이하에서, 그는 자기가 겪은 온갖 수고와 고난을 기록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그의 고생은 끝이 없고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바울과 우리들의 실패와 고난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 안에서 선을 이룹니다.
3
유명한 찬송가 작가 중에 하나인 화니 재인 크로스비(F. J. Crosby)가 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9천 곡의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책의 ’나의 생명 되신 주(42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434장),‘ ’오 놀라운 구세주(446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492장)‘ 등을 작시하였습니다.
화니 크로스비는 10대에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가서 주사를 잘못 맞아 장님이 되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면서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눈이 밝아서 활보하고 다니는데 나는 주를 사랑하고 믿는 사람인데 이렇게 눈이 어두워서 이제 내 인생은 망쳤으니 나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너무나 야속합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크로스비야, 네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의 눈 어두워진 것 알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눈이 어두워진 것이 너에게 큰 복이 되게 하겠다. 너는 눈이 어두웠으니 사람이 못 보는 것 영안(靈眼)으로 보게 되고 사람이 못 듣는 것 영의 귀를 열어 주어 사람이 못 깨닫는 것 영의 마음을 열어 주마. 그래서 눈뜨고 네가 일생을 산 것보다 더 영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마.”
그 말을 듣고 화니 크로스비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영감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눈뜨고는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눈뜨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바빠서 못 깨닫는 진리를 그 마음속에 깨달았습니다. 한평생에 그는 찬송가를 9천 곡이나 적고 수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나의 눈이 멀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을 믿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괴로움 때문에 나는 오히려 천상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게 되었고 성전의 기둥으로써 주님 앞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이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다시 한번 인생을 산다 해도 눈뜨고 사는 것보다도 눈을 감고 살기를 원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실명이란 고통을 불행으로만 보지 않고 그 모든 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받들어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어두움도 밝음도 성공도 실패도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불행도 삶도 죽음도 다 합동하여 아름다운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을 믿으심으로 끝까지 인내하시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시는 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 (로마서 8:24-25)
“보이지 않는 소망” (로마서 8:24-25)
1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그의 사람들에 대한 축복이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 세상 삶 속에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축복하시매 그의 세 아들과 그의 아내와 세 자부들이 홍수 중에 구원을 받습니다. 노아를 포함한 그의 여덟 식구가 구원받음은 그가 백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에 오래참음으로 하나님의 명하심을 지켜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40일 낮밤으로 계속된 홍수에 다 죽었지만 그와 그의 식구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지시하심만 의지하여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아직 그와 그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온전히 소유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내 사라가 죽을 때 그 땅의 한 조각 막벨라 굴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심은 그에게 많은 가축을 소유하게 함을 통하여서도 보이셨습니다.
또한 그의 소원이었던 자녀 이삭을 허락하시고,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지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를 대신한 번제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을 달라고 매달리며 밤이 맞도록 그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비록 그의 아비 이삭과 형 에서를 속임으로 그의 삼촌 라반의 집으로까지 도망하지만 그곳에서 두 아내와 두 첩을 얻게 하시고 또한 많은 가축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그에게 열두 명의 아들을 주시고 그들로 선택받은 커다란 민족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 요셉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그 과정의 삶에서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13년이 세월이 흐른 다음에 결국에 그의 꿈대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며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 다윗을 축복하시매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그의 평생에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나라를 부강하게 하시며 그의 반열에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동방 우스 땅의 의인 욥을 축복하십니다. 사단이 그를 시험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셔서 그의 소유된 가축들을 약탈당하고 대풍에 그의 일곱 아들들과 세 딸들이 죽임을 당하고 물을 빼앗기고 그의 몸에는 악창이 나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지만, 결국에 전보다 커다란 소유물을 허락하시고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허락하시므로 부와 영화를 회복하십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하는 축복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떤 모습으로 마쳤습니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역할을 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다가 결국에 헤롯에게 목 베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왕 같은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사시다가 가난한 자와 없는 자, 억눌린 자의 친구로 생을 사시다가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는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는 혹시 나중에 한 자리 할 줄 알았지만, 결국에 로마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십자가상에서 거꾸로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나오는 대로 헤롯 왕 때에 칼로 목 베임을 당하여 죽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밧모섬에 귀양보내지고 노년은 소아시아 지방에 머물면서 가난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신약성경 13권의 저자인 사도 바울은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 저명한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게 되고 소아시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로마 등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매맞고 갇힘의 연속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에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신약시대를 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부하고 평안한 삶이 아니라 가난하고 매맞고 갇히는 삶을 살다가 순교당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구약시대를 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많은 눈에 보이는 축복을 허락하시고, 신약시대를 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축복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약에는 있는데 구약에는 없는 계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내세의 영원한 삶이 계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죽으면 다 시올이라고 하는 지하세계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계시하시기 전이라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때가 찬 경륜이 이르기 전인 까닭에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시는 대신에 그를 바라보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계시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하고 풍성하신 축복이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알게 하셨기에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이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의 축복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만드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 삶에서 너무 복을 추구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며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의식주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πίστις)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며, 세상의 미혹을 뿌리치게 합니다.
사랑(ἀγάπη)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어질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두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소망(ἐλπίς)은 현재 보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고(롬 8:24-25 참고), 우리의 믿음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말씀합니다.
구원과 관련하여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표현하는데 바울은 여기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소망은 ‘믿음의 미래적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의 자리에 ‘소망’으로 바꾸어 놓아도 무방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현실일 뿐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망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에 의지하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지탱되어집니다. 믿음을, 생활가운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장식물 정도로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과 이 믿음에 의존하는 소망(所望)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참 소망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과 상통하는 크리스천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장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이란 ‘소망하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우리의 소망하는 것들, 보지 못하는 것들이 실현화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 현재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와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소망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시잠간 뿐이요 현재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나라에서의 기업입니다.
또한 그 나라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실 상급과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즉, 소망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복 받은 사람들 같지만 신약의 성도들에 비교하면 그들이 받았던 복은 그저 사소한 것일 뿐입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본 사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4-26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미래적 표현’인 소망은, 눈에 보이는 잠간이면 지나가는 현재의 세상에 속한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상과 기업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래)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소망의 인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다른 환경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는 소망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그의 사람들에 대한 축복이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 세상 삶 속에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축복하시매 그의 세 아들과 그의 아내와 세 자부들이 홍수 중에 구원을 받습니다. 노아를 포함한 그의 여덟 식구가 구원받음은 그가 백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에 오래참음으로 하나님의 명하심을 지켜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40일 낮밤으로 계속된 홍수에 다 죽었지만 그와 그의 식구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지시하심만 의지하여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아직 그와 그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온전히 소유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내 사라가 죽을 때 그 땅의 한 조각 막벨라 굴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심은 그에게 많은 가축을 소유하게 함을 통하여서도 보이셨습니다.
또한 그의 소원이었던 자녀 이삭을 허락하시고,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지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를 대신한 번제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을 달라고 매달리며 밤이 맞도록 그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비록 그의 아비 이삭과 형 에서를 속임으로 그의 삼촌 라반의 집으로까지 도망하지만 그곳에서 두 아내와 두 첩을 얻게 하시고 또한 많은 가축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그에게 열두 명의 아들을 주시고 그들로 선택받은 커다란 민족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 요셉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가 그 과정의 삶에서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13년이 세월이 흐른 다음에 결국에 그의 꿈대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며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 다윗을 축복하시매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그의 평생에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나라를 부강하게 하시며 그의 반열에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동방 우스 땅의 의인 욥을 축복하십니다. 사단이 그를 시험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셔서 그의 소유된 가축들을 약탈당하고 대풍에 그의 일곱 아들들과 세 딸들이 죽임을 당하고 물을 빼앗기고 그의 몸에는 악창이 나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지만, 결국에 전보다 커다란 소유물을 허락하시고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허락하시므로 부와 영화를 회복하십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하는 축복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떤 모습으로 마쳤습니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역할을 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다가 결국에 헤롯에게 목 베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왕 같은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사시다가 가난한 자와 없는 자, 억눌린 자의 친구로 생을 사시다가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는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는 혹시 나중에 한 자리 할 줄 알았지만, 결국에 로마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십자가상에서 거꾸로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 2절에 나오는 대로 헤롯 왕 때에 칼로 목 베임을 당하여 죽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밧모섬에 귀양보내지고 노년은 소아시아 지방에 머물면서 가난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신약성경 13권의 저자인 사도 바울은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 저명한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게 되고 소아시아,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로마 등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매맞고 갇힘의 연속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에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신약시대를 산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부하고 평안한 삶이 아니라 가난하고 매맞고 갇히는 삶을 살다가 순교당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구약시대를 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많은 눈에 보이는 축복을 허락하시고, 신약시대를 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축복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약에는 있는데 구약에는 없는 계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내세의 영원한 삶이 계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죽으면 다 시올이라고 하는 지하세계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계시하시기 전이라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때가 찬 경륜이 이르기 전인 까닭에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시는 대신에 그를 바라보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계시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하고 풍성하신 축복이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알게 하셨기에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이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의 축복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만드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 삶에서 너무 복을 추구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며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의식주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πίστις)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며, 세상의 미혹을 뿌리치게 합니다.
사랑(ἀγάπη)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어질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두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소망(ἐλπίς)은 현재 보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고(롬 8:24-25 참고), 우리의 믿음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말씀합니다.
구원과 관련하여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표현하는데 바울은 여기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소망은 ‘믿음의 미래적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의 자리에 ‘소망’으로 바꾸어 놓아도 무방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현실일 뿐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망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에 의지하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지탱되어집니다. 믿음을, 생활가운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장식물 정도로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과 이 믿음에 의존하는 소망(所望)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참 소망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과 상통하는 크리스천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장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이란 ‘소망하는 것들’이란 뜻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우리의 소망하는 것들, 보지 못하는 것들이 실현화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 현재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와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더욱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소망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시잠간 뿐이요 현재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나라에서의 기업입니다.
또한 그 나라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실 상급과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즉, 소망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복 받은 사람들 같지만 신약의 성도들에 비교하면 그들이 받았던 복은 그저 사소한 것일 뿐입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본 사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4-26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미래적 표현’인 소망은, 눈에 보이는 잠간이면 지나가는 현재의 세상에 속한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상과 기업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래)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소망의 인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다른 교우들에게도 소망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다른 환경 가운데서도 인내하는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는 소망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榮光)” (로마서 8:18-30)
“장차 나타날 영광(榮光)” (로마서 8:18-30)
1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마당을 밟고있는 주일날 두 시간이 일주일동안 그들의 믿음생활의 전부(全部)인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되 왜 교회에 다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2-13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이르시기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일 날 주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는 일주일동안 내가 살아가면서 나의 몸으로, 나의 생활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주일예배는 참 예배인 우리의 일상의 삶으로 드리는 영적예배의 준비(準備)입니다.
2
고난(苦難: sufferings)은 성경 전체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主題)중에 하나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고난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의 고난(苦難)은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犧牲)으로 그 절정(絶頂)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사람들의 고난과는 그 종류를 달리 합니다.
인간의 고난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삶 그 자체에 있는 내재적(內在的)인 문제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고난당하실 필요가 없으며 인간의 고난밖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의 영광에 이끄시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청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고난의 연속(連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가운데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는 그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장차 그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봄으로, 그는 사단과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은 장차 그들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봄으로 현재 당하는 고통가운데 인내해야 한다고 역설(力說)합니다. 이 영광(榮光)은 믿는 사람들만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영광이 나타날 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양자됨의 약속이 실현될 것인데, 이를 기다릴 때 우리 믿는 사람들, 모든 피조물, 성령이 각기 탄식함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영광나라의 시기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장차 우리에게 임할 미래의 사건이지만, 약속을 변개(變改)함이 없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미 실현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부르시고, 미리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시간적 제약 가운데 과거의 삶을 살았고,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미래를 예견하며 살아갈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시간적 제약이 없어 우리의 장래 일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종종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것을 변개함이 없는 분이신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약속한 것을 식은 죽 먹듯이 너무나 쉽게 깨뜨리면서 살아갑니다. 해서, 도무지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주님이 이런 분이라면 여러분은 그러한 주님을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현재 당하는 고난들(τά παθήματα)을 말할 때, 이 고난들속에는 모든 종류의 아픔, 환난, 역경과 고통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 파세이마(πάθημα)는 외적인 고난, 불운, 어려움, 악(惡)과, 내적으로 당하는 고통과 근심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우리의 약함, 모욕, 박해, 역경, 차별등 모든 종류의 해(害)당함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그러한 많은 어려움과 환난(患難)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고,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恩惠)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苦難)도 받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잘 감당함은 소망중에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는 쪽으로 나가는 삶이며, 이 고난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여(賦與)된 특권(特權)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지금 보기에는 매우 가혹하고 심각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경과(經過)함에 따라 지나갈 고난입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영원합니다.
이 영광은 19절에 이른대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나타남을 피조물(被造物)들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합니까?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들은 더 이상 본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의 영광스런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썩어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동물과 나무들과 풀들과 바다의 물고기들과 자연의 모든 것들이 죄아래 놓이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를 범한 까닭이 아니라 피조물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함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만물 가운데 인간을 으뜸으로 지으시고 다른 피조물을 주심은 창세기 1:28-29에 이르신 대로 인간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소유로 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해서, 인간을 위해 지어진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썩어짐의 운명(運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영광의 때를 고대함은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삶을 소유하게 될 때,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저주에서 풀려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들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땅은 사단의 세력에서 회복되어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이때, 믿는 사람들의 영광이 나타나고, “새 땅”은 구속함을 얻은 믿는 사람들의 땅이 될 것이고 피조물도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받고 자유(自由)함을 얻게 됩니다.
피조물과 함께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영광의 때가 이르기를 고대합니다.
