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 (로마서 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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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말 ‘불’과 영어 ‘화이어(fire)’가 전혀 무관(無關)한 것처럼 보이지만, 몇 개의 언어를 살펴보면 서로 조상이 같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 ‘화(火)’와 ‘화이어(fire)’는 좀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불어 ‘훼(feu)’와 독일어 ‘호이에르(feuer)’, 거기에 결정적으로 헬라어 ‘푸르(πύρ)’를 연결시키면 우리나라 말 ‘불’과 영어 ‘화이어(fire)’의 어원이 같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神)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이름도 사실은 헬라어 푸르(πύρ)가 불에 해당하는 단어임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이름이 아닙니다. 이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신들의 신 제우스(Zeus혹은 Jupiter)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에는 바위에 묶였다가 독수리에게 간(肝)과 내장(內臟)을 파먹혔다고 합니다. 그보다 앞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하여 판도라(Pandora: 인류최초의 여자)에게 상자를 들려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는데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해악(害惡)이 나오고 그 상자 속에는 희망(希望)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보는 해악(害惡)과 절망(絶望), 인류 불행(不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기원이나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들과 인간들의 사랑이 독창적(獨創的)인가 하면 기존(旣存)에 있었던 성경속의 ‘죄악(罪惡)의 기원’을 빌어서 변형(變形)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연유를 세 가지(three accounts)로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 설명중 둘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셋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의 심화(深化)를 의미합니다.
첫째 설명은, 정경(正經)에는 나오지않고 위경서(Pseudepigrapha)중 하나인 에녹2서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의 근원적 태초, 하늘 위의 하늘에도 하나님 이외에 아무 존재가 없을 때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태초 사이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천사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들 중 대천사라고 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이조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도승지에 해당하는 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미가엘, 가브리엘 등도 이에 속하는 천사들입니다. 그 대천사중에 하나인 루시퍼(Lucifer)라고도 하는 사타나일(Satanail)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다보니까 마치 나중에는 자신의 권능이 하나님만큼이나 되는줄 알고 다른 천사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패하여서 공중으로 내어쫓김을 당합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대항한 이 사타나일에게도 사랑을 베푸셔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중의 권세를 그에게 주십니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여섯 날동안의 창조중 둘째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이 빠진 까닭을 하나님이 이 궁창 하늘--곧 공중의 권세를 이 사타나일에게 주실 것이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며 흡족해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합니다. 천사의 타락이 인간 타락(墮落)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둘째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 둘째 설명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창세기 3장(참조: 위경서, 아담과 이브의 삶)에 나오는 사단의 다른 형태(agent)인 옛뱀이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음입니다. 이브만 먹을 뿐아니라 아담도 함께 먹음으로 둘이 선악을 구분하게 되고 그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을 두려워하여 숲속에 숨었습니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때에는 죄짓는 일이 적었는데, 인간이 선악을 알면서부터는 선을 행하려 하지 아니하고 선으로부터 먼 악을 더 행함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더 행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울은 이를 죄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19-21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셋째 설명은 노아의 홍수로부터 백이십년전의 사건으로서 창세기 6장에 그 개략(槪略)이 나오고 위경서중 에녹 1서(1-36장)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창세기 6장 1-2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繁盛)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에녹 1서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아즈(Semyaz)와 아자젤(Azazel)이라고 하는 대천사의 지휘하에 하늘나라의 200명의 파수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지상을 굽어 내려다보니 사람의 딸들인 여자들이 아름다우매,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에게 화장하는 법을, 또 세상의 남자들에게는 전쟁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서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창세기 6:3에, 해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肉體)가 됨이라.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노아로 백년에 걸쳐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백년의 시간을 주신 것은 노아의 순종을 보시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그간에 혹시 ‘인간들이 그들의 패역에서 돌이킬까’ 보시기 원함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함을 아시기에 창세기 6:5-6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罪惡)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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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罪)가 인간세상에 들어와 번짐은 마치 잉크 한 방울을 맑은 물이 담긴 물병에 떨어뜨림과 같습니다. 검은 잉크 한 방울은 처음 떨어진 곳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곧 물병 전체로 번져서 물병의 물을 다 검게 만들어 버립니다.물병을 흔들 때 그 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 삽시간에 물이 검게 변합니다.
