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로마서 2:1-16)
1
돼지 열 마리가 소풍을 가기로 결정하고 먹을 음식을 풍성히 장만하여 집을 나섭니다. 가는 길에 개울을 만나 조심조심 한 마리씩 개울을 건넙니다. 더 이상 건너올 돼지가 없자 그들은 무리의 수를 헤아립니다. 아무리 헤아려도 아홉 마리뿐입니다. 그들은 수십번 반복하여 교대로 헤아려 보지만 그들의 숫자는 아홉 마리뿐입니다. 돼지들은 ‘혹시 없어진 친구가 있나?’ 살펴보지만 없어진 친구는 없는데 숫자는 여전히 아홉입니다. 그들은 소풍의 즐거움을 맛보는 대신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개울가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합니다. 개울을 건너기 전에 그들이 열마리인 것을 안 것도 아마 그들 스스로 세어서 안 것이 아니라 같이 소풍을 떠나지 않은 다른 돼지가 세어서 알려준 것일 껍니다. 그들 가운데 한 마리가 부족한 것은 자신은 그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은 까닭이며, 이러한 셈을 ‘돼지셈’이라고 합니다.
한국사람들의 언어습관에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의 경우에는 다 ‘I,' 'my'로 표현될 것들인데, 한국사람들은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공동체, 연대 의식이 강함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부정적으로 보면 ‘내’가 빠져 나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며, ‘나’는 책임을 면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잘 되었으면, 그 여러명 가운데서 특별히 수고한 유집사님은 ‘내’가 그 일을 성공적으로 끝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이 있는 듯이 떠벌립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잘못되었으면, ‘우리’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책임소재를 약화시켜버립니다. 목사님이 설교시간을 통하여 혹은 광고시간을 통하여, ‘우리 모두 교회를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모이기에 힘씁시다’ 힘주어서 말하지만, 그 우리 모두 가운데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서 혹은 자연스럽게 빠져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데, 우리 교회가 냉냉하대요’ 말하는 오집사님은 자신은 우리 교회의 구성원이 아닌 듯, 따라서 자신은 그 냉냉함의 책임이 없는 양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렵다구?!’ ‘그래, 우리 모두가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신하고, 헌물해야지!’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말고 다른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와 ‘나’를 혼용하는 한국사람의 언어습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와 ‘나’의 사용 자리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할 상황에서는 ‘나’란 말을 더욱 더 자주 사용하고, ‘칭찬꺼리나 기쁨꺼리’가 되는 상황에서는 ‘우리’ 혹은 ‘다른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은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할 기독교의 기본교리와 실천사항들을 설명합니다. 1-8장이 교리부분이요, 9-11장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위한 괄호안의 사항이고, 12-16장이 실천부분입니다.
바울은 ‘이신칭의(以信稱義)’--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음--의 교리를 전개함에, 1:1-17에서 먼저 ‘이신칭의’의 로마서 주제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설명해나갑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인간의 죄성을 먼저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밝히 보여 알게 하셨는데도,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져 하나님으로 점점 멀어집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부끄러운 욕심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주시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 판정으로서의 죽음은 ‘존재의 정지’--‘영면(永眠)--영원한 안식’이 아닙니다. 심판의 결과로서의 죽음은 ‘영원한 형벌--영원한 고통’--‘영원히 죽는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닌 두려움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지만 동시에 ‘선하시기에’ 인간이 이러한 고통 당함을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심판하시는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한 사람도 예외없이, 우리가 빼기를 바라는 나까지도 포함하여--이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하였습니다. 바울은 2:1-16에서, 이러한 인간의 죄의 종국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17-3:20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모든 인간--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심판의 세 가지 속성을 증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according to truth) 되어집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함으로서 자신은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하지만 진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그러한 판단의 말로 인해 그 사람을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냉냉해요”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도 그 냉냉함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너부터 잘해” 하실 것입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만, 그렇다고 목사님은 ‘그가 증거하는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좋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개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했고, 3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했습니다.
죄(罪)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4절에서와 같이,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으로 그가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가 끝내 돌아오지 않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이거나,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하는 처사입니다.
5절에,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잘못 가운데 즉각 즉각 하나님께서 징벌하지 않으심을 보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징벌이 없다고 주장하며 더욱 더 죄된 생활을 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이 얼마나 큰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큰 줄 아시기에 될 수 있는대로 오래 참으심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모든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며 그의 과거 죄와 현재 죄와 미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시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 쌓여가 마지막에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진리대로 된다고 함은 하나님의 심판선언이 거짓이 아니라 참이며, 신실하며, 영원하며, 반드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판단하시되, 그 행한 대로(according to his deeds) 심판하십니다.
7절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절에,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오래 참음으로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행한 대로 이루어지는 공정한 판단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외의 방법으로,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입을 육체가 없습니다.
행한 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는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공력심판 혹은 상급심판에 원용되어지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부끄러운 구원과 상급이 있는 구원이 그것입니다.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환난과 곤고의 징벌을 주실 것인데,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유대인과 헬라인 모두가 그 대상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공의로(according to impartiality) 판단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판단은 공평하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없이 모든 인간에게 행해진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없이 범죄한 이방인은 율법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하나님을 알만한 것에 따라서 판단하시고, 율법이 주어진 유대인은 율법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들려졌다고 해서 그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인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함은 하나님의 심판이 율법을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나 구별없이 공의로 모두에게 임함을 밝히고자 함이지, 율법이 주어진 자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함은 율법을 받지 못한 자나 받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그 스스로는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마음에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산 사람들이나, 과거나 현재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겸손하고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14-15절에,“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그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했습니다.
원용하여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와 같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이와같은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이 사람이 온전한 까닭이 아니요 하나님의 긍휼이 그에게 나타난 까닭입니다.
인간들의 죄와 허물은 은밀한 가운데 다른 사람이 모르게 저질러지는 것 같지만, 우리 인간의 심중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되 진리대로, 행한 대로, 공의로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을 하시는 날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3
우리 가운데 아직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자신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까? 요한1서 1:10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 보다는 나를 더 나타내고자 합니까? 교만의 마음을 버리시고 자신의 마음 속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직 죄사함의 확신이 없으십니까?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서 죄사함 받음의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