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8, 2013

“이방인에 대한 심판” (로마서 3:9-20)

                                            “이방인에 대한 심판” (로마서 3:9-20)       

                                                                            1
나의 자녀가 더 예쁘게 생긴 다른 사람의 아이보다 나에게 더 사랑스러운 이유들이 여럿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낳은 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원 창조주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나의 육체를 빌어 만들어진 아이이기에 남의 아이보다 더 사랑스럽습니다.
둘째는 나의 자녀가 나를 닮았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못생긴 나보다는 잘 생긴 백인을 닮았으면 하는 마음도 들 것이지만 만일 나의 아이가 그런 얼굴이라면 사랑스럽기 보다는 아마도 마음 속에서 분노와 의심이 들 것입니다.
셋째는 나를 아빠라고,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고, 또 찾기에 귀찮으면서도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을 때에 당연히 나를 제일 좋다고 대답할 줄 알기에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자신의 의사로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넷째는 나의 말을 잘 듣고 행하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말을 안듣는 자식 보다는 말을 잘듣는 자식이 내 생각에 잘 키운 자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사람들이 기도생활을 잘하지 않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나열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나의 속을 꿰뚫어 보고 계신 분이라면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네 하나님이니까 네가 기도하면 응답해주시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이니까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아시대의 주위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시대에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취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도 이런 태도를 흔히 취하였습니다.
셋째는 기도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기도하는 시간 만큼 하나님께서 돈을 쏟아부어주신다면 이 세상에 기도 안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며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주시며 달라는 대로 다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이나 자빠져서 입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인간 부모도 자녀가 한번 요구할 때는  안된다고 말하다가도 계속 강청할 때는 하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께서도 그러실 수 있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넷째는 현재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함이 없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나태함에서 나온 것이지 부족한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세상 일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다섯째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화도 해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고, 여행도 해야 하고, 자녀도 길러야 하고, 밥도 먹어야하고, 직장생활, 학교생활도 해야 하고, 비디오도 봐야 하고, 하기 때문에 정작 하루에 십분만 들이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은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다하고 남은 시간이 있어도 기도할 생각은 안하고 뭐 재미난 일 없나 궁리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여섯째는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고 귀하다”라고 찬송했는데,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응답받는 기도의 즐거움’을 알기만 한다면 기도 그만 하라 해도 서로 다투어 기도하려고 할 것인데 말입니다.
일곱째는 기도의 영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기도의 영이신데(롬 8:26) 성령의 큰 바람이 우리 마음 속에서 불지않고 있기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기도하다가 정말 예수믿는데 푹 빠져 버릴까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진짜로 내 앞에 나타나시면 어떻게 하나?’ ‘내가 기도생활을 열심히하다 세상의 재미를 잊어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더 좋은 천국은 놔두고 약간은 지옥에 머물기를 원하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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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17절-3장 8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맡기셨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를 행치 못하여 죄 아래 놓이고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그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그러면 이방인인 너희는 유대인 보다 나은 것이 있으며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뇨? 바울이 ‘우리’라고 함으로 자신까지도 이방인의 수에 집어넣은 것은 이방인의 사도인 자신과 그들을 동질화시킨 것입니다. 율법을 맡은 유대인이 하나님 앞에 미치지 못한 것 같이, 이방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하나님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지만 그를 따라 행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함은 한 가지란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선언한 대로 세상에 의인은 없는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변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살 동안 인간이 잘났다 다투지만 따지고 보면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부족하고 무익한 인간을 사랑하시되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11절에,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약속하시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의 뜻을 깨닫는 자가 없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만 합니다. 해서,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되 세상 가운데 자신들의 이기적인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無益)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탄식합니다.

인간이 구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반대 편에 놓인 세상의 쾌락일 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모된 자로서 우리 자식들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와 하면서도 막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일이 무엇인가 헤아리는 지혜가 없음은 어찌된 까닭인지 모를 일입니다. 삶의 노예가 되어서 그런가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단의 권세가운데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13절에,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했습니다. 입 속에 있는 것중 어느 한 가지 선한 것이 없습니다. 목구멍을 통해서 나오는 말도 악하고, 그 말을 놀리는 혀도 속임을 베풀고, 밖으로 표현하는 입술도 궤악하여 ‘독사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입에 저주와 악독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발은 다른 사람을 해하는데 사용됩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감당합니다.

16-17절에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주님의 평강의 길을 앎이 없고 오직 파멸과 고생만 생각하고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육신의 눈이건 마음의 눈이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도 오래참으시는 중에 진노를 쌓아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미치지 못하되 한 사람도 그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해서, 율법을 받은 자는 그 율법의 판단으로 망하고, 율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율법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그들에게 없음으로 망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절대적 부족을 ‘하나도 없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했고, 12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했고,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하나님)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σάρξ)가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육체’라고 함은 우리 부족하고 죄많은 인간을 가리킵니다.
우리 고깃덩이인 신체를 가지고 인간을 지칭함에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를 육체라고도 할 수 있고, 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몸(body)이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데 더 적절하고 긍정적인 용어인 반면, 육체(flesh)라고 함은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 인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할 때, 이 몸은 우리 자신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 자신을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의 몸(σώμα)은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육신은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며 부활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우리 가운데 있는 부정적인 부분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그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다”고 베드로 사도가 표현합니다(벧전 3:18). 육체의 부정적인 모습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함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고 썩어질 수 밖에 없는 종국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육체는 우리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다음에도 여전히 죄의 법 아래 놓여있는 것이며, 해서 그 결국이 죽음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신 다음에도 육신으로 항상 시험의 대상이 됩니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 7장 25절에서,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짐은,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달아 알고, 해서 더욱더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3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만족하고 자랑스러운 일보다는 부족하고 후회되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음을 봅니다. 해서, 우리의 매일 매일 삶 가운데 더 많이 기도하고, 찬송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사업을 감당함으로 주님 안에서 자랑꺼리가 많이 생기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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