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버려두시는 하나님” (로마서 1: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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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도 이를 말함입니다. 갚을 길 없는 일만 다라란트 빚진 자가 임금의 탕감함을 받았을 때 그는 마땅히 임금께 감사함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 감사를 나눔으로 표시했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는 입으로는 임금께 감사하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감사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을 때 그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당장 갚으라고 호통하며 그가 이를 갚지 못할 때 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그의 인색한 마음을 안 임금은 그의 은혜를 취소하여 버립니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Think God)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Thank God)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마음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머물기를 원하시는 곳입니다.
영국의 작가 아이작 윌톤(Issac Wilton)은 말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천국이요, 또 다른 한 곳은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사랑으로 같이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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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의 한 표현으로 경건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불경건하고 불의한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건과 의를 어떻게 헤아려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느가?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바울은 바로 그 해답을 제공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배우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악을 배우지 않고도 악을 행하는 속성이 우리 가운데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배우지 않고도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대강은 압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부연(敷衍)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리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우리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아는 힘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하기를 “저는 하나님께소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 경건치 않은 삶을 살고 불의를 범하였나이다”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앞에 핑계할 것이 없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긴 알지만, 불의한 인간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영어로는 know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뿐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것--know and accept, 즉, acknowledge--인데, 곧 인정하는 것인데 불의한 인간은 그 자신의 욕심과 교만이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되, 받아들이지 않고, 입으로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한 입술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해서, 22절에 기록된 대로, “스스로 지혜있는 척하나, 우준한 자가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썩어질 것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되 ‘내어버려두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를 넓은 가슴으로 맞아주시지만, 그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어 하나님 대신에 썩어질 것을 계속 찾을 때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어버려두사’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했고, 26절에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사” 했고, 28절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했습니다. 해서, 인간의 죄와 허물은 점점 더 심화해갑니다.
24절이하에서 바울은 “내어버려두사”라는 말과 함께 인간의 죄를 세 구분했는데,
첫째는 24-25절에 있는 대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조물주--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권력을, 돈을 더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26-27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순리(順理)대로 살게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순리를 버리고, 역리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한 쌍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여자와 여자가 혹은 남자와 남자가 서로 결합하고자 하는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잘못을 범하면서도 이를 당연시 여길 뿐아니라, 합리화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러한 성향을 갖고 태어났는데 생긴 모양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 무슨 잘못이냐? 일리있는 반박같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맞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 태어날 때부터 악이 있다고 그 악한 생각과 마음을 당연시 여기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악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리듯이 순리를 거스리고 역리대로 살고자 하는 성향의 악도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아뢰고 이를 없이하여 달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28-31절에 열거된 기타의 모든 합당치못한 나쁜 행실과 마음입니다. 이러한 악은 인간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그 상실(喪失)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중의 심화된 잘못으로 인간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그 스스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사형(死刑)’입니다. 그런데 악한 인간은 자신들이 죽을 자들인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와 삶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도 부추기어 자기와 같은 불경건과 불의를 행하게 만들고 그 일을 행하는 그들을 옳다고 하므로 집단적 죄를 범하게 하고 이로서 위안(慰安)을 삼고자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인간들은 우리를 돌이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3
오늘을 사는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십니까? 잘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사모하며,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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