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2, 2013

“아브라함의 의(2)” (로마서 4:16-25)

                                                “아브라함의 의(2)” (로마서 4: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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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옛날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잠자리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텔레비젼이나 비디오를 통해 아이들을 위한 더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와서 우리 애들도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실 옛날 이야기 왕국입니다. 가까이는 2,000년 전 멀리는 6,500년 전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해당하는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과 관련된 것 중 성경 속에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성경 이야기를 읽기만 하면 듣기만 하면 졸음이 오고 따분한 마음이 듭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야기의 배경이나 무대가 우리와는 좀 거리가 먼 유대나라에서 벌어진 것이라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배경이나 무대를 이해하고 이 성경에 맛을 들리면 다른 어떤 종류의 이야기보다 재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들에도 교훈적인 것이 더러 있지만 성경은 교훈적인 것 위에 우리 삶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섭(干涉)을 발견케 해줍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들과 친숙하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중요한 것은 이 성경 속의 이야기와 나의 삶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 감동적인 것이 많이 있지만,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정착하기 위하여 전쟁을 치루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함께 감동을 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마자 그들 앞에 놓인 과제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 여리고를 점령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성을 점령하기 위한 세밀한 지시사항을 하달(下達)하셨는데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달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잘 청종하고 그대로 따랐더니 그 크고 튼튼한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막상 성이 무너지자 하나님은 사라지고 그들 자신이 다 이루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다음에 그들 앞에 놓인 성은 여리고성에 비하여는 극히 작은 아이성이었습니다. 이 성은 단 숨에 적은 군대로서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여호수아 7:3). 해서, 하나님께 매달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지시도 기다리지 않고 삼천 명의 군대를 보내지만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하나님의 군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면 소수로서도 큰 일을 이룰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만 의지할 때는 다수로서도 작은 일 조차 이루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설교자가 웃기는 이야기를 잘해서가 아니고, 세상 사람들의 즐거운 사교모임(social gathering)의 장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기억지 않으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고 거하시고 죽으셨던 주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또한 사랑함을 찬양과 경배로서 표현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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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로마서 4장 전반부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선한 행위나 할례나 율법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그의 설명의 근거를 성경에서 제시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우리의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나, 우리가 받는 세례나, 성경이 우리의 칭의(稱義)--의롭다 여김을 받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사람이 흔히 ‘아무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말하지만, 그 사람이 세상사람에게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그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를 받아야지만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줄’ 압니다. 해서, 바울 당시에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부모님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으로 반문할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남’이 무슨 뜻인지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의미입니다. 겉으로의 할례는 행하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겉으로의 물세례는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례와 물세례의 중요한 의미는 죄씻음(성결)과 하나님께 헌신입니다. 해서, 바울은 표면적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 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요한 3:5)에서 ‘물로 남’을 어머니 뱃속의 양수가 터져서 태어나는 우리의 자연출산을 가리킨다 해석하고, ‘성령으로 남’은 우리가 자연인의 삶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는 사람을 살기 위한 성령의 인침--곧 하나님의 사람의 표시를 우리 내면에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상당히 근거(根據)있는 해석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서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시느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침을 받음을 “born-again”--‘거듭남’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입니다.
설령, 물세례가 우리 구원에 꼭 필요한 필수사항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고 물세례 받지 못하고 주님 앞에 이른 나를 눈감아 주실 때 시비를 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꼭 성경을 많이 알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의 지시사항 중 얼마간을 어겼다 하더라도 염려가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의로움을 결정합니까? 성경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기록한 것 같이 우리의 생명록에 “최 목사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김 집사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기록되어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質問)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는,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선한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세례도 받을 필요도 없고, 성경을 알 필요도 없고 성경말씀대로 살 필요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하는 반문입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바울이 어떠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까?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이 필요하고, 모든 사람 앞에 주님을 시인하는 물세례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도 날마다 읽고 상고하고 지켜 행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함은 우리의 의로움의 요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함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 가운데 자연히 보여지는 믿음의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믿기에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지켜 행하려고 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여러 사람 앞에 고백하는 물세례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와질 수 있는데 왜 번거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분이요 그들이 깨달아 알 수 없는 분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따라서 지킨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너무 피상적으로 알아 그들이 드리는 제사나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았기 때문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고 그 앞에 절하면서도 잘못된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심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별개의 분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러 온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에, 인간의 귀에, 인간의 눈에 멀리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육신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오신 예수님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자기 의로서 멀리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고있노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미리 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세 가지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민족과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가나안 땅 곧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과 같은 유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6절에,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23-24절에,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기록의 효력은 아브라함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자취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요, 의로 여김과 약속의 유업을 확증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주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죽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예수님께 짊어지시게 하시고 죄짐을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의 죄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의를 향한 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심은 예수님께서 의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나신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 의에 대해서 살아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이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문제”를 6장에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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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바른 이해가 바른 믿음의 생활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나 루터(Luther)나 칼빈(Calvin)이나 요한 웨슬레(John Wesley) 등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로마서를 통하여 믿음으로 거듭남을 체험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후배 목사님들에게 말씀할 때 로마서를 잘 설교하면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로마서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로마서는 어려운 글입니다. 그러나, 읽고 또 읽을 때 로마서만큼 은혜가 넘치는 성경 속의 글도 드뭅니다. 제가 로마서를 강해하는 동안에 여러분들도 로마서를 자주 읽으심으로서 은혜의 글에 친근하게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느끼시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세 가지 가나안 땅과 민족과 복을 유업으로 받으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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