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2, 2013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로마서 6:1-14)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로마서 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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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명이 길면 길수록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재의 생에 아쉬움과 미련이 많을 것이며 이 세상을 떠나고 쉽지 않습니다. 특히 그 삶이 편하고 좋을수록 그 삶이 그대로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한국에서 큰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상류층의 사람들입니다. 한국이 아직 중진국(中進國) 대열에 끼기 전에도 그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생활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건배(乾杯)를 할 때에 “위하여!”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에 “이대로!”라는 말을 사용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현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을 듯 보이던 사람들이지만 그들 가운데도 영혼의 갈급함이 있었고 그들 영혼의 갈급(渴急)함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활에서 해갈(解渴)됨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전의 삶의 모습을 버리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교회에 국회의원들도 있고 교수들도 있고 의사들도 있고 기업인들도 있지만, 자기 차례가 되어서 밖에 나가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의 차량정리를 함에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이상한 행동을 하게되면 그 사람의 신상(身上)에 어떤 변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평소에 지독히 인색(吝嗇)하던 사람이 자선을 베풀거나, 평소에 매우 게으르던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부리면 그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지않던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의 ‘옛사람(old being)’이 죽어야 합니다. 평소에 하지않던 행동을 하는 것이 단회적(單會的), 일시적(一時的)인 사건이어서는 안되고, 지속적(持續的)인 사건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장차 살 곳은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 하늘나라인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지금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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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5장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가 왜 필요하고 칭의의 결과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자고(自高)함과 우둔(愚鈍)함으로 하나님을 알되 인정치 않는 삶을 살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그대로 내어버려두셨는데 그 종국은 스스로는 그 죄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나님은 그들이 의로와질 수 있는 한 방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의로와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의로와지고 소망을 갖게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마련하여주신 값없는 은혜의 선물(膳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問題)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律法)을 주셨을 때 율법주심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으로 의로와지려고 헛되이 달려가다가 망했듯이, 신약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잘못 이해하여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죄된 삶을 반복(反復)하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시니까,’ ‘내가 회개(悔改)하기만 하면 용서(容恕)해주신다고 했으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했으니까’ 하며 죄(罪)인줄 알면서도 그 죄를 짐짓 반복하여 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크리스챤 인구가 전인구의 25%인데, 사기(詐欺)·부정(不正)등 사회윤리적 죄를 범하는 사람들의 50%가 크리스챤이라고 말함이 이를 대변(代辯)해줍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그 삶이 아무래도 좋다고, 행위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행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가르쳐주고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26-27절에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6장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그것이 그 사람의 마지막 단계(段階)가 아니라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첫 단계(段階)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화(聖化)에로 이르는 삶을 설명하기에 앞서 바울은 1-2절에서 앞에서 혹시 오해(誤解)가 있을까봐 중간 중간에 집어넣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앞서, 3장 8절에서,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3장 3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또 6장 15절에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의 모음인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율법을 흔히 토라(תורה)라고 하는데, 이는 좁은 의미로는 모세 5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 전체(全體)를 토라(תורה)--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약백성들의 율법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율법은 구야과 신약의 성경 전체가 율법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율법지킴이 필수사항(requirement)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하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로 성화(聖化)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세례(洗禮)는 의로와지기 위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뜻에서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그의 믿음으로 의로와진 것은 창세기 15장 6절의 사건으로서 그의 나이 86쯤이었을 때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기 이전에 순종(順從)함으로 갈대아-우르를 떠난 것이 창세기 11장말부터 12장에 걸쳐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75세 이전의 일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상호 약속의 표징인 할례를 받는 것은 창세기 17장에 기록되어있는데 이때 그의 나이 99세이었습니다.

할례(割禮)는 상호 약속(約束)의 표징(表徵)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할례를 통하여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의 할례의 표를 보시면서 그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과 민족과 복의 세가지 약속을 늘 기억하시며 지키십니다.

구약의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 세례를 통하여 “내가 이제 이후로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겠노라” 하나님과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표시를 보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사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약속한 우리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4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은 자들 가운데 장사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죄의 짐을 지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罪)와 허물은 죽은 자들과 함께 음부(Hades)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은 하나님께 대한 의(義)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는 우리도 하나님께 대한 의의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다 음부에 장사지낸 바 되었기에 우리의 옛사람은 이제 죽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생명만이 있습니다.

6-7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으로서 죽은 자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었고 우리의 죄에게 종 노릇하던 우리의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10-11절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함은 죄성과 죄로의 유혹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리고 온 ‘죄된 세상과 그 속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고 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살피고 또 찾아서 행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간구와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성령께 의지할 때 이러한 삶이 가능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20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백했습니다.
죄된 우리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나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지부식(不知不識) 간에 행하는 착한 행동으로 사람들 앞에 등불을 비추이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시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요 생활이 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은 우리가 죄와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이요 “하나님께 헌신하며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겠노라”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선포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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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와 사망의 땅 애굽을 나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로 예정되었지만 그들이 불순종과 불신앙을 보일 때, 출애굽한 60만의 장정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우리의 믿음을 지킬 뿐아니라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확실하게 유업으로 얻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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