23절에서,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했습니다. 우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축복의 보증(保證)을 갖고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탄식함으로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구속함을 받을 그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22-27절에서 바울은 삼중 탄식(歎息)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통 중에 탄식하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속으로 탄식하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탄식은 실망과 소망없는 중에 하는 한탄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의 탄식(歎息)은 그들 환경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된 이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양자됨과 몸의 구속을 소망하는 간구의 탄식입니다.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말씀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현실일 뿐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일뿐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망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에 의지하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지탱되어집니다. 믿음을, 생활가운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장식물 정도로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과 이 믿음에 의존하는 소망(所望)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참 소망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歎息)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軟弱)함으로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놓칠 수도 있는데,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소망함을 붙잡아주시므로 잘 견뎌냅니다. 모든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어달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기 위하여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무슨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를 때가 많이 잇는데 이 때 하나님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어주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우리 인간 편에서 바라봄이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 편에서의 기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우리중 어떤 사람의 삶은 실패의 연속(連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신앙이 경건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참으로 신실한데도 그의 형편을 보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실패의 발자국들을 따라가 보니 그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실패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의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현재 우리 눈에 비치는 바울은 위대한 능력의 사도요, 만사형통(萬事亨通)했던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갖가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3절이하에서, 그는 자기가 겪은 온갖 수고와 고난을 기록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그의 고생은 끝이 없고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바울과 우리들의 실패와 고난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 안에서 선을 이룹니다.
29-3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미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섯 동사는 과거(Greek 동사로는, a-orist: undefined tense)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이를 믿고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이미 이루어진 일과 같이 확실합니다.
3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함을 기뻐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특권입니다. 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 우리가 지불하는 고난의 삯에 비하여 말할 수없이 크고 귀한 까닭입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하는 사람들은 석사학위를 위해서 2년의 세월이 고통스럽더라도 잘 참고 견딥니다. 박사학위를 하는 사람들은 5-6년의 긴 세월을 잘 견뎌내고자 합니다. 이는 그 다음에 그들에게 주어질 특권과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영광과 특권은 세상 학문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학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세상에서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더 중요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시는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355절 3절의 가사는,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여전히 “멸시, 천대와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시고 가게 하고, 나는 세상에서 존귀와 영광과 모든 권세를 받고자” 하는 삶이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마당을 밟고있는 주일날 두 시간이 일주일동안 그들의 믿음생활의 전부(全部)인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되 왜 교회에 다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2-13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이르시기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일 날 주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는 일주일동안 내가 살아가면서 나의 몸으로, 나의 생활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주일예배는 참 예배인 우리의 일상의 삶으로 드리는 영적예배의 준비(準備)입니다.
2
고난(苦難: sufferings)은 성경 전체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主題)중에 하나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고난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의 고난(苦難)은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犧牲)으로 그 절정(絶頂)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사람들의 고난과는 그 종류를 달리 합니다.
인간의 고난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삶 그 자체에 있는 내재적(內在的)인 문제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고난당하실 필요가 없으며 인간의 고난밖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의 영광에 이끄시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청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고난의 연속(連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가운데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는 그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장차 그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봄으로, 그는 사단과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은 장차 그들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봄으로 현재 당하는 고통가운데 인내해야 한다고 역설(力說)합니다. 이 영광(榮光)은 믿는 사람들만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영광이 나타날 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양자됨의 약속이 실현될 것인데, 이를 기다릴 때 우리 믿는 사람들, 모든 피조물, 성령이 각기 탄식함으로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영광나라의 시기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장차 우리에게 임할 미래의 사건이지만, 약속을 변개(變改)함이 없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미 실현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부르시고, 미리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시간적 제약 가운데 과거의 삶을 살았고,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미래를 예견하며 살아갈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시간적 제약이 없어 우리의 장래 일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종종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것을 변개함이 없는 분이신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약속한 것을 식은 죽 먹듯이 너무나 쉽게 깨뜨리면서 살아갑니다. 해서, 도무지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주님이 이런 분이라면 여러분은 그러한 주님을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현재 당하는 고난들(τά παθήματα)을 말할 때, 이 고난들속에는 모든 종류의 아픔, 환난, 역경과 고통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 파세이마(πάθημα)는 외적인 고난, 불운, 어려움, 악(惡)과, 내적으로 당하는 고통과 근심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우리의 약함, 모욕, 박해, 역경, 차별등 모든 종류의 해(害)당함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그러한 많은 어려움과 환난(患難)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고,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恩惠)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苦難)도 받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잘 감당함은 소망중에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는 쪽으로 나가는 삶이며, 이 고난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여(賦與)된 특권(特權)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지금 보기에는 매우 가혹하고 심각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경과(經過)함에 따라 지나갈 고난입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영원합니다.
이 영광은 19절에 이른대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나타남을 피조물(被造物)들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합니까?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들은 더 이상 본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의 영광스런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썩어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동물과 나무들과 풀들과 바다의 물고기들과 자연의 모든 것들이 죄아래 놓이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를 범한 까닭이 아니라 피조물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함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만물 가운데 인간을 으뜸으로 지으시고 다른 피조물을 주심은 창세기 1:28-29에 이르신 대로 인간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소유로 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해서, 인간을 위해 지어진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썩어짐의 운명(運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영광의 때를 고대함은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삶을 소유하게 될 때,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저주에서 풀려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들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땅은 사단의 세력에서 회복되어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이때, 믿는 사람들의 영광이 나타나고, “새 땅”은 구속함을 얻은 믿는 사람들의 땅이 될 것이고 피조물도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받고 자유(自由)함을 얻게 됩니다.
피조물과 함께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영광의 때가 이르기를 고대합니다.
23절에서,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했습니다. 우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축복의 보증(保證)을 갖고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탄식함으로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구속함을 받을 그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22-27절에서 바울은 삼중 탄식(歎息)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통 중에 탄식하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속으로 탄식하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탄식은 실망과 소망없는 중에 하는 한탄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의 탄식(歎息)은 그들 환경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된 이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양자됨과 몸의 구속을 소망하는 간구의 탄식입니다.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말씀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현실일 뿐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일뿐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망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에 의지하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지탱되어집니다. 믿음을, 생활가운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장식물 정도로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과 이 믿음에 의존하는 소망(所望)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참 소망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歎息)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軟弱)함으로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놓칠 수도 있는데,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소망함을 붙잡아주시므로 잘 견뎌냅니다. 모든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어달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기 위하여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무슨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를 때가 많이 잇는데 이 때 하나님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어주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우리 인간 편에서 바라봄이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 편에서의 기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우리중 어떤 사람의 삶은 실패의 연속(連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신앙이 경건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참으로 신실한데도 그의 형편을 보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실패의 발자국들을 따라가 보니 그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실패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의 성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현재 우리 눈에 비치는 바울은 위대한 능력의 사도요, 만사형통(萬事亨通)했던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갖가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3절이하에서, 그는 자기가 겪은 온갖 수고와 고난을 기록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그의 고생은 끝이 없고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바울과 우리들의 실패와 고난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 안에서 선을 이룹니다.
29-3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미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섯 동사는 과거(Greek 동사로는, a-orist: undefined tense)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이를 믿고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이미 이루어진 일과 같이 확실합니다.
3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함을 기뻐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특권입니다. 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 우리가 지불하는 고난의 삯에 비하여 말할 수없이 크고 귀한 까닭입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하는 사람들은 석사학위를 위해서 2년의 세월이 고통스럽더라도 잘 참고 견딥니다. 박사학위를 하는 사람들은 5-6년의 긴 세월을 잘 견뎌내고자 합니다. 이는 그 다음에 그들에게 주어질 특권과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의 영광과 특권은 세상 학문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학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세상에서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더 중요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시는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355절 3절의 가사는,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여전히 “멸시, 천대와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시고 가게 하고, 나는 세상에서 존귀와 영광과 모든 권세를 받고자” 하는 삶이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 (로마서 8:12-17)
“하나님의 자녀됨” (로마서 8:12-17)
1
초대교회로부터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기본질서와 원칙들이 마련되어졌는데, 이 원칙에 따르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한 교부들의 지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정통(orthodox) 보수주의자들이 되었고, 이들과 반하는 교회정책을 갖고 있던 주변 소아시아, 이집트, 시리아 교회들은 이단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단으로 불림을 받던 교회들에 이단적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통교회에서는 금지되고 이단이라 불려지던 교회에서는 시행하던 일들 중 요즈음은 거의 대부분의 정통교회가 “성경적”이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많음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성경의 해석은 지난 2,000년 동안 동·서양의 문화, 사상과 관습의 차이와 변화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여 왔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성경해석을 달리 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시대가 요구하는 진리가 성경이외의 것이라고 하여 “성경의 진리” 자체를 변개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혹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예: 고린도전서 11:2-6에 나오는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
아전인수적(我田引水的)인 성경해석을 하면서, 자기만이 성경말씀을 올바로 전달하는 철저한 정통보수(正統保守)이요 자기만이 바른신앙의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아집(我執)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뒤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뜻을 무너뜨려내리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바울과 같이, 자기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복(順服)시키되,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그 사람의 부족한 믿음이나 나와 다른 색깔과 생각들을 용납하는 아량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옛것을 돌아보아 좋은 것은 그대로 지켜나가되, 잘못된 것은 버리고 새로운 좋은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개인신앙도 그렇고 교회전체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개인신앙에서나 교회정책에서 좋은 습관들은 계속 잘 이어나가야 할 것이지만, 우리가 버려야 될 나쁜 습성은 빨리 버리고 우리가 아직 믿음의 사람으로서 행하지 못하고 있는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꼭 지켜나가야 할 것들은 빨리 받아들여 지켜나갈 것입니다.
2
12절에서 “우리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바울은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 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빚을 졌습니까? 우리의 진 빚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빚이요 구원의 빚입니다. 혹은, 우리가 갖고있던 죄와 허물의 빚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으로 우리는 채권자되시는 우리의 주인 하나님 앞에 감히 서지 못하고 피해 다녔는데,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갚을 길 없는 빚을 다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을 다 탕감해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우리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도 탕감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로와진 자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은 그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은혜의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 이르게 함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고 함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안목(眼目)의 정욕(情慾)과 이 생의 자랑대로 살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告白)하고 주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였었는데, 그 약속(約束)을 저버리고 여전히 세상사람들과 다름없는 정욕과 자랑의 삶을 일삼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에게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날마다 죽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죽을 그때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며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만나는 체험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아무 일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며 그분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소망입니다. 나의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할 때 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듣거나 잘못 보아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함에서 우리는 창세기 2 장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명령이 생각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옛뱀이 유혹한다 하더라도 왜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만 먹을 뿐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까?
창세기 3장 2-3절에 이브의 말을 보면,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자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하신 말씀과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명하심이 아닙니다. 의심(疑心)과 불확실한 마음을 갖고있던 이브에게 뱀이 확신 있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뒤집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말씀하실 때, 이브는 아직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명령을 주심은 2장 16-17절인데,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이브를 만드심은 2장 21절의 사건입니다. 이브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금지의 명하심을 듣지 못하였는데도 여자를 가혹하게 벌하심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는 아담에게 그 하나님의 명령을 이브에게 가르쳐 알게 할 책임을 주셨을 것입니다.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음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하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담은 제대로 가르쳤는데 이브가 제대로 주의하여 듣지 못하여 이러한 엄청난 징벌(懲罰)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브에게 더 큰 벌이 주어진 것으로 보아 이브의 부주의함 혹은 불순종이 타락(墮落) 죄의 더 큰 원인이었던 같습니다.
이 교훈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인지 혹은 그 뜻이 제대로 해석된 뜻인지 의심스러우면 지체 없이 성경을 찾아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바로 해석하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을 변하시키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귀히 받으십니다. 말씀은 듣지만 여전히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은 잘못 듣고있는 사람들입니다.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구약시대의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졌던 바가 없는 칭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해당하는 권세입니다. 신약백성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종”이란 칭호는 받았지만 “아들”이란 칭호를 받은 바 없습니다.
마태복음 11:11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말씀하셨는데, 천국에 들어갈 지극히 작은 성도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까닭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실 때가 있지만, 포악(暴惡)한 주인으로 힘없는 종을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나무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부르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의 영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後嗣)니”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됨도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후사로서 우리에게 유업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가나안땅에서의 안식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영원한 평안의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남자와 아내의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룸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직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입니다.타락하기 전입니다.
플라톤의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어떤 영지주의에 속한 교파들은 이 구절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 아담과 이브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헬라어의 안드로-구노스(ἀνδρό-γύνος)가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 상태일 때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영어에도 androgyny (혹은 androgynous)란 단어가 있습니다. hermaphrodite란 단어는 자웅동체, 양성동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남성과 여성이 문자 그대로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타락함으로 납자와 여자가 갈려지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남자에게는 땀흘리는 수고가 더해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자가 구원받는 방법을 이들은 구원받는 남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본래 하나님의 섭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통적인 교회의 해석은 이 한 몸을 이루는 본래의 모습으로의 회복을 우리 인간의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전하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 이루는 연합(聯合)이라고 봅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와 한 몸을 이룸으로 우리의 옛모습을 회복시켜주고자 하심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영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의 영과 죽을 몸이 살게되었습니다.
