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1, 2013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로마서 1:11-17)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로마서 1:11-17)


1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기도하는 일도 함께 시작됩니다.
혼자 속으로 기도하는 것은 겉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할 수 있는데,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속으로 기도하는 것도 주저되거나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집안식구들이 믿지 않을 때 식구들과 하는 식사자리에서 식사 기도하는 것도 주저됩니다.
집에서는 식사 기도를 잘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레스토랑이나 학교, 직장에서는 식사 기도함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혼자 조용히 예수 믿으면 되지 뭐 구태여 공개해야 되나?’ 하는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곧잘 소리내어 기도도 잘하는데,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라고 하면 주눅이 들고 해서 기도가 잘 나오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그 가운데는 나보다 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있기에--기도함이 부끄럽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창한 기도가 잘하는 기도가 아니고 어눌하고 부족한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진실한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기도한다면 이것이 잘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기에 친척이나 친지들에게 쉽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정치 얘기나 스포츠 얘기는 쉽고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인데도 성경얘기는 잘 꺼내지 못합니다. 친척이나 친지들은 ‘나’의 삶을 잘 알아서, ‘내’가 복음을 증거할 만한 삶의 모습이 없어서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낯선 사람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과 삶이 아직도 복음을 여전히 확신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본 사람은 자기가 본 호랑이에 대해서 아직 호랑이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호랑이에 관하여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기쁨을 맛본 사람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에 관하여 자기가 경험한 기쁨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없기에 자신 있게 입을 열어 증거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으로 인한 기쁨을 경험하였지만 증거하기를 주저하기도 합니다. 이는 그 증거함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부족한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는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를 나왔고 대학시절에도 홀리 클럽(Holy Club)을 열심히 하였고 25세에 엥글리칸(Anglican) 교파의 목사로 일찍이 목사가 된 장래가 촉망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자원하여 조지아주에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제대로 증거할 수 없는 그 자신을 발견하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는 목사였지만,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이 없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가운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요한 웨슬레가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를 걷고 있다가 조용한 찬송이 흘러나오는 교회의 문을 들어섭니다. 무명의 목사가 루터의 로마서강해 서문을 읽고있는데 이를 듣고있던 요한 웨슬레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믿음의 진리를 발견한 웨슬레는 그 작은 교회 한 구석에 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후에 요한 웨슬레는 그 일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밤 8시 45분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 마음 속에 일으키던 변화를 묘사하고 있는 동안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습니다. 나는 정말로 구원을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신뢰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만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그는 동생 찰스(Charles)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 "나는 믿는다!" 하고 큰 소리로 기쁨에 넘쳐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18일 후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네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불후의 명 설교를 합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복음에 대한 증거가 이제는 부담이나 부끄러움이 아니고 기쁨이요 감격이 된 것입니다.

2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이방인 로마에는 바울이 아직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 믿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에 앞서 무명의 크리스천을 통하여 이미 로마에 복음이 증거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만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습니다.
믿는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고자 한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박해를 소망가운데 견디는 능력과 오래 참음의 은사일 것입니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이 로마에 여러 번 가기를 원하였으나 길이 막혔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고자 하나 때로는 우리의 원함대로 잘 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시는 대로 되어짐을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서도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맺게 하기를 원하였던 “열매”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이 그의 3차 전도여행 말기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들 돕기 위한 모금운동에 동참케 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로 인한 구제의 열매, 은혜의 열매였을 것입니다.
다른 이방교회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구제의 일에 동참하였는데, 바울이 바라기는 로마의 성도들도 그들의 핍박당함과 고난 가운데서도 구제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debtor, ὀφειλέτης)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왔노라고 했지만, 기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잔해(殘害)하고 죽이는 일에 동참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한 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恩惠)로 함께 하시며 그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죽음에 이르는 죄의 빚을 진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죽을 죄인들을 사랑해주셨으니 또한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진 빚은 하나님께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빚을 갚는 방법입니다.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6-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세 가지를 기술합니다:
첫째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태도(態度)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밝히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까닭입니다.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함이 하나님을 자랑함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의 성격(性格)입니다.
17절 전반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하나님의 두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선하시다’(good)는 속성과 ‘의로우시다’(righteous)는 속성이 있으신데,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속한 것이라면, 불의(unrighteousness)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불의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이십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데, 불의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 못하며, 이것이 바로 어둠이요 형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불의한 인간에게 나타남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불의한 인간이 의로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만 이를 수가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속에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우리의 행위로, 노력으로, 돈으로도, 학식으로도, 명예로도--의로와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로와질 수 있습니다.
‘의로와진다’(justified)는 말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의했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덧이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의의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죄가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의 내용(內容)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영의 눈, 믿음의 눈이 가리워져 발견치 못한 따름입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본체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반문(反問)할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굳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때에 우리가 의로와질 수 있고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는 사랑치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 하는 헛된 고백(告白)과도 갖습니다.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서 제 갈 길로 가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육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셨는데 이를 거부하고 믿지 않으며 이제까지 믿지 않던 하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미련하고 연약한 인간들은 보이게 임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임으로 의로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영생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로마서의 기본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위하여 창세기 15장 6절과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긴 바 된 것은 바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에서 의인이 삶을 얻는 것은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킬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둘을 연결하여서, 우리 인간이 의로와지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킴으로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게된다고 증거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인간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했지만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에서 우리 연약한 인간이 의인이 되는 길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믿음의 선배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담대하게 증거한 것 같이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에 관하여 좀더 말할 기회를 얻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증거할 수 있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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