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2, 2013

“아브라함의 의(1)” (로마서 4:1-15)

                                              “아브라함의 의(1)” (로마서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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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다윗에게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특별히 우리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중에 다윗처럼 살인 교사(敎唆)의 죄와 간음의 죄를 저지른 사람이 없고,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셨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회개함이 있어서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허물을 덮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당시에 아브라함보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더 선한 삶을 산 사람도 있었을 것이요, 다윗의 당시에 다윗보다 더 선한 삶을 산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다윗을 축복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윗에게 하나님께 늘 매달려 간구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궁중에서도 기도하고, 산 속에서도 기도하였습니다. 평안할 때도 기도하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믿었던 신하에게 쫓기는 환난가운데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기도의 은사가 특별하였던 사람 같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기도의 은사가 있음을 발견하고, 주옥같은 시편들을 읊조림으로서 개발하고, 자기의 여러 다른 형편가운데 그의 유일한 무기요 방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왕이었지만, 그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더욱 매달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믿음보다도 앞선 순종함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귀히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할 때, 땅과 민족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아내와 조카와 다른 가족들과 함께 갈대아-우르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떠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란쯤 이르렀을 때 그곳의 삶이 편하기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순종함으로 본토 갈대아-우르를 떠났지만, 200세 가까이 된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먼 길을 계속 간다는 것이 마음이 아파 하나님의 지시하실 땅에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하란에 머문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란에서의 데라의 죽음을 11장 32절에서 기록하고, 12장 4절에서 아브라함이 75세때에 조카 롯과 함께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12장 5절에서는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기를 원하셨던 곳이며, 우리 신약백성들이 사모하는 하늘의 가나안의 예표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아내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기는 장막 뒤에 있었던 사라 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청종할 때,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11절에서,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100세 때에 얻은 아들 이삭을 그의 나이 10여세쯤 되었을 때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하심에 의혹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이삭을 받쳤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내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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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예를 사용합니다. 15절까지의 전반부에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해석하고, 이 아브라함의 의가 어떻게 신약시대의 모든 사람--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말함은 그 당시에 칭의와 구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과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행위와 할례와 율법지킴이 구원의 요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즉, 믿음위에 행위가, 할례가, 율법이 더 있어야 의로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지라 선언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3장 31절에서 바울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한 행위가,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가, 율법지킴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선한 행위나 세례나 율법지킴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의 표시요 결과이지 요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남 다른 선한 행위가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도 겁이 많아 거짓말하고 아내를 남에게 줌으로 목숨을 부지하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를 의로 여기시되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의 선한 행위가 없는데도 의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를 의로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한 잘못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 지적받았을 때 시편 51편으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이에 응답하여 그의 죄를 사하여준 하나님의 긍휼에 시편 32편에서 감사의 시로 찬양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7-8절에서 이를 인용합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한글성경에서는 불법과 죄라고만 표현되었지만 시편 32편을 담고있는 히브리 성경은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므로 우리의 다양한 여러 모양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데 철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탕감하고 죄의 명부에서 삭제하여주실 뿐만 아니라, 가리우시고 (혹은 덮으시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혹 드러날까 우리가 회개한 죄에 대해서는 죄로 여기시거나 인정조차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법한 행위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80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가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언약의 표를 한 것이 99세이므로, 약 20년쯤 전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신약시대 우리에게 세례에 해당하는 할례를 받기 이전에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바울 시대 믿음이외에 할례를 받아야지만 구원에 이른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에 반박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1년쯤 뒤 시내산에 머물 때에 주신 것입니다. 해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600년전의 일이므로 율법으로 의로와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근거없음을 지적합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3장 1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도 그들의 죄와 허물로 하나님의 심판하에 놓인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반문하였었습니다. 그는 답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맡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유대인의 나음이요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 해답이 3장 20졸에 나와있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면, 오늘 15절의 뜻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라고 함은 우리가 율법을 읽음으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우리는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자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이 없을 때 우리에게 죄의 범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의 범함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해서, 율법이 없던 이방인도 죄 아래 놓였다고 3장 9절이하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이 그에게 율법이 있어서가 아니요, 그가 할례를 받아서가 아니요, 그의 행위가 의로와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의로 여기신 것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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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국인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설교하러 가시게 되었는데, 그 교회의 비서(secretary)가 전화로 설교 제목을 물었습니다. 해서, 이 목사님은 시편 23편을 설교할 것이기 때문에 “The LORD is my shepherd”(=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secretary)가 반문합니다: “Is that all?”(=그뿐인가요?) 목사님은 짤막하게 대답합니다: “That's enough”(=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설교할 주일이 되어 그 교회로 가서 주보를 받아본 목사님은 빙그레 미소를 짓습니다. 주보에 적힌 설교 제목은 “The LORD is my Shepherd. That's enough”(=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그것으로 충분하네) 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제목에 만족하여 거기에 합당한 설교를 은혜롭게 잘 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깨닫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에 이를 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제가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은 제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님을 압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여 나는 말에 능치 못한 자라.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기피하는 말이 서투른 모세를 부르시고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딸려 보낸 것같이 말이 능하지 못한 저를 목사로 사용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저희 말이 그 (바울의)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중하고 힘있는 편지를 쓰는 사람도 바울이요, 그들이 몸으로 대할 때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은 자도 바울임을 알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데서 온전하여진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을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되 우리의 한계를 깨달아 인정하고 이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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