결혼을 하여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혼인서약을 합니다. 혼인서약에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즐거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도 함께 나눌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이러한 서약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에만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고난에도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예수님을 위한 일은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할 것이며 예수님을 근심시켜드리는 일은 결단코 버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습 중에 예수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연령과 신앙경륜과 직분여하를 막론하고 그 잘못된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러한 영광을 받기에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도 우리가 감당하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놓인 영광이 큰 만큼 우리는 고난을 감당하되 즐거운 마음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초대교회의 순교 당하는 환난(患難)도 없고 공산치하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고통도 없습니다. 다만 평안한 가운데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정과 욕을 죽이는 것이 고난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 고난이 순교(殉敎)나 종교의 자유를 차압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고난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된 까닭이며 인간의 성정은 자기의 권한 가운데 놓인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목숨을 포기하면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주일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피아노연주 구경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전 재산을 포기하여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나의 물질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드리는 대신에 나의 사욕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 됨은 우리 신약백성들에게 허락되어진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입양되어진 아들로서 하나님의 독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 중에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권이 큰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된 자로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며, 영광에 참예함을 사모할 때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육신의 약함으로 인한 고난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초대교회로부터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기본질서와 원칙들이 마련되어졌는데, 이 원칙에 따르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한 교부들의 지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정통(orthodox) 보수주의자들이 되었고, 이들과 반하는 교회정책을 갖고 있던 주변 소아시아, 이집트, 시리아 교회들은 이단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단으로 불림을 받던 교회들에 이단적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통교회에서는 금지되고 이단이라 불려지던 교회에서는 시행하던 일들 중 요즈음은 거의 대부분의 정통교회가 “성경적”이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많음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성경의 해석은 지난 2,000년 동안 동·서양의 문화, 사상과 관습의 차이와 변화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여 왔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성경해석을 달리 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시대가 요구하는 진리가 성경이외의 것이라고 하여 “성경의 진리” 자체를 변개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혹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예: 고린도전서 11:2-6에 나오는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
아전인수적(我田引水的)인 성경해석을 하면서, 자기만이 성경말씀을 올바로 전달하는 철저한 정통보수(正統保守)이요 자기만이 바른신앙의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아집(我執)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뒤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뜻을 무너뜨려내리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바울과 같이, 자기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순복(順服)시키되,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그 사람의 부족한 믿음이나 나와 다른 색깔과 생각들을 용납하는 아량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옛것을 돌아보아 좋은 것은 그대로 지켜나가되, 잘못된 것은 버리고 새로운 좋은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개인신앙도 그렇고 교회전체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개인신앙에서나 교회정책에서 좋은 습관들은 계속 잘 이어나가야 할 것이지만, 우리가 버려야 될 나쁜 습성은 빨리 버리고 우리가 아직 믿음의 사람으로서 행하지 못하고 있는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꼭 지켜나가야 할 것들은 빨리 받아들여 지켜나갈 것입니다.
2
12절에서 “우리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바울은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 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빚을 졌습니까? 우리의 진 빚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빚이요 구원의 빚입니다. 혹은, 우리가 갖고있던 죄와 허물의 빚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으로 우리는 채권자되시는 우리의 주인 하나님 앞에 감히 서지 못하고 피해 다녔는데,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갚을 길 없는 빚을 다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을 다 탕감해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우리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도 탕감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로와진 자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은 그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은혜의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 이르게 함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고 함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안목(眼目)의 정욕(情慾)과 이 생의 자랑대로 살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告白)하고 주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였었는데, 그 약속(約束)을 저버리고 여전히 세상사람들과 다름없는 정욕과 자랑의 삶을 일삼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에게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날마다 죽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죽을 그때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며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만나는 체험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아무 일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며 그분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소망입니다. 나의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할 때 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듣거나 잘못 보아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함에서 우리는 창세기 2 장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명령이 생각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옛뱀이 유혹한다 하더라도 왜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만 먹을 뿐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까?
창세기 3장 2-3절에 이브의 말을 보면,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자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하신 말씀과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명하심이 아닙니다. 의심(疑心)과 불확실한 마음을 갖고있던 이브에게 뱀이 확신 있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뒤집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말씀하실 때, 이브는 아직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명령을 주심은 2장 16-17절인데,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이브를 만드심은 2장 21절의 사건입니다. 이브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금지의 명하심을 듣지 못하였는데도 여자를 가혹하게 벌하심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는 아담에게 그 하나님의 명령을 이브에게 가르쳐 알게 할 책임을 주셨을 것입니다.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음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하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담은 제대로 가르쳤는데 이브가 제대로 주의하여 듣지 못하여 이러한 엄청난 징벌(懲罰)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브에게 더 큰 벌이 주어진 것으로 보아 이브의 부주의함 혹은 불순종이 타락(墮落) 죄의 더 큰 원인이었던 같습니다.
이 교훈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인지 혹은 그 뜻이 제대로 해석된 뜻인지 의심스러우면 지체 없이 성경을 찾아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바로 해석하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을 변하시키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귀히 받으십니다. 말씀은 듣지만 여전히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은 잘못 듣고있는 사람들입니다.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구약시대의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졌던 바가 없는 칭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해당하는 권세입니다. 신약백성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종”이란 칭호는 받았지만 “아들”이란 칭호를 받은 바 없습니다.
마태복음 11:11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말씀하셨는데, 천국에 들어갈 지극히 작은 성도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까닭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실 때가 있지만, 포악(暴惡)한 주인으로 힘없는 종을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나무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부르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의 영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後嗣)니”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됨도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후사로서 우리에게 유업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가나안땅에서의 안식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영원한 평안의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남자와 아내의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룸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직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입니다.타락하기 전입니다.
플라톤의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어떤 영지주의에 속한 교파들은 이 구절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 아담과 이브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헬라어의 안드로-구노스(ἀνδρό-γύνος)가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 상태일 때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영어에도 androgyny (혹은 androgynous)란 단어가 있습니다. hermaphrodite란 단어는 자웅동체, 양성동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남성과 여성이 문자 그대로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타락함으로 납자와 여자가 갈려지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남자에게는 땀흘리는 수고가 더해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자가 구원받는 방법을 이들은 구원받는 남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본래 하나님의 섭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통적인 교회의 해석은 이 한 몸을 이루는 본래의 모습으로의 회복을 우리 인간의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전하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 이루는 연합(聯合)이라고 봅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와 한 몸을 이룸으로 우리의 옛모습을 회복시켜주고자 하심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영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의 영과 죽을 몸이 살게되었습니다.
결혼을 하여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혼인서약을 합니다. 혼인서약에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즐거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도 함께 나눌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이러한 서약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에만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고난에도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예수님을 위한 일은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할 것이며 예수님을 근심시켜드리는 일은 결단코 버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습 중에 예수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연령과 신앙경륜과 직분여하를 막론하고 그 잘못된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러한 영광을 받기에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도 우리가 감당하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놓인 영광이 큰 만큼 우리는 고난을 감당하되 즐거운 마음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초대교회의 순교 당하는 환난(患難)도 없고 공산치하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고통도 없습니다. 다만 평안한 가운데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정과 욕을 죽이는 것이 고난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 고난이 순교(殉敎)나 종교의 자유를 차압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고난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된 까닭이며 인간의 성정은 자기의 권한 가운데 놓인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목숨을 포기하면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주일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피아노연주 구경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전 재산을 포기하여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나의 물질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드리는 대신에 나의 사욕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 됨은 우리 신약백성들에게 허락되어진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입양되어진 아들로서 하나님의 독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 중에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권이 큰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된 자로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며, 영광에 참예함을 사모할 때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육신의 약함으로 인한 고난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 (로마서 8:12-17)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 (로마서 8:12-17)
1
육적인 부모가 어떤 사정으로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든지 또는 버려진 아이가 고아원에 자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그 고아원에서 계속 자라 세상의 풍파를 자기의 힘으로 헤쳐나가든지 아니면 어떤 재단이나 개인의 소개로 다른 집에 양자로 입양되어지기도 합니다.
고아원에서 계속 자라날 경우, 고아원 원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아이가 자라난 다음에 사회적응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고아원 원장이 참으로 고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교육에 열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아이의 사회적응 정도와 사회에서의 기반마련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일정한 연령이 되면 고아원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고 혼자 힘으로 사회를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보다 몇 배 이상 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하고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가 어떤 개인이나 재단을 통하여서 입양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어느 가정에 입양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이가 입양된 곳이 동성연애자 부부의 집이라고 한다면, 이 아이는 자라면서 심각한 부부관 또는 윤리관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보는 많은 일들이 정상적인 가정의 삶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정상적인 가정에 입양되기는 하였지만, 양부모가 아이를 홀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를 입양하는 미국사람들 중에는 자녀가 없어서 양자를 입양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아이가 있으면서도 박애정신이나 동양아이에 대한 호기심으로 입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동양아이를 입양하였는데, 그 이후에 아이가 말을 잘 안 듣는다든지 아니면 이런 저런 이유로 싫어져서 아이를 멸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젠가 동부에 살 때 유원지에 갔다가 미국인 여자가 자기 친자식인 듯 보이는 아이와 거의 같은 나이또래의 동양아이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의 아이가 그의 손을 잡고자 할 때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데 동양아이가 그의 다른 손을 잡고 가고자 하니까 그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화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아이와 입양된 아이를 동일한 사랑으로 양육하지 못할 것이면 왜 애꿎은 아이를 입양하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입양된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차별을 느끼며 자랄 것이며 이렇게 자란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살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아가 분에 넘치는 가정에 입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에 넘친다고 함은 그 양부모가 사랑이 넘치고 그 가정이 참으로 화목할 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성장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는 가정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가 입양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고, 입양되어진다고 하더라도 그저 남의 아이를 돌아보듯이, 아니면 자신의 박애정신을 스스로 충족하기 위한 양부모에 의하여 양육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아이들은 그의 친부모라 할지라도 쏟아 붓지 못하는 그러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양부모라고 할지라도 입양된 자녀에게 가장 친근한 사랑을 쏟아 붓는 부모이기에 입양된 아이가 그들을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애정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이에게 양부모는 인간으로서 그의 성공의 터전이요 그 양부모를 통하여 받은 사랑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 가운데 고아와 같이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머물고 있던 고아원은 사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이었습니다. 해서, 사랑은 물론 없고 소망도 없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가정을 동경하고 있던 우리에게 어느 날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 방문하시고 그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가신 곳이 바로 하나님이 부모 되시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가정에 양자로 편입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양부모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인가 알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되, 친자녀 이상으로 사랑을 쏟아 부으시며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게 하십니다.
그의 사랑을 경험한 믿는 자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기를 원합니다.
2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빈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바울은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빚을 졌습니까? 우리의 진 빚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빚이요 구원의 빚입니다. 혹은, 우리가 갖고있던 죄와 허물의 빚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으로 우리는 채권자 되시는 우리의 주인 하나님 앞에 감히 서지 못하고 피해 다녔는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갚을 길 없는 빚을 다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의 빚을 다 탕감해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도 탕감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로와진 자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은 그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은혜의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 이르게 함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고 함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연인의 모습입니다. 안목(眼目)의 정욕(情慾)과 이생의 자랑을 가지고 살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告白)하고 주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였었는데, 그 약속(約束)을 저버리고 여전히 세상사람들과 다름없는 정욕과 자랑의 삶을 일삼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입니다.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에게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날마다 죽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자아가 죽는 그때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며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만나는 체험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아무 일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며 그분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소망입니다. 나의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할 때 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듣거나 잘못 보아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함에서 우리는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명령이 생각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반드시) 죽으리라.”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옛 뱀이 유혹한다 하더라도 왜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만 먹을 뿐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까?
창세기 3장 2-3절에 이브의 말을 보면,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자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하신 말씀과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명하심이 아닙니다. 의심(疑心)과 불확실한 마음을 갖고있던 이브에게 뱀이 확신 있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뒤집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구약시대의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졌던 바가 없는 칭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해당하는 권세입니다. 신약백성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종”이란 칭호는 받았지만 “아들”이란 칭호를 받은 바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천국에 들어갈 지극히 작은 성도라도 세례 요한보다 큰 까닭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Abba Father)라고 부르짖느니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실 때가 있지만, 포악(暴惡)한 주인으로 힘없는 종을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나무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부르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로마라고 하는 강성한 제국이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많은 종들을 거느리며 생활했는데, 그 주인이 자식이 없거나 종들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자나 충직한 자가 있을 때 그를 자기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종이었다가 양자가 되는 사람은 현격한 신분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찰톤 헤스톤이 주연한 ‘벤허’라는 영화에서도 유대인인 벤허는 친구의 모략으로 로마 군함의 배 밑창에서 노예로 전락하지만 전쟁 중에 죽게 된 로마의 장군을 구하고 그의 양자로 편입되매 그의 신분은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지위가 됩니다.
우리가 전에는 소망도 없던 고아와도 같은 자이요 사단의 종노릇하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로 편입됨으로 인하여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바”는 아람어로 한국어의 “아빠”와 동일한 의미로서 아버지를 향하여 최상의 친근감으로 부르는 호칭입니다.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의 영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고 말씀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것이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後嗣)니”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됨도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후사로서 우리에게 유업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가나안땅에서의 안식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영원한 평안의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결혼을 하여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혼인서약을 합니다. 혼인서약에서 우리는 남편과 아내의 즐거움과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도 함께 나눌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이러한 서약을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에만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고난에도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예수님을 위한 일은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할 것이며 예수님을 근심시켜드리는 일은 결단코 버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습 중에 예수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연령과 신앙경륜과 직분여하를 막론하고 그 잘못된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러한 영광을 받기에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도 우리가 감당하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놓인 영광이 큰 만큼 우리는 고난을 감당하되 즐거운 마음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초대교회의 순교 당하는 환난(患難)도 없고 공산치하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고통도 없습니다. 다만 평안한 가운데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정과 욕을 죽이는 것이 고난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이 고난이 순교(殉敎)나 종교의 자유를 차압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고난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된 까닭이며 인간의 성정은 자기의 권한 가운데 놓인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목숨을 포기하면서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주일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피아노연주 구경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전 재산을 포기하여 믿음을 지킬 수 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때 나는 나의 물질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드리는 대신에 나의 사욕을 위하여 사용함으로써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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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 됨은 우리 신약백성들에게 허락되어진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입양되어진 아들로서 하나님의 독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 중에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권이 큰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된 자로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며, 영광에 참예함을 사모할 때 현재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육신의 약함으로 인한 고난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Sunday, October 20, 2013
“성령(聖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로마서 8:1-11)
“성령(聖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로마서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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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홉(Anton Chekhov, 1860-1904)의 “귀여운 여인”이란 작품에 올렝카라고 하는 여인이 등장(登場)합니다. 그가 연극 극장을 경영하는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그의 말하는 것이 온통 연극에 관한 것이 됩니다. 연극을 보는 것이 왜 우리 인생에 유익이 되는가? 연극공연을 하는 사람의 의미등등 이 남편도 올렝카를 통하여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죽고 맙니다. 곧이어 올렝카는 목재상을 경영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 귀여운 여인 올렝카는 나무에 대해서 생각하고 목재의 예찬론자가 됩니다. 나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또 동네사람들과 대화할라치면 목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그도 죽고 이제는 주둔 군대의 수의장교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또 동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크리스찬으로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와 짝하여 사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됩니다. 세상과 짝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처럼 이야기하게 됩니다.