본문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최초로 죄를 지은 사람은 이브였지만, 이브도 사실 따지고보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사람이므로 아담의 안사람, 속사람--곧 아담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 아담이란 이름은 ‘한 사람’이란 뜻인데, 땅이나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אדמה)’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창세기 2장 7절의 기록대로 흙으로 지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범죄함으로 그들은 지상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대로, 죽어 그들의 본래 모습이었던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도 인생의 이러함을 3장 20절에서,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했습니다. 흙으로 말미암았지만 아담과 이브의 범죄함이 없었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죄가 세상 가운데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이 사망의 지배하에 놓였었는데, 로마서 1장, 3장에서 바울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의 한 의(義)가 모든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인간들을 징계하시고 심판을 선언하시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이를 귀히 보시고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시고 그들을 흩으시고 포로로 끌려가게도 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떠나 범죄함으로 이스라엘을 징벌하실 때에도 다윗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원래 작정하신 징벌을 줄여주셨고,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선포케 하셨지만 그들의 회개함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하신 벌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범죄함으로 그의 신--성령(聖靈)을 거두시고 그들에게 죽음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에게 내려진 자신의 예정된 심판을 중한 것으로 여기시고 이를 면하게 할 방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마련하실 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해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설교말씀한 대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치 아니할 때에,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아직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에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罪)와 사망(死亡)이 세상(世上)에 들어왔는데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恩惠)와 생명(生命)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문둥병자일 때, 아들은 원치 않지만 문둥병자로 태어나고, 그 아들의 아들도 문둥병자요, 그 아들의 아들의 아들도 자기의 원함과는 상관없이 문둥병자로 태어나 세상을 살다가 죽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저주아래 놓인 문둥병자와도 같이 소망(所望)없는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한 방편을 주셨는데, 그것은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죽음이라는 저주 아래 놓인 질병을 고쳐주시는 대신에 아들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세우시고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나음을 얻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로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게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는 불뱀에 물린 자마다 낳음을 얻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이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생(永生)은 우리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와 구원은 특정한 그룹에 속한 사람만 위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모두가 죄인이요 원수였던--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체적이요 보편적인데도 그 은혜의 자리에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합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란 그리스도를 그 마음 속에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되고 생명에 이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가입으로 말미암아 범죄가 더해진다”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의 법의 가입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범죄가 더해졌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범죄를 더 많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3장 20절에 이른 대로,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깨달음을 더욱 더하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했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이 큽니다. 5달러를 빚진 사람은 5달러를 갚지않아도 된다는 말에 그렇게 큰 기쁨이 넘치지 않을 것이지만, 10만달러를 빚지고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차라리 죽을까 생각하고있던 사람이 10만달러를 갚지않아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아마도 새로 태어나는 희열(喜悅)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넓이와 깊이는 인간의 죄의 어떠한 넓이와 깊이보다도 넓고 깊어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다 감싸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은 무한하게 넓어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품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모든 사람들을 다 품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마치 화창한 날에 내려쪼이는 햇빛과도 같습니다. 그 햇빛을 받을 권이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피함은 햇빛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피하는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마치 3년 6개월의 가뭄 후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습니다. 이 하늘로서 내리는 단비를 맞으며 갈증을 해소할 권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 단비를 피하여 계속 목이 갈함을 느낌은 그 사람의 우준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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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톤 헤스톤이 주연한 영화 ‘벤허’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시고 힘없이 나약하게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낮에 해가 구름에 가리우고 캄캄하여지고 천둥번개가 치고 세찬 비가 내립니다. 저주의 병 문둥병으로 소망없이 죽을 때만 기다리던 벤허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이 비가 쏟아질 때 그들은 문둥병의 나음을 입고 저주에서 풀리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이른 바와 같이, 저주아래 놓이신 바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영생(永生)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 귀한 체험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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