성령님과 짝하는 사람은 성령님의 눈과 귀와 입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성령님의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갓결혼한 남자와 여자는 별로 닮은 점이 없는데 이들이 오랫동안 같이 살게 되면 서로 닮아 갑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 같아집니다. 남편이 김집사님을 미워하면 부인도 김집사님이 싫어집니다. 부인이 이장로님을 좋아하면 남편도 이장로님이 좋게 여겨집니다. 부부의 금실이 좋으면 전혀 달랐던 얼굴생김이었는데 생김새도 비슷해짐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닫혔던 마음 문을 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경배드리는 일에 관심을 갖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셨는데,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란 말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께서”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은 바로 “성령”이고, 해서, “성령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에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세상사람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교회에 분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주니께로 나오게 한 분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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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은 로마서 전체의 클라이막스(Climax)요 기쁨의 장입니다.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 때, 나는 죄인이요 죽을 목숨이더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내가 의로와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을 사는데도 한가지 나를 괴롭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고통이 있습니다, 괴로움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고자 하는데 왜 여전히 죄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허물을 범하고 살아갑니까?” 이때 그리스도의 영께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합니다: “네가 죄와 허물을 범하고 있지만, 너는 죄에게 종노릇하여 죽음에 이를 것이 아니라, 너의 육체는 죄아래 놓여있지만 너의 영혼은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의 종이기 때문에 사망이 너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25절에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죄의 법을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울이 8장에서 말하고자 함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을 위하여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죄아래 놓여 죄짓는 것으로 고통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더 많이 더 깊이 체험함으로서 죄를 이겨가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되 우리의 관심이 여전히 세상 것이요 교회내에 여전히 분쟁이 있다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교회까지 오게는 하셨지만,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보다는 성령을 방해하는 인간의 역사가 더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죄를 정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벌에 이르는 심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를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보는 바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종노릇할 것이 아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죄있는 인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에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일 때, 우리는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6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지만, 우리의 자아와 탐심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지 못할 때,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좇아 여전히 사망에 거하는 자요,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아뢰고 성령께 전심으로 의지할 때, 성령은 우리의 연약한 가운데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
9-11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믿는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靈) 안에 있는” 이란 의미이며, 곧 "성령 안에 있는”의 뜻입니다.
9절에는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으로 삼위를 총칭하여 하나님이라 불렀고, “하나님의 영” 또한 “성령”입니다.
또 9절 후반에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했는데, 이것 역시 성령의 다른 표현입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이 또한 성령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아버지의 영,“ ”하나님의 영“이 다같이 성령인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다같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리 닮았다고 하더라도 두 개의 별다른 개체(個體)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영을 갖고, 아들은 아들의 영을 갖는 것이지, 아버지의 영혼이 아들에게 전가(transmigration)되지 않습니다. 아들의 고통을 아버지가 이해하지만 그 고통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별다른 두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은 곧 아들의 영입니다.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과 성령이 모두 같은 하나님의 영--하나의 영입니다. 해서, 아들의 영혼이 번민할 때, 아버지의 영혼에 번민함이 있습니다.
9절에 “하나님의 영--곧, 성령이 너희 속에 거하시면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고 했습니다. 해서, 우리는 사망의 생각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의 생각을 갖습니다.
10절에 “그리스도께서--곧,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바깥사람--몸은 육신의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영은 의를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산다”고 말씀합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아버지의 영--곧,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영이 사는 것만을 언급(言及)했는데, 11절에서는 10절에서 육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몸이 마지막 때에 부활되어 살 것을 말씀합니다.
앞으로 수십년 내에 공상소설이나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복제인간(cloning)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작은 물체나 동물의 복제는 이미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복제인간이 만들어지는 때가 온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복제인간의 제조가 인류의 산업이나 의학에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인력이 부족한 나라에 복제인간을 적당히 만들어냄으로 생산공정을 도울 수 있고, 불의의 사고로 팔·다리를 잃는 사람은 헌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의 옷으로 말짱하게 살 수 있고...... 그러나, 그것이 창조주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건일까요?
구약의 바벨탑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멸망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물에 잠기지 않을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음으로서 흩어짐을 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면만을 고려할 때 이는 재난 다음에 더 큰 재난을 면하고자 하는 준비성이 있는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무너뜨리신 것은 이들 인간의 준비 가운데 하나님께 의지하는 대신에 자기들을 의지하는 불신앙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들은 물로 인한 멸망을 막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복제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봄에서 떠나 인간의 과학과 지식에 의존하고자 함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대항함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소망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바 된 썩어질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교만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해산의 고통과 함께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순리일진데 복제인간의 제조는 이러한 순리를 거스리는 역리일 것입니다.
더더욱 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현대과학은 사람의 겉 모습은 복제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그가 지으신 인간 중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성령은 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personality)과 의지(will)를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닌 인간의 창작물--복제인간 속에 거하려 하시겠습니까?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복제인간은 활동한다 하더라도 죽은 자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믿지않는 사람들도 말하자면 복제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다고 말하지만 죽은 자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복제인간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인데, 인간의 창작물--영혼(soul)이 없는 복제인간에게는 심판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여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을 복제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믿는 사람의 원본(original)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믿는 사람의 복제품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거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message)로 볼 때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성령이 없는 복제품의 생각은 아마도 지극히 기계적이고 계산적일 것이며 그들은 이 세상의 임금--사단에 의해서 지배되어질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세상이 온다면 인류는 사단의 수중에 빠지게 될 것이며, 얼마 있지않아 노아 때와 같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일시적 심판을 가하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최종적인 심판을 가하실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경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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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자유자가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영의 생각인 생명과 평안을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의로 인하여 영의 살림을 받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영의 살림 뿐만아니라, 장차 우리의 죽을 몸도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대로 썩지 않을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됨을 받습니다.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인도함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바라기는, 성령이 우리 각 사람안에서 주인으로서 거하시고, 동행하시고, 역사하시는 각 사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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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홉(Anton Chekhov, 1860-1904)의 “귀여운 여인”이란 작품에 올렝카라고 하는 여인이 등장(登場)합니다. 그가 연극 극장을 경영하는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그의 말하는 것이 온통 연극에 관한 것이 됩니다. 연극을 보는 것이 왜 우리 인생에 유익이 되는가? 연극공연을 하는 사람의 의미등등 이 남편도 올렝카를 통하여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죽고 맙니다. 곧이어 올렝카는 목재상을 경영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 귀여운 여인 올렝카는 나무에 대해서 생각하고 목재의 예찬론자가 됩니다. 나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또 동네사람들과 대화할라치면 목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그도 죽고 이제는 주둔 군대의 수의장교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또 동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크리스찬으로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와 짝하여 사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됩니다. 세상과 짝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처럼 이야기하게 됩니다.
성령님과 짝하는 사람은 성령님의 눈과 귀와 입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성령님의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갓결혼한 남자와 여자는 별로 닮은 점이 없는데 이들이 오랫동안 같이 살게 되면 서로 닮아 갑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 같아집니다. 남편이 김집사님을 미워하면 부인도 김집사님이 싫어집니다. 부인이 이장로님을 좋아하면 남편도 이장로님이 좋게 여겨집니다. 부부의 금실이 좋으면 전혀 달랐던 얼굴생김이었는데 생김새도 비슷해짐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닫혔던 마음 문을 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경배드리는 일에 관심을 갖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셨는데,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란 말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께서”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은 바로 “성령”이고, 해서, “성령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에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세상사람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교회에 분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주니께로 나오게 한 분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란 말씀입니다.
2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전체의 클라이막스(Climax)요 기쁨의 장입니다.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 때, 나는 죄인이요 죽을 목숨이더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내가 의로와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을 사는데도 한가지 나를 괴롭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고통이 있습니다, 괴로움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고자 하는데 왜 여전히 죄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허물을 범하고 살아갑니까?” 이때 그리스도의 영께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합니다: “네가 죄와 허물을 범하고 있지만, 너는 죄에게 종노릇하여 죽음에 이를 것이 아니라, 너의 육체는 죄아래 놓여있지만 너의 영혼은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의 종이기 때문에 사망이 너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25절에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죄의 법을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울이 8장에서 말하고자 함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을 위하여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죄아래 놓여 죄짓는 것으로 고통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더 많이 더 깊이 체험함으로서 죄를 이겨가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되 우리의 관심이 여전히 세상 것이요 교회내에 여전히 분쟁이 있다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교회까지 오게는 하셨지만,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보다는 성령을 방해하는 인간의 역사가 더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죄를 정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벌에 이르는 심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를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보는 바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종노릇할 것이 아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죄있는 인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에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일 때, 우리는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6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지만, 우리의 자아와 탐심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지 못할 때,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좇아 여전히 사망에 거하는 자요,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아뢰고 성령께 전심으로 의지할 때, 성령은 우리의 연약한 가운데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
9-11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靈)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믿는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靈) 안에 있는” 이란 의미이며, 곧 "성령 안에 있는”의 뜻입니다.
9절에는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으로 삼위를 총칭하여 하나님이라 불렀고, “하나님의 영” 또한 “성령”입니다.
또 9절 후반에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했는데, 이것 역시 성령의 다른 표현입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이 또한 성령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아버지의 영,“ ”하나님의 영“이 다같이 성령인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다같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리 닮았다고 하더라도 두 개의 별다른 개체(個體)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영을 갖고, 아들은 아들의 영을 갖는 것이지, 아버지의 영혼이 아들에게 전가(transmigration)되지 않습니다. 아들의 고통을 아버지가 이해하지만 그 고통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별다른 두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은 곧 아들의 영입니다.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과 성령이 모두 같은 하나님의 영--하나의 영입니다. 해서, 아들의 영혼이 번민할 때, 아버지의 영혼에 번민함이 있습니다.
9절에 “하나님의 영--곧, 성령이 너희 속에 거하시면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고 했습니다. 해서, 우리는 사망의 생각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의 생각을 갖습니다.
10절에 “그리스도께서--곧,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바깥사람--몸은 육신의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영은 의를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산다”고 말씀합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아버지의 영--곧,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영이 사는 것만을 언급(言及)했는데, 11절에서는 10절에서 육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몸이 마지막 때에 부활되어 살 것을 말씀합니다.
앞으로 수십년 내에 공상소설이나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복제인간(cloning)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작은 물체나 동물의 복제는 이미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복제인간이 만들어지는 때가 온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복제인간의 제조가 인류의 산업이나 의학에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인력이 부족한 나라에 복제인간을 적당히 만들어냄으로 생산공정을 도울 수 있고, 불의의 사고로 팔·다리를 잃는 사람은 헌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의 옷으로 말짱하게 살 수 있고...... 그러나, 그것이 창조주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건일까요?
구약의 바벨탑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멸망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물에 잠기지 않을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음으로서 흩어짐을 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면만을 고려할 때 이는 재난 다음에 더 큰 재난을 면하고자 하는 준비성이 있는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무너뜨리신 것은 이들 인간의 준비 가운데 하나님께 의지하는 대신에 자기들을 의지하는 불신앙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들은 물로 인한 멸망을 막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복제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봄에서 떠나 인간의 과학과 지식에 의존하고자 함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대항함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소망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바 된 썩어질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교만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해산의 고통과 함께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순리일진데 복제인간의 제조는 이러한 순리를 거스리는 역리일 것입니다.
더더욱 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현대과학은 사람의 겉 모습은 복제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그가 지으신 인간 중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성령은 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personality)과 의지(will)를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닌 인간의 창작물--복제인간 속에 거하려 하시겠습니까?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복제인간은 활동한다 하더라도 죽은 자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믿지않는 사람들도 말하자면 복제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다고 말하지만 죽은 자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복제인간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인데, 인간의 창작물--영혼(soul)이 없는 복제인간에게는 심판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여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을 복제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믿는 사람의 원본(original)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믿는 사람의 복제품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거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message)로 볼 때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성령이 없는 복제품의 생각은 아마도 지극히 기계적이고 계산적일 것이며 그들은 이 세상의 임금--사단에 의해서 지배되어질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세상이 온다면 인류는 사단의 수중에 빠지게 될 것이며, 얼마 있지않아 노아 때와 같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일시적 심판을 가하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최종적인 심판을 가하실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경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자유자가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영의 생각인 생명과 평안을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의로 인하여 영의 살림을 받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영의 살림 뿐만아니라, 장차 우리의 죽을 몸도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대로 썩지 않을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됨을 받습니다.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인도함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바라기는, 성령이 우리 각 사람안에서 주인으로서 거하시고, 동행하시고, 역사하시는 각 사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죄(罪)의 법과 하나님의 법” (로마서 7:14-25)
“죄(罪)의 법과 하나님의 법” (로마서 7:14-25)
1
우찌무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토라--하나님의 율법(律法)대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의로와져 보려고 했습니다. 사무라이 정신(精神)을 발휘하여 당당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천국에 이르러 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 이것을 실천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과 언어와 행동을 조심하면 할수록 자기는 더욱 더 찢어지는 인간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도덕적인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나의 의사며,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의는 당신이시고 나는 당신 때문에 선함을 입었습니다. 아무 공로없이 주님의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절규하며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진정과 기쁨과 평안이 깃들었고 새로운 생명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통상적으로 율법은 ‘토라’라고도 하는 모세 5경의 계명입니다. 좁은 의미로서는 십계명을 가리키고 넓게는 구약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에게도 율법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전체가 우리의 율법책입니다. 율법이란 말이 유대주의적 냄새가 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이제까지의 로마서를 통해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것은 단 하나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지표요 등불입니다. 왜 신약성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여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의 모양으로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본체이신 그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 사랑함을 보이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샘솟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자발적으로 원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킴은 우리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너무나 불가능함을 느끼게 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느끼는 단계(段階)가 있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한 사람은 그 학문의 끝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시작을 하면 그 내용을 조금은 알 것 같고, 얼마쯤 하면 그 내용이 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이젠 반대로 학문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는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네 번, 다섯 번 읽은 후에는 마치 성경의 내용을 꽤뚫어 아는 척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열 번 스무 번 읽고 본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게 되면 이제는 성경을 다 안다, 성경 내용이 쉽다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 앞에 자신의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가 고백하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미천함을 고백할 뿐 아니라 그 말쑴울 지킴은 더더욱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로다” 고백함은 그의 죄가 다른 사람 보다 더 큰 까닭이 아니요, 그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한 까닭에, 말씀의 거울 앞에 남들보다 많이 다가선 까닭에, 다른 사람들보다 인간의 부족함을 더 많이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바 하나님의 법대로, 선과 의의 법대로 살지 못하고, 원치 않는 바 사단의 법대로 악과 죄의 법대로 살고있음을 고백하며 탄식합니다. 기독교 초기 초대교부들은 대체로 이 7장 후반부의 바울의 모습을 그가 아직 구원 받기전의 모습을 회상하며 기술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만 요즘은 소수의 성경학자들만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후로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온전함을 향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구원받은 바울의 고백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우리의 전신과 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은 100미터 전방에서는 자신의 흠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10미터, 5미터, 1미터, 거울 바로 앞에 이름에 따라서 자신의 결점과 부족을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결함이 많은 사람인가를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러한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은 모든 것이 바른 줄 압니다. 단지 말씀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만이 더욱 더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게되고 해서 이러한 못생긴 나를 사랑하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유대인에게 통상적으로 율법은 ‘토라’라고도 하는 모세 5경의 계명입니다. 좁은 의미로서는 십계명을 가리키고 넓게는 구약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천에게도 율법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전체가 우리의 율법책입니다. 율법이란 말이 유대주의적 냄새가 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이제까지의 로마서를 통해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것은 단 하나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지표요 등불입니다. 왜 신약성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여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의 모양으로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본체이신 그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 사랑함을 보이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샘솟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자발적으로 원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킴은 우리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너무나 불가능함을 느끼게 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느끼는 단계(段階)가 있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한 사람은 그 학문의 끝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시작을 하면 그 내용을 조금은 알 것 같고, 얼마쯤 하면 그 내용이 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이젠 반대로 학문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는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네 번, 다섯 번 읽은 후에는 마치 성경의 내용을 꽤뚫어 아는 척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열 번 스무 번 읽고 본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게 되면 이제는 성경을 다 안다, 성경 내용이 쉽다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 앞에 자신의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가 고백하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미천함을 고백할 뿐 아니라 그 말쑴울 지킴은 더더욱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로다” 고백함은 그의 죄가 다른 사람 보다 더 큰 까닭이 아니요, 그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한 까닭에, 말씀의 거울 앞에 남들보다 많이 다가선 까닭에, 다른 사람들보다 인간의 부족함을 더 많이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바 하나님의 법대로, 선과 의의 법대로 살지 못하고, 원치 않는 바 사단의 법대로 악과 죄의 법대로 살고있음을 고백하며 탄식합니다. 기독교 초기 초대교부들은 대체로 이 7장 후반부의 바울의 모습을 그가 아직 구원 받기전의 모습을 회상하며 기술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만 요즘은 소수의 성경학자들만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후로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온전함을 향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구원받은 바울의 고백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우리의 전신과 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은 100미터 전방에서는 자신의 흠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10미터, 5미터, 1미터, 거울 바로 앞에 이름에 따라서 자신의 결점과 부족을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결함이 많은 사람인가를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러한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은 모든 것이 바른 줄 압니다. 단지 말씀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만이 더욱 더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게되고 해서 이러한 못생긴 나를 사랑하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2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문제는 내 속에 나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자 원하는 마음 말고 이를 방해하는 사단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나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함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실제로의 나의 행동은 그와는 거리가 멉니다.
연애를 해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나의 행동이 나의 마음의 원함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면 이러 이러한 말을 해야지 잘 준비하고 연습도 해봅니다. 그러나 막상 만나서 그를 대할 때면 내가 준비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여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대신에 그를 화나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 속에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텐데 하면서도 표현은 마음의 원함과는 계속 반대로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는 그 사람을 죽도록 좋아하면서도 “갑돌이와 갑순이”의 가사처럼 ‘제까짓것’ 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여 관계가 소원해질 때가 있습니다.
연애를 할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마음에 원함대로 잘 표현하지 못한 것같이, 하나님을 사랑함에도 나의 사랑하는 마음과 원함을 잘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의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난 표현이 달랐다고 해서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화가 나거나 실망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궂이 잘 보일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든--기뻐하든지 화내든지--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의 원함과는 달리 표현된 행동에 그만큼 더 실망하고 화가 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해서, 나의 원함과 달리 행동했을 때 나의 행동에 대해 실망하고 화나기까지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실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람직한 실망입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망으로 인해,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해야지” 결단하고 나의 행동을 고쳐 나간다면, 우리는 이러한 자기 반성과 결단과 고침으로서 성화되어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의 잘못된 행동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의 행동에 실망이 크면 클수록 내가 그만큼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원하는 대로 기쁨을 주지 못함은 나의 마음 얕은 곳에 그를 화나게 함으로 쾌락을 즐기는 삐뚤어진 본성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절에, “내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함 이후로 사단이 인간의 마음 얕은 곳--바울은 이를 지체라고 표현--에 삐뚤어진 심성을 심어놨습니다. 남이 기뻐함을 보고 함께 즐거워하는 선한 심성과 함께, 남의 고통함을 보고 즐거워하는 악한 심성이 병존합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그러한 마음이 있음을 아십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경가운데 불구경, 싸움구경과 사고구경이 있습니다.
건물이 불로 인하여 무너져 내리는 것과 불에 휩싸인 사람들이 안타까와 하는 것, 사람들이 서로 치고 박아 피투성이가 되는 것, 차들끼리 충돌하여 사고를 당하는 것--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짜릿한 쾌감을 느낍니다. 안타까와함은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모습이요, 남의 불행에 쾌감을 느끼는 것은 사단이 몰래 우리 인간에게 심어준 모습입니다.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했습니다. ‘한 다른 법’이라고 함은 악의 법 (사단의 법)이고, ‘내 마음의 법’이란 선의 법 (하나님의 법)인데, 세상을 지배하는 죄(사단)의 법이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를 그 아래로 잡아온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약한 의지로는 이 권세를 이길 수 없어서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우리의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게 합니다. 해서, 바울은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의 법 아래 놓인)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우리가 탄식만하고 좌절하고 실망가운데 몸부림치고만 있지않아도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약한 의지로는 고칠 수 없는 이것--곧, 내가 원함은 하지않고 원치 않는 그것을 함--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도우실 때 능히 고칠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는 바대로 바울이 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선한 싸움(struggle) 가운데 깨달은 것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마음에서 섬기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서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연애를 해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나의 행동이 나의 마음의 원함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면 이러 이러한 말을 해야지 잘 준비하고 연습도 해봅니다. 그러나 막상 만나서 그를 대할 때면 내가 준비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여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대신에 그를 화나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 속에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할텐데 하면서도 표현은 마음의 원함과는 계속 반대로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는 그 사람을 죽도록 좋아하면서도 “갑돌이와 갑순이”의 가사처럼 ‘제까짓것’ 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여 관계가 소원해질 때가 있습니다.
연애를 할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마음에 원함대로 잘 표현하지 못한 것같이, 하나님을 사랑함에도 나의 사랑하는 마음과 원함을 잘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의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난 표현이 달랐다고 해서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화가 나거나 실망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궂이 잘 보일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든--기뻐하든지 화내든지--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의 원함과는 달리 표현된 행동에 그만큼 더 실망하고 화가 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해서, 나의 원함과 달리 행동했을 때 나의 행동에 대해 실망하고 화나기까지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실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람직한 실망입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망으로 인해,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해야지” 결단하고 나의 행동을 고쳐 나간다면, 우리는 이러한 자기 반성과 결단과 고침으로서 성화되어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의 잘못된 행동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의 행동에 실망이 크면 클수록 내가 그만큼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원하는 대로 기쁨을 주지 못함은 나의 마음 얕은 곳에 그를 화나게 함으로 쾌락을 즐기는 삐뚤어진 본성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절에, “내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함 이후로 사단이 인간의 마음 얕은 곳--바울은 이를 지체라고 표현--에 삐뚤어진 심성을 심어놨습니다. 남이 기뻐함을 보고 함께 즐거워하는 선한 심성과 함께, 남의 고통함을 보고 즐거워하는 악한 심성이 병존합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그러한 마음이 있음을 아십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경가운데 불구경, 싸움구경과 사고구경이 있습니다.
건물이 불로 인하여 무너져 내리는 것과 불에 휩싸인 사람들이 안타까와 하는 것, 사람들이 서로 치고 박아 피투성이가 되는 것, 차들끼리 충돌하여 사고를 당하는 것--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짜릿한 쾌감을 느낍니다. 안타까와함은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모습이요, 남의 불행에 쾌감을 느끼는 것은 사단이 몰래 우리 인간에게 심어준 모습입니다.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했습니다. ‘한 다른 법’이라고 함은 악의 법 (사단의 법)이고, ‘내 마음의 법’이란 선의 법 (하나님의 법)인데, 세상을 지배하는 죄(사단)의 법이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를 그 아래로 잡아온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약한 의지로는 이 권세를 이길 수 없어서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우리의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게 합니다. 해서, 바울은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의 법 아래 놓인)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우리가 탄식만하고 좌절하고 실망가운데 몸부림치고만 있지않아도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약한 의지로는 고칠 수 없는 이것--곧, 내가 원함은 하지않고 원치 않는 그것을 함--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도우실 때 능히 고칠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는 바대로 바울이 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선한 싸움(struggle) 가운데 깨달은 것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마음에서 섬기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서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3
설혹, 우리가 온전히 육신으로는 마음에서 원하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는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부족을 당연시(當然視) 여기거나 변명꺼리로 삼지않고, 우리의 부족함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 살되,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부족을 당연시(當然視) 여기거나 변명꺼리로 삼지않고, 우리의 부족함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 살되,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律法)과 죄(罪)” (로마서 7:1-13)
“율법(律法)과 죄(罪)” (로마서 7:1-13)
1
조선(朝鮮)조 중기에 상진이라고 하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농촌 길을 가노라니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농부가 있길래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는지 물어봅니다: “여보시게, 검은 소와 누렁 소중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나?” 농부는 밭가는 그곳에서도 대답할 수 있을 터인데 궂이 밭둑길까지 나와서 그냥 말해도 될터인데 그 선비의 귀를 빌어서 귀에다 대고 일러줍니다. 상진이 농부에게 왜 그냥 말하지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농부는 또 가만히 대답합니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칭찬받는 소는 좋겠지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좋겠느냐?” 말합니다. 농부의 말을 듣고 상진은 평생에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사물과 환경을 긍정적으로 보며 생을 보내면서 영의정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무심코 범하는 잘못으로 인하여 자녀들이 삐뚤게 나갈 수 있습니다. 형제와 비교하여 칭찬을 듣는 자녀는 교만하여질 수 있고, 다른 형제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자녀는 열등감으로 어둡게 자라거나 사람을 미워하는 바음이 그 가운데 자라납니다.
부모의 비교의 소리를 듣고 자란 그들이 그 자녀들에게 또 상처를 주는 말을 합니다.
부모의 말 실수는 또 자녀들이 듣는 데서 이웃 사람이나 교회 사람들을 흉보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이러한 말을 들을 때 부모가 흉보는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나 장로님, 혹은 목사님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 자녀가 좀 더 자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흉보는 부모님의 신앙이 별 볼 일 없이 보여서 교회생활에 염증(厭症)을 느끼고 등한시(等閑視)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2
5장에서 의로와짐의 결과와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음을 설명하고,
6장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성화의 삶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시고 죽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신령하게 부활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서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의의 병기로 드려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라--설명한 바울은 7장에서 그러한 우리를 방해해온 그리고 여전히 방해하고 있는 죄와 율법의 문제를 다룹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기 전--아직 그리스도밖에 있던 이방인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 사람은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그 사람은 그것이 죄인줄 모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은 사람의 잘못은 죄와 율법을 자기 나름대로는 안다고 하는데, 제대로 이해(理解)한 것이 아니라 오해(誤解)하여 믿음이 자라지 않고 성화(聖化)되어지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해서 영적으로 단단한 음식을 씹어 먹지 못하고, 늘 젖이나 빠는 간난아기의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함에 결혼한 여자의 남편과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고 재미있기 위해서는 남편이 사랑스럽고 남편을 위해서 자꾸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남편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고 남편이 무섭고 엄하게만 느껴지고 남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소박맞지 않으려는 의무감에서만 나온 일이라면 그 일은 아내로서의 일이지만 부담스럽고 굴레에 묶인, 해서 일생이 고통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자유를 갈구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사람도 있지만 인간은 그를 조이고 동여매고있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습니다. 스티브 멕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빠삐욘(Papillon; 나비)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의 자유를 향한 탈출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붙잡히면 또 탈출을 시도하고 끊임없는 자유에 대한 도전(挑戰)입니다.
이조시대 양반들의 귀향지에서의 삶은 비교적 자유가 많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귀향에서 빨리 풀리기를 원함은 물론 복권(復權)을 바라는 마음에서이겠지만 또 다른 것으로서는 자유한 것 같지만 보이지 않게 그들을 붙잡고 있는 끈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은 마음에서 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가고,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함이 나에게 있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놓이게 된다고 하여 그 율법을 지키려 할 때 하나님의 율법은 나에게 큰 부담이요 속박입니다. 이 율법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까지도 나에게는 무서운 남편이요 그 분이 명한 율법을 지키지만 내게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이 무서운 남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늘 내 마음 속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남편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고 세상의 남자를 만나 그와 짝할 때, 나에게 엄하고 무서운 율법과 동일하게 보이는 그 하나님께서 나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아 그러지도 못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함이 없기 때문에 율법의 시킴대로 사는 나의 삶은 평안 대신 고통입니다.
많은 옛 여인들과 우리의 할머니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행복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상전인 남편의 몸종과도 같은 삶을 살면서 이것이 여자의 운명이거늘, 또 시집가는 딸에게도 이것이 여자로 태어난 팔자요 죄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요즈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와 같이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며 그것이 바른 믿음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반대의 극(極)은 이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유로부터는 동떨어진 방종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율법을 될 수있는 대로 안 지키는 것이 바른 크리스찬의 삶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자유를 주시려고 함이십니다.
잘못된 결혼관계는 폐하고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던 율법의 모양으로 비춰진 전 남편인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로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만 보였습니다. 내가 조그마한 잘못을 하더라도 징벌하는 그러한 분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참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의 오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은 이전부터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비하시고, 치료하시고, 거기 계시며, 우리에게 승리주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우리의생각(imagination) 가운데 무서운 하나님을 마음 속에 그린 것이고 해서 무섭고 우리를 억압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이 부담스럽고 지키기 싫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른 하나님의 모습--내가 두려운 마음으로 내 멋대로 색칠한 그런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항상 사랑해주시며 내가 떠나있을 때에도 나를 기다리고 계신 은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실, 호세아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호세아로 음녀 고멜을 사랑하고 용서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용서와 사랑이 그러함을 알게 하셨지만 미련한 인간은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의 옷을 입고 닥아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스런 남편이신 하나님을 우리로 알게 하신 다른 사자(messenger)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자유 의사로 인간을 짐짓 사랑하는 세상보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을 택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억지로 이 사람과 네가 결혼해야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여 세상의 조건과 결혼하는 그 결혼보다는 내가 사랑하기에 결혼하는 그 선택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참 남편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되 삼강오륜이나 다른 법에 메이는 그러한 의무로서 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의 이목(耳目)을 의식(意識)하여서 할 것도 아니요, 마음에서 샘솟는 사랑하는 님이기에 나의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러한 마음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6절에, “이제는 우리가 얽메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했습니다.
3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외면적인 모습--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하나님을 미루어 판단하여 하나님은 무섭고 징계하시는 분이라고 짐작하였는데 그렇다고 하여서 우리로 잘못 판단케 한 율법이 잘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 지킴이 우리에게 부담이 된 것은 그 율법의 존재목적을 우리가 오해한 까닭이지 율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어떤이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았던 종들은 잘 경영하여 배로 증식함으로 주인이 기뻐하는일을 하였는데,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자기의 게으름은 탓하지 않고 주인에 대해서 자기의 편견을 말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러나, 이 게으른 종이 그 주인을 판단함은 주인이 그러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삐뚤어져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거울에 삐뚤어지게 비쳤을 뿐입니다. 이 주인은 굳고 악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부드럽고 종들까지도 사랑하는 해서 ‘종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거기서 즐거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의 어떤 적은 부분을 지키지 못함을 징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심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질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더라.” 이 말씀은 율법이 없을 때, 혹은 율법을 알지 못할 때, 탐심이 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는 원인을 살펴보면, 사고로 죽는 경우를 제외하면 암(癌)으로 죽는 경우가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해서, 요즘은 몸의 어디가 조금 아픈 듯하면 ‘암이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대의학이 발전한 것 같지만 암을 초기에 발견하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이 죽습니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하거나, 6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강하던 사람인데 갑자기 죽었다고 하면서 병명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는데 아마 그 많은 경우가 암(癌)으로 사망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죄는 마치 이 암(癌)과도 같은 것입니다.
50년전의 사람이 암인줄 모르고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것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암으로 인해서 죽은 것인데 다만 그것이 암인줄 모르고 죽은 것입니다.
현대의학이 사람의 몸속에 있는 병의 원인을 암으로 밝혀내는 것--진단하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한 율법의 역할입니다. 사람의 병을 암으로 밝혀내었다고 해서, 의사의 진단이 죄(罪)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진단이 죄가 아니지만 병을 고치고 환자를 살리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환자가 살기 위해서는 의사의 치료와 약과 환자의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또는 믿음의 기도로 나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죄(罪)라는 병이 있습니다. 율법은 무엇인가 하면 이 죄가 우리를 하나님께로붙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죽게하는 병이라고 밝히는 의사의 진단입니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이 환자를 죽게 하는 것도 아니고 살리는 것도 아니었듯이 이 죄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진단하는 이 율법도 우리를 죽게 하거나 살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병고침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병을 치료하여야 하는 데, 우리의 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치료되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럴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선한 것’이란 율법입니다.
의사의 진단으로 내 몸에 병인줄 모르던 것이 병으로 밝혀졌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이 율법으로 우리 몸 속에 있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죄를 죄라고 진단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해서 우리는 이 죄의 병원균을 죽이는 치료를 해야합니다. 그 치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진단하기 위한 것일 뿐아니라 예방의학의 목적도 있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청결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병을 예방하는 생활이며, 혹은 건강식품을 먹는 것이 병에 대한 치료와 건강을 유지하며 질병에 대한 예방의 목적도 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은 병에 대한 진단이요 치료의 첫걸음일 뿐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병으로부터 예방되어지고 건강함을 유지하는 성화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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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조 중기에 상진이라고 하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농촌 길을 가노라니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농부가 있길래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는지 물어봅니다: “여보시게, 검은 소와 누렁 소중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나?” 농부는 밭가는 그곳에서도 대답할 수 있을 터인데 궂이 밭둑길까지 나와서 그냥 말해도 될터인데 그 선비의 귀를 빌어서 귀에다 대고 일러줍니다. 상진이 농부에게 왜 그냥 말하지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농부는 또 가만히 대답합니다: “아무리 짐승이라도 칭찬받는 소는 좋겠지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좋겠느냐?” 말합니다. 농부의 말을 듣고 상진은 평생에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사물과 환경을 긍정적으로 보며 생을 보내면서 영의정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무심코 범하는 잘못으로 인하여 자녀들이 삐뚤게 나갈 수 있습니다. 형제와 비교하여 칭찬을 듣는 자녀는 교만하여질 수 있고, 다른 형제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자녀는 열등감으로 어둡게 자라거나 사람을 미워하는 바음이 그 가운데 자라납니다.
부모의 비교의 소리를 듣고 자란 그들이 그 자녀들에게 또 상처를 주는 말을 합니다.
부모의 말 실수는 또 자녀들이 듣는 데서 이웃 사람이나 교회 사람들을 흉보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이러한 말을 들을 때 부모가 흉보는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나 장로님, 혹은 목사님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 자녀가 좀 더 자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흉보는 부모님의 신앙이 별 볼 일 없이 보여서 교회생활에 염증(厭症)을 느끼고 등한시(等閑視)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2
5장에서 의로와짐의 결과와 두 번째 아담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음을 설명하고,
6장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성화의 삶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시고 죽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신령하게 부활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서 부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의의 병기로 드려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라--설명한 바울은 7장에서 그러한 우리를 방해해온 그리고 여전히 방해하고 있는 죄와 율법의 문제를 다룹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기 전--아직 그리스도밖에 있던 이방인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 사람은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그 사람은 그것이 죄인줄 모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은 사람의 잘못은 죄와 율법을 자기 나름대로는 안다고 하는데, 제대로 이해(理解)한 것이 아니라 오해(誤解)하여 믿음이 자라지 않고 성화(聖化)되어지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해서 영적으로 단단한 음식을 씹어 먹지 못하고, 늘 젖이나 빠는 간난아기의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함에 결혼한 여자의 남편과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고 재미있기 위해서는 남편이 사랑스럽고 남편을 위해서 자꾸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남편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고 남편이 무섭고 엄하게만 느껴지고 남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소박맞지 않으려는 의무감에서만 나온 일이라면 그 일은 아내로서의 일이지만 부담스럽고 굴레에 묶인, 해서 일생이 고통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자유를 갈구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사람도 있지만 인간은 그를 조이고 동여매고있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습니다. 스티브 멕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빠삐욘(Papillon; 나비)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의 자유를 향한 탈출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붙잡히면 또 탈출을 시도하고 끊임없는 자유에 대한 도전(挑戰)입니다.
이조시대 양반들의 귀향지에서의 삶은 비교적 자유가 많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귀향에서 빨리 풀리기를 원함은 물론 복권(復權)을 바라는 마음에서이겠지만 또 다른 것으로서는 자유한 것 같지만 보이지 않게 그들을 붙잡고 있는 끈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은 마음에서 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가고,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함이 나에게 있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놓이게 된다고 하여 그 율법을 지키려 할 때 하나님의 율법은 나에게 큰 부담이요 속박입니다. 이 율법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까지도 나에게는 무서운 남편이요 그 분이 명한 율법을 지키지만 내게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이 무서운 남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늘 내 마음 속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남편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고 세상의 남자를 만나 그와 짝할 때, 나에게 엄하고 무서운 율법과 동일하게 보이는 그 하나님께서 나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아 그러지도 못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함이 없기 때문에 율법의 시킴대로 사는 나의 삶은 평안 대신 고통입니다.
많은 옛 여인들과 우리의 할머니들이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행복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상전인 남편의 몸종과도 같은 삶을 살면서 이것이 여자의 운명이거늘, 또 시집가는 딸에게도 이것이 여자로 태어난 팔자요 죄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요즈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와 같이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며 그것이 바른 믿음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반대의 극(極)은 이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자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유로부터는 동떨어진 방종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율법을 될 수있는 대로 안 지키는 것이 바른 크리스찬의 삶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자유를 주시려고 함이십니다.
잘못된 결혼관계는 폐하고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던 율법의 모양으로 비춰진 전 남편인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로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만 보였습니다. 내가 조그마한 잘못을 하더라도 징벌하는 그러한 분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참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의 오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은 이전부터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예비하시고, 치료하시고, 거기 계시며, 우리에게 승리주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우리의생각(imagination) 가운데 무서운 하나님을 마음 속에 그린 것이고 해서 무섭고 우리를 억압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이 부담스럽고 지키기 싫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른 하나님의 모습--내가 두려운 마음으로 내 멋대로 색칠한 그런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항상 사랑해주시며 내가 떠나있을 때에도 나를 기다리고 계신 은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실, 호세아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호세아로 음녀 고멜을 사랑하고 용서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용서와 사랑이 그러함을 알게 하셨지만 미련한 인간은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의 옷을 입고 닥아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스런 남편이신 하나님을 우리로 알게 하신 다른 사자(messenger)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자유 의사로 인간을 짐짓 사랑하는 세상보다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을 택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억지로 이 사람과 네가 결혼해야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여 세상의 조건과 결혼하는 그 결혼보다는 내가 사랑하기에 결혼하는 그 선택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참 남편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되 삼강오륜이나 다른 법에 메이는 그러한 의무로서 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의 이목(耳目)을 의식(意識)하여서 할 것도 아니요, 마음에서 샘솟는 사랑하는 님이기에 나의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러한 마음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6절에, “이제는 우리가 얽메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靈)]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했습니다.
3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외면적인 모습--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하나님을 미루어 판단하여 하나님은 무섭고 징계하시는 분이라고 짐작하였는데 그렇다고 하여서 우리로 잘못 판단케 한 율법이 잘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 지킴이 우리에게 부담이 된 것은 그 율법의 존재목적을 우리가 오해한 까닭이지 율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어떤이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았던 종들은 잘 경영하여 배로 증식함으로 주인이 기뻐하는일을 하였는데,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자기의 게으름은 탓하지 않고 주인에 대해서 자기의 편견을 말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러나, 이 게으른 종이 그 주인을 판단함은 주인이 그러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삐뚤어져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거울에 삐뚤어지게 비쳤을 뿐입니다. 이 주인은 굳고 악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부드럽고 종들까지도 사랑하는 해서 ‘종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거기서 즐거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의 어떤 적은 부분을 지키지 못함을 징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함이심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질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더라.” 이 말씀은 율법이 없을 때, 혹은 율법을 알지 못할 때, 탐심이 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는 원인을 살펴보면, 사고로 죽는 경우를 제외하면 암(癌)으로 죽는 경우가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해서, 요즘은 몸의 어디가 조금 아픈 듯하면 ‘암이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대의학이 발전한 것 같지만 암을 초기에 발견하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이 죽습니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하거나, 6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건강하던 사람인데 갑자기 죽었다고 하면서 병명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는데 아마 그 많은 경우가 암(癌)으로 사망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죄는 마치 이 암(癌)과도 같은 것입니다.
50년전의 사람이 암인줄 모르고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것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암으로 인해서 죽은 것인데 다만 그것이 암인줄 모르고 죽은 것입니다.
현대의학이 사람의 몸속에 있는 병의 원인을 암으로 밝혀내는 것--진단하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한 율법의 역할입니다. 사람의 병을 암으로 밝혀내었다고 해서, 의사의 진단이 죄(罪)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진단이 죄가 아니지만 병을 고치고 환자를 살리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환자가 살기 위해서는 의사의 치료와 약과 환자의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또는 믿음의 기도로 나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죄(罪)라는 병이 있습니다. 율법은 무엇인가 하면 이 죄가 우리를 하나님께로붙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죽게하는 병이라고 밝히는 의사의 진단입니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이 환자를 죽게 하는 것도 아니고 살리는 것도 아니었듯이 이 죄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진단하는 이 율법도 우리를 죽게 하거나 살게 하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병고침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병을 치료하여야 하는 데, 우리의 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치료되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럴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선한 것’이란 율법입니다.
의사의 진단으로 내 몸에 병인줄 모르던 것이 병으로 밝혀졌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이 율법으로 우리 몸 속에 있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죄를 죄라고 진단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해서 우리는 이 죄의 병원균을 죽이는 치료를 해야합니다. 그 치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진단하기 위한 것일 뿐아니라 예방의학의 목적도 있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청결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병을 예방하는 생활이며, 혹은 건강식품을 먹는 것이 병에 대한 치료와 건강을 유지하며 질병에 대한 예방의 목적도 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은 병에 대한 진단이요 치료의 첫걸음일 뿐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병으로부터 예방되어지고 건강함을 유지하는 성화의 삶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 (로마서 6:15-23)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 (로마서 6:15-23)
1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을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가 그가 힘들게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안되어 보여 트럭 뒤에 타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고맙다고 몇 번을 인사하고 트럭 뒤에 올라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운전사가 거울로 뒤를 보니 그 사람이 여전히 무거운 짐을 등에서 내려놓지 않고 힘들게 있습니다. 운전사는 트럭을 세우고 그 사람에게 왜 짐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힘들게 지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트럭에 타고 가는 것만 해도 미안스러운데 어떻게 염치없이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가는 우리를 ‘구원(救援)이라고 하는 트럭’에 태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트럭에 태워주셨을 때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죄의 짐도 내려놓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트럭’에 타고 가는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죄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구원 트럭을 타고 가면서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를 구원하여주셨는데, 이 죄의 짐은 내가 담당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의 홀가분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짐은 죄의 짐뿐만 아니라 염려와 근심의 짐들도 있습니다.
구원 트럭을 타고 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들--죄의 짐, 염려와 근심의 짐, 슬픔과 좌절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버지니아에서 공부할 때 금요일 저녁에는 대학원생들 성경그룹을 인도하고 토요일에는 대학생들 예배와 성경공부를 인도하였습니다.
대학원생들의 성경공부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20명 정도 모였는데, 그 중에는 유학 와서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 있었습니다. 연결기도(Chain prayer)로서 성경공부를 끝내는데, 아직 기도를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어느 날 믿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하게 느끼고 자신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를 원하여서 기도의 입술을 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감사에 대한 표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데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라 말이 생각한 대로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변소깐에 구더기만도 못한 저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여주심을 감사합니다. ......”
그 다음에도 무엇이라고 기도하였지만 기억이 없고, 고개 숙인 모든 사람들이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그의 표현에 모두 이를 악물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습니다. 결국, 누군가가 터뜨린 웃음을 시발로 하여 모두 배를 잡고 깔깔 웃고 말았지만, 그의 표현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 상태를 가리키기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한 사람이 가는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헨나’(γέεννα)는 원래는 히브리어적 표현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온 것인데, 이곳은 온갖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고 또 소각하기 위해서 불을 지피는 곳이었습니다. 해서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연기가 끊임없이 하늘로 오르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더러움과 악취의 극치의 곳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의 종국은 변소깐의 구더기 신세보다도 못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는 극에서 극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고 은혜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젊어서는 성질이 포악한 노예상선의 선장이었지만 그의 나이 23세에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연안을 항해하다가 험한 폭풍을 만나게 되고 그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 작은 간구를 드립니다. 그가 폭풍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해하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매 절마다 ‘주님의 은혜’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χαρίς)는 ‘태양에서 발산되는 햇살’과도 같은 것으로 태양보다 더 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광채입니다.
뉴톤이 세상을 떠나기 2-3년 전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 목사가 찾아오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한 후에 성경말씀을 읽어내려 갑니다. 그 친구 목사가 고린도전서 15장 9-10절을 읽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구절에서 뉴톤은 감동적인 독백을 합니다:
“나는 마땅히 되어야 할 내가 아니냐. 아, 얼마나 불완전하고 부족한가! (현실의) 나는 내가 바라는 내가 아니야. 나는 내가 소망하는 내가 아니야. 나는 곧 이 육신을 벗어버릴 거야. 육신이 있으면 모든 것이 불완전과 피투성이지. 나는 마땅히 되어야 할 내가 아니고, 내가 희망하는 내가 아니지만 내가 죄와 사탄에게 노예 되었던 과거의 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그 사도(바울)와 함께 충심으로 인정할 수 있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것입니다.
그의 곁을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가 그가 힘들게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안되어 보여 트럭 뒤에 타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고맙다고 몇 번을 인사하고 트럭 뒤에 올라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운전사가 거울로 뒤를 보니 그 사람이 여전히 무거운 짐을 등에서 내려놓지 않고 힘들게 있습니다. 운전사는 트럭을 세우고 그 사람에게 왜 짐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힘들게 지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트럭에 타고 가는 것만 해도 미안스러운데 어떻게 염치없이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가는 우리를 ‘구원(救援)이라고 하는 트럭’에 태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트럭에 태워주셨을 때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죄의 짐도 내려놓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트럭’에 타고 가는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죄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구원 트럭을 타고 가면서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를 구원하여주셨는데, 이 죄의 짐은 내가 담당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의 홀가분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짐은 죄의 짐뿐만 아니라 염려와 근심의 짐들도 있습니다.
구원 트럭을 타고 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들--죄의 짐, 염려와 근심의 짐, 슬픔과 좌절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버지니아에서 공부할 때 금요일 저녁에는 대학원생들 성경그룹을 인도하고 토요일에는 대학생들 예배와 성경공부를 인도하였습니다.
대학원생들의 성경공부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20명 정도 모였는데, 그 중에는 유학 와서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 있었습니다. 연결기도(Chain prayer)로서 성경공부를 끝내는데, 아직 기도를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어느 날 믿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하게 느끼고 자신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를 원하여서 기도의 입술을 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감사에 대한 표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데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라 말이 생각한 대로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변소깐에 구더기만도 못한 저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여주심을 감사합니다. ......”
그 다음에도 무엇이라고 기도하였지만 기억이 없고, 고개 숙인 모든 사람들이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그의 표현에 모두 이를 악물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습니다. 결국, 누군가가 터뜨린 웃음을 시발로 하여 모두 배를 잡고 깔깔 웃고 말았지만, 그의 표현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 상태를 가리키기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한 사람이 가는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헨나’(γέεννα)는 원래는 히브리어적 표현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온 것인데, 이곳은 온갖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고 또 소각하기 위해서 불을 지피는 곳이었습니다. 해서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연기가 끊임없이 하늘로 오르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더러움과 악취의 극치의 곳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의 종국은 변소깐의 구더기 신세보다도 못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는 극에서 극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고 은혜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젊어서는 성질이 포악한 노예상선의 선장이었지만 그의 나이 23세에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연안을 항해하다가 험한 폭풍을 만나게 되고 그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 작은 간구를 드립니다. 그가 폭풍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해하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매 절마다 ‘주님의 은혜’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χαρίς)는 ‘태양에서 발산되는 햇살’과도 같은 것으로 태양보다 더 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광채입니다.
뉴톤이 세상을 떠나기 2-3년 전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 목사가 찾아오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한 후에 성경말씀을 읽어내려 갑니다. 그 친구 목사가 고린도전서 15장 9-10절을 읽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구절에서 뉴톤은 감동적인 독백을 합니다:
“나는 마땅히 되어야 할 내가 아니냐. 아, 얼마나 불완전하고 부족한가! (현실의) 나는 내가 바라는 내가 아니야. 나는 내가 소망하는 내가 아니야. 나는 곧 이 육신을 벗어버릴 거야. 육신이 있으면 모든 것이 불완전과 피투성이지. 나는 마땅히 되어야 할 내가 아니고, 내가 희망하는 내가 아니지만 내가 죄와 사탄에게 노예 되었던 과거의 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그 사도(바울)와 함께 충심으로 인정할 수 있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것입니다.
2
바울은 6장 전반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이 세례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가 필요한 것은 ‘의에 이르고 구원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4장 아브라함의 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그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도, 율법도, 행위도 다 그 후에 따릅니다.
우리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함에 이른 사람에게 세례--“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왜 필요합니까?
바울은 명백히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로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이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함에 이른 사람이 싫어하고 떠나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에 거하고 죄를 짓는 삶입니다. 그것은 내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단의 종속물인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마음과 행실로 사랑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바울은 1절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의로움과 죄는 서로 상치되는 것으로서 의로와진 사람은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값싼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 사해주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일부러 죄짓는, 죄지으면서도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긍휼을 거두신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하나님께 항의(抗議)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중에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세례”가 우리에게 필요함은 우리가 마음으로 미워하는 죄에서 떠남이, 벗어남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도우심으로 불법과 불의에서 떠나 의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완전(完全)에 이르는 삶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 성화되어지는 삶은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를 수 있는 삶이 아니며, 우리의 결단과 간구와 함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6장 후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실천적인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겠노라--죄의 법 혹은 그늘에서 벗어나겠노라”하는 것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실천도 없고, 부족함도 깨닫지 못하고 또 해서 간구함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을 무의미하게 믿지 않는 자와 다름이 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성화의 결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디모데전서 4장 7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성화의 끝--곧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하다’(γυμνάζω)는 운동선수가 체육관에서 땀흘리며 훈련하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과 땀흘리는 연습만 가지고도 부족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우심입니다. 이릴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우리를 의의 병기, 순종의 종으로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종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종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있는 사단에게 속한 사람들은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짐승의 표를 이마나 오른 손에 갖고 세상을 살아가고, 요한 계시록 7장과 14장, 에스겔서 9장에 있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표 또는 어린양의 표를 이마에 받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세상에서의 삶은 비슷하거나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짐승의 표를 받은 세상에 속한 자의 종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요 사망인 반면, 하나님의 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의 종국은 생명이요 상급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단에게 권세가 넘어간 세상에 살면서 짐승의 표를 받고 이 사단이라고 하는 짐승에게 경배하는 그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결국이 하나님의 진노이었는데 하나님의 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17-18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았건 알지 못하였건,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의 결국은 로마서 2장 5절에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진노요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나타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되고, 사형의 선고를 받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형장을 향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사면(赦免)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해서, 우리 입술에는 감사함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이르는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19절에서 권면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1-22절에서 바울은 죄의 종노릇하던 옛 사람과 의의 종이 된 새 사람의 열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가 죄의 종노릇할 때 무슨 열매를 얻었습니까?
열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5장 4, 8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1장 43절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열매 맺지 못하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열매 맺음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열매 맺음이 없겠습니까?
믿음의 결과 혹은 표현이 열매인데 왜 열매 맺음이 없겠습니까?
이 열매가 무엇입니까?
이 열매는 밖으로는 전도의 열매이며, 내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내적인 변화--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선포합니다.
죄 아래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과 은혜 아래서 의(義)이신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것이 그렇게 큰 구별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으로 그의 주되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의로와지고 구원함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3
우리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까?
우리는 먼저 의와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믿음 생김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그의 마음에 들게됨이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이 믿음이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이라고 하는 완전함에 이르도록 결단하고 연습하고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실천과정에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는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가 필요한 것은 ‘의에 이르고 구원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4장 아브라함의 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그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도, 율법도, 행위도 다 그 후에 따릅니다.
우리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함에 이른 사람에게 세례--“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왜 필요합니까?
바울은 명백히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로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이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함에 이른 사람이 싫어하고 떠나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에 거하고 죄를 짓는 삶입니다. 그것은 내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단의 종속물인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마음과 행실로 사랑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바울은 1절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의로움과 죄는 서로 상치되는 것으로서 의로와진 사람은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값싼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 사해주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일부러 죄짓는, 죄지으면서도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긍휼을 거두신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하나님께 항의(抗議)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중에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세례”가 우리에게 필요함은 우리가 마음으로 미워하는 죄에서 떠남이, 벗어남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도우심으로 불법과 불의에서 떠나 의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완전(完全)에 이르는 삶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 성화되어지는 삶은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를 수 있는 삶이 아니며, 우리의 결단과 간구와 함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6장 후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실천적인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겠노라--죄의 법 혹은 그늘에서 벗어나겠노라”하는 것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실천도 없고, 부족함도 깨닫지 못하고 또 해서 간구함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을 무의미하게 믿지 않는 자와 다름이 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성화의 결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디모데전서 4장 7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성화의 끝--곧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하다’(γυμνάζω)는 운동선수가 체육관에서 땀흘리며 훈련하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과 땀흘리는 연습만 가지고도 부족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우심입니다. 이릴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우리를 의의 병기, 순종의 종으로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종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종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있는 사단에게 속한 사람들은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짐승의 표를 이마나 오른 손에 갖고 세상을 살아가고, 요한 계시록 7장과 14장, 에스겔서 9장에 있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표 또는 어린양의 표를 이마에 받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세상에서의 삶은 비슷하거나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짐승의 표를 받은 세상에 속한 자의 종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요 사망인 반면, 하나님의 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의 종국은 생명이요 상급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단에게 권세가 넘어간 세상에 살면서 짐승의 표를 받고 이 사단이라고 하는 짐승에게 경배하는 그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결국이 하나님의 진노이었는데 하나님의 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17-18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았건 알지 못하였건,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의 결국은 로마서 2장 5절에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진노요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나타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되고, 사형의 선고를 받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형장을 향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사면(赦免)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해서, 우리 입술에는 감사함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이르는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19절에서 권면합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1-22절에서 바울은 죄의 종노릇하던 옛 사람과 의의 종이 된 새 사람의 열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가 죄의 종노릇할 때 무슨 열매를 얻었습니까?
열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5장 4, 8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1장 43절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열매 맺지 못하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열매 맺음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열매 맺음이 없겠습니까?
믿음의 결과 혹은 표현이 열매인데 왜 열매 맺음이 없겠습니까?
이 열매가 무엇입니까?
이 열매는 밖으로는 전도의 열매이며, 내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내적인 변화--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선포합니다.
죄 아래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과 은혜 아래서 의(義)이신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것이 그렇게 큰 구별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으로 그의 주되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의로와지고 구원함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3
우리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까?
우리는 먼저 의와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믿음 생김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그의 마음에 들게됨이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이 믿음이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이라고 하는 완전함에 이르도록 결단하고 연습하고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실천과정에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는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종과 의의 종” (로마서 6:15-23)
“죄의 종과 의의 종” (로마서 6:15-23)
1
사람이 무언가에 지나치게 빠져있으면 그것으로부터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처음에는 가벼운 즐거움으로, 또는 괴로운 일을 잊기 위하여서 술을 마시지만, 술에 거나하게 취하기 시작하면 이제는 술을 받는 몸이 괴로운데도 술을 몸 속으로 퍼붓습니다. 하여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술을 마시지 아니하면 손이 떨리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지경까지 갑니다.
마약(痲藥)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환각의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마약을 하지만 나중에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몰골도 흉하게 되지만 마약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돈을 모으는데 맛이 들린 사람은 돈을 버는 재미를 느끼지 않고는 세상을 사는 맛이 없습니다. 해서, 이 사람은 돈을 벌어 평생을 즐길 수 있는 돈이 있는데도, 때로 여행을 하고 친구를 사귀면서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대신에 일년 365일 돈 버는 일에만 전념합니다. 돈을 버는 일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불안합니다. 몸에 병이 나도 돈을 쓰는 것이 온갖 고통을 고스란히 견디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에 미혹되어 에덴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때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와가 처음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지어 선악과를 따먹을 때, 또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가 준 선악과를 받아서 먹을 때 그들은 몹시도 떨렸고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죄(罪)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 벗어남을 의미하는데, 한 번 죄를 지은 사람은 그 다음 두 번째 죄를 짓는 일은 훨씬 쉽고, 그 다음은 점점 더 쉬워집니다. 해서, 나중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에까지 가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이신 하나님을 떠난 상태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도 아무런 가책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죄인(罪人)’이란 말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가 왜 죄인(罪人)인지, 무슨 죄를 짓고 살아가는지도 알지 못 합니다.
현대인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당신은 죄인입니다’란 말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내가 교회를 출석하는 것은 내가 죄인인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면 사람도 만나고, 또 여러 가지 정보도 얻고, 또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입니다. 죄에 무감각해진 까닭입니다. 죄에게 여전히 종노릇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커다란 죄인이었는지 깨달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약간의 죄를 범한 적은 있지만, 그렇게 큰 죄를 범한 기억은 없는데요.’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를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나는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하여 찬송하고 예배드리는데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이 죄요, 지나친 욕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도 시기하지도 않는데요.’ ‘또한 지나친 욕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주위에 헐벗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못하고 찾아가지 않음이 죄입니다.
‘......’
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우리가 죄인임을 자복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종노릇함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죄의 권세아래서 사단이 기뻐하는 일을 반복하여 해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께 종노릇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낫는데, 또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라구요?’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게도 또한 하나님에게도 속하지 않은 사람은 다시 돌이켜 죄에게 속하게 됩니다.
미국의 남북이 흑인노예의 갈등이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흑인여자가 노예시장에 나왔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값을 부릅니다. 한 사람이 높은 값을 부르매 아무도 그 이상의 값을 부르지 못하여 그 흑인여자 노예는 그 사람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노예문서를 전달받은 그 사람은 흑인여자에게 노예문서를 주면서, “당신은 이제 자유인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시오.”라고 말합니다.
흑인여인은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농담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해서 반문합니다. “정말입니까? 제가 자유인입니까? 제가 아무 곳이나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단 말이지요?!”
그 백인남자는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흑인여자는 그에게 요청합니다. “제가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살면 안 될까요? 저는 막상 갈 데도 없는 사람입니다. 괜히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노예로 못된 주인을 만나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제가 열심히 섬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인남자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 흑인여자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였습니다.
흑인여자는 자유인으로서 그 사람을 위하여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종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허물의 멍에와 종노릇함에서 해방시켜 주시매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유를 가지고 자원하여 하나님의 의의 종, 하나님께 순종의 종이 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종, 순종이 되기로 결단하는 사람은 마지못하여, 억지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2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응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5절에서 바울은 1절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의로움과 죄는 서로 상치되는 것으로서 의로와진 사람은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값싼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 사해주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일부러 죄짓는, 죄지으면서도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긍휼을 거두신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하나님께 항의(抗議)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중에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세례”가 우리에게 필요함은 우리가 마음으로 미워하는 죄에서 떠남이, 벗어남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도우심으로 불법과 불의에서 떠나 의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완전(完全)에 이르는 삶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 성화되어지는 삶은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를 수 있는 삶이 아니며, 우리의 결단과 간구와 함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6장 후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실천적인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겠노라--죄의 법 혹은 그늘에서 벗어나겠노라”하는 것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실천도 없고, 부족함도 깨닫지 못하고 또 해서 간구함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을 무의미하게 믿지 않는 자와 다름이 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성화의 결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디모데전서 4장 7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성화의 끝--곧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하다’(γυμνάζω)는 운동선수가 체육관에서 땀흘리며 훈련하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과 땀흘리는 연습만 가지고도 부족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우심입니다. 이릴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우리를 의의 병기, 순종의 종으로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성경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종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종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있는 사단에게 속한 사람들은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짐승의 표를 이마나 오른 손에 갖고 세상을 살아가고, 요한 계시록 7장과 14장, 에스겔서 9장에 있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표 또는 어린양의 표를 이마에 받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세상에서의 삶은 비슷하거나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짐승의 표를 받은 세상에 속한 자의 종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요 사망인 반면, 하나님의 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의 종국은 생명이요 상급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단에게 권세가 넘어간 세상에 살면서 짐승의 표를 받고 이 사단이라고 하는 짐승에게 경배하는 그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결국이 하나님의 진노이었는데 하나님의 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17-18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알았건 알지 못하였건,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의 결국은 로마서 2장 5절에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진노요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나타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되고, 사형의 선고를 받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형장을 향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사면(赦免)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해서, 우리 입술에는 감사함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이르는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이 넘칩니다.
19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합니다.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이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성도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은 거룩함에 이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20절: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죄’란 말은 ‘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를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즉, “의가 없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 아래 놓여있었을 때에는 ‘의’를 생각하고 행하는 대신에 ‘죄’인 ‘불의’와 짝하여 ‘불의’를 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1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우리가 죄의 종노릇할 때 무슨 열매를 얻었습니까?
열매에 대해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에게 종노릇하는 사람들은 못된 열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이 얻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밖으로는 전도의 열매이며, 내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내적인 변화--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있는 이러한 것들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들인데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을 통하여 그가 성령에 속한 사람인 것과 해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스스로 증거합니다.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죄 아래서 죄의 종노릇하는 삶과 은혜 아래서 의(義)이신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삶이 그렇게 큰 구별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은 엄청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아 여전히 죄 아래 놓인 삶을 산 사람은 사망이 그를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에 하신 선포가 무엇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입니다. 곧, ‘죄를 지음’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정녕 죽으리라”--‘사망’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으로 그의 주되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의로와지고 구원함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사”(τὸ χάρισμα τού θεού)--‘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3
우리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까?
우리는 먼저 의와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믿음 생김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그의 마음에 들게됨이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이 믿음이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이라고 하는 완전함에 이르도록 결단하고 연습하고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실천과정에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는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1
사람이 무언가에 지나치게 빠져있으면 그것으로부터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처음에는 가벼운 즐거움으로, 또는 괴로운 일을 잊기 위하여서 술을 마시지만, 술에 거나하게 취하기 시작하면 이제는 술을 받는 몸이 괴로운데도 술을 몸 속으로 퍼붓습니다. 하여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술을 마시지 아니하면 손이 떨리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지경까지 갑니다.
마약(痲藥)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환각의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마약을 하지만 나중에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몰골도 흉하게 되지만 마약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돈을 모으는데 맛이 들린 사람은 돈을 버는 재미를 느끼지 않고는 세상을 사는 맛이 없습니다. 해서, 이 사람은 돈을 벌어 평생을 즐길 수 있는 돈이 있는데도, 때로 여행을 하고 친구를 사귀면서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대신에 일년 365일 돈 버는 일에만 전념합니다. 돈을 버는 일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불안합니다. 몸에 병이 나도 돈을 쓰는 것이 온갖 고통을 고스란히 견디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에 미혹되어 에덴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때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와가 처음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지어 선악과를 따먹을 때, 또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가 준 선악과를 받아서 먹을 때 그들은 몹시도 떨렸고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죄(罪)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 벗어남을 의미하는데, 한 번 죄를 지은 사람은 그 다음 두 번째 죄를 짓는 일은 훨씬 쉽고, 그 다음은 점점 더 쉬워집니다. 해서, 나중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에까지 가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이신 하나님을 떠난 상태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도 아무런 가책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은 ‘죄인(罪人)’이란 말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가 왜 죄인(罪人)인지, 무슨 죄를 짓고 살아가는지도 알지 못 합니다.
현대인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당신은 죄인입니다’란 말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내가 교회를 출석하는 것은 내가 죄인인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면 사람도 만나고, 또 여러 가지 정보도 얻고, 또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입니다. 죄에 무감각해진 까닭입니다. 죄에게 여전히 종노릇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커다란 죄인이었는지 깨달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약간의 죄를 범한 적은 있지만, 그렇게 큰 죄를 범한 기억은 없는데요.’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를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나는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하여 찬송하고 예배드리는데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이 죄요, 지나친 욕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도 시기하지도 않는데요.’ ‘또한 지나친 욕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주위에 헐벗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못하고 찾아가지 않음이 죄입니다.
‘......’
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우리가 죄인임을 자복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종노릇함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죄의 권세아래서 사단이 기뻐하는 일을 반복하여 해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께 종노릇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낫는데, 또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라구요?’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게도 또한 하나님에게도 속하지 않은 사람은 다시 돌이켜 죄에게 속하게 됩니다.
미국의 남북이 흑인노예의 갈등이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흑인여자가 노예시장에 나왔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값을 부릅니다. 한 사람이 높은 값을 부르매 아무도 그 이상의 값을 부르지 못하여 그 흑인여자 노예는 그 사람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노예문서를 전달받은 그 사람은 흑인여자에게 노예문서를 주면서, “당신은 이제 자유인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시오.”라고 말합니다.
흑인여인은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농담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해서 반문합니다. “정말입니까? 제가 자유인입니까? 제가 아무 곳이나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단 말이지요?!”
그 백인남자는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흑인여자는 그에게 요청합니다. “제가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살면 안 될까요? 저는 막상 갈 데도 없는 사람입니다. 괜히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노예로 못된 주인을 만나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제가 열심히 섬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인남자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 흑인여자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였습니다.
흑인여자는 자유인으로서 그 사람을 위하여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종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허물의 멍에와 종노릇함에서 해방시켜 주시매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유를 가지고 자원하여 하나님의 의의 종, 하나님께 순종의 종이 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종, 순종이 되기로 결단하는 사람은 마지못하여, 억지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2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응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5절에서 바울은 1절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의로움과 죄는 서로 상치되는 것으로서 의로와진 사람은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값싼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 사해주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일부러 죄짓는, 죄지으면서도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긍휼을 거두신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하나님께 항의(抗議)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중에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세례”가 우리에게 필요함은 우리가 마음으로 미워하는 죄에서 떠남이, 벗어남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도우심으로 불법과 불의에서 떠나 의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완전(完全)에 이르는 삶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 성화되어지는 삶은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를 수 있는 삶이 아니며, 우리의 결단과 간구와 함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6장 후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실천적인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겠노라--죄의 법 혹은 그늘에서 벗어나겠노라”하는 것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실천도 없고, 부족함도 깨닫지 못하고 또 해서 간구함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을 무의미하게 믿지 않는 자와 다름이 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성화의 결단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디모데전서 4장 7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성화의 끝--곧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하다’(γυμνάζω)는 운동선수가 체육관에서 땀흘리며 훈련하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단과 땀흘리는 연습만 가지고도 부족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우심입니다. 이릴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우리를 의의 병기, 순종의 종으로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성경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종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종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있는 사단에게 속한 사람들은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짐승의 표를 이마나 오른 손에 갖고 세상을 살아가고, 요한 계시록 7장과 14장, 에스겔서 9장에 있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표 또는 어린양의 표를 이마에 받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세상에서의 삶은 비슷하거나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짐승의 표를 받은 세상에 속한 자의 종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요 사망인 반면, 하나님의 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의 종국은 생명이요 상급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단에게 권세가 넘어간 세상에 살면서 짐승의 표를 받고 이 사단이라고 하는 짐승에게 경배하는 그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결국이 하나님의 진노이었는데 하나님의 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17-18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알았건 알지 못하였건,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의 결국은 로마서 2장 5절에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진노요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나타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되고, 사형의 선고를 받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형장을 향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사면(赦免)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해서, 우리 입술에는 감사함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이르는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이 넘칩니다.
19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합니다.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이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성도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은 거룩함에 이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20절: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죄’란 말은 ‘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를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즉, “의가 없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 아래 놓여있었을 때에는 ‘의’를 생각하고 행하는 대신에 ‘죄’인 ‘불의’와 짝하여 ‘불의’를 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1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우리가 죄의 종노릇할 때 무슨 열매를 얻었습니까?
열매에 대해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에게 종노릇하는 사람들은 못된 열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이 얻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밖으로는 전도의 열매이며, 내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내적인 변화--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있는 이러한 것들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들인데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을 통하여 그가 성령에 속한 사람인 것과 해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스스로 증거합니다.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죄 아래서 죄의 종노릇하는 삶과 은혜 아래서 의(義)이신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삶이 그렇게 큰 구별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은 엄청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아 여전히 죄 아래 놓인 삶을 산 사람은 사망이 그를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에 하신 선포가 무엇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입니다. 곧, ‘죄를 지음’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정녕 죽으리라”--‘사망’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으로 그의 주되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의로와지고 구원함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사”(τὸ χάρισμα τού θεού)--‘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해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3
우리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까?
우리는 먼저 의와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믿음 생김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그의 마음에 들게됨이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이 믿음이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이라고 하는 완전함에 이르도록 결단하고 연습하고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실천과정에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는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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