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8, 2013

“유대인에 대한 심판” (로마서 2:17-3:8)

                                             “유대인에 대한 심판” (로마서 2:17-3:8)   

                                                                               1
사람의 건강을 점검하는 기준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밥을 잘 먹고, 먹은 것 잘 소화(消化)하여 배설(排泄) 잘 하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문제가 있으면 건강치 못하다는 적신호(赤信號)이요 해서 의사의 진단(診斷)을 받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도 몸이 건강해야지 믿음의 생활을 잘 할수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고 괴로우면 교회에 나오는 것도 남을 도와주는 것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만사가 다 귀찮기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육신의 건강 위에 믿음이 건강(健康)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건강 진단법도 육신의 건강 진단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밥이 맛이 있고 잘 먹혀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은 재미있는 소설이나 영화나 텔레비젼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맛있게 느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저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 “너무 어려워.” “목사님의 설교가 오늘따라 왜 이리 긴거야? 집에 빨리 가야 하는데.” 하는 소리가 나올 때 우리의 믿음은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주일날 하루 교회 나가는것도 겨우 가는 것인데 뭐, 주중에도 교회에 나오라고 해?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인줄 알아?” 하는 불평이 내 안에 있을 때, 나의 믿음은 병들어 있습니다.

육신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진 밥 된 밥, 더운 밥 찬 밥, 흰 쌀밥이나 깡보리 밥이 다 맛있는 것 처럼,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도,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전도사님의 설교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 맛있고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밥투정 반찬투정을 하는 사람치고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실 때,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되던 시기에 여러분은 분명히 성경을 가까이 대하시고 목사님의 말씀이 은혜롭고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지 않던 때는 성경도 멀리하고 목사님의 설교도 지루하고 재미없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건강한 목회자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 가정이 평안하고, 사업이 잘 되고, 육신이 건강하고, 믿음의 생활을 잘하는 분들이 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믿음이 떨어질 때 입에서 교인들에 대한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이 건강한 교회는 교인들과 목회자가 서로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교회입니다.

둘째로,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잘 소화하고 배설합니다. 말씀의 밥을 성경을 통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맛있게 먹은 건강한 사람은 말씀을 잘 소화합니다. 위에 들어가서 골고루 잘 다져집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말씀의 밥이 맛이 없어 식사를 거르거나 조금 밖에 먹지 못하고, 먹었다 하더라도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여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장애를 일으키지만, 건강한 사람은 소화가 잘 되어 거뜬합니다.
건강하다는 증거는 내가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먹은 것을 잘 소화하여 필요한 것은 신체 각 부분으로 골고루 보내고 그 기운으로 직장에서 건전한 직장생활을 하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필요 없는 것은 배설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먹기는 잘 먹었는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곧 소화불량이 걸리거나 혹은 비정상적인 비만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식사를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식사를 맛있게 잘하였는데, 믿음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조만간 소화불량에 걸려 더 이상 음식이 맛이 없게 되거나 음식이 맛있어서 계속 먹기는 하지만 사용할 때가 없어서 믿음의 활동을 못하는 바람에 믿음의 비만현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해서, 머리만 살쪄서 비판적이 되거나 몸이 살쪄서 종국에는 전혀 믿음의 활동을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결과를 가져옵니다.

셋째로, 잠을 잘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건강한 사람도 중단없이 밥을 먹고 활동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수면이 필요하듯이 믿음의 사람도 자신의 영혼을 쉬게 하여 내일 또 건강한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들 가운데는 믿음의 밥을 먹고 소화시키고 활동하는 것이 좋다고 중단없이 하다가 단명(短命)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慾心)이요 자기의 의(義)를 드러내고자 함에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2
바울은 2장 전반부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지 못하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 때,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주님의 날에 나타날 것인데, 그 심판은 진리대로, 행한 대로, 공평하게 나타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없이 모든 불의한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그들이 택함을 받은 자로서 율법을 받은 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율법의 정신을 무시한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산다고 했지만 이는 그들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지만 구원(救援)에 이를 것이라는 잘못된 이해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해서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되 마음에서는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극단적으로 말씀하시지만 기실 잘못을 범하는 주체는 눈이 아니고 손이 아니고 우리 인간의 중심인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범죄케 하는 마음을 제하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2장 21-2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힐문(詰問)합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반문할 것입니다: “내가 언제 도적질하고, 내가 언제 간음하고, 내가 언제 신사 물건을 훔쳤느냐?” 그들이 겉으로는 설령 그러한 일을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고 음욕을 품었다면 그와같은 일을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왜 합니까? 이는 유대인들의 율법지킴과 하나님을 경외함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뿐 마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함입니다.

25절에서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헌신은 형식적으로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살고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율법의 정신을 범할 때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28-29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할 것은 신약시대 바울이 처음 말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새를 통하여 율법을 주실 때에 이미 말씀한 것입니다. 신명기 10:16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했습니다. 또, 예레미야 4:4에,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이 중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 중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으면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참 유대인됨은, 우리의 참 하나님의 택한 백성됨은 우리가 교회 교적부에 등록되어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령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인치셨느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문은 사람의 일로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령으로(in the spirit) 하나님께 속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3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질문합니다. 유대인도 다른 이방인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고 유대인의 율법지킴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므로 유대인의 나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이 범사에 많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우선적인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심은 그들이 잘났거나 의로와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있지만 자랑할 것이 없음은 하나님의 긍휼인 까닭입니다.

3절에 “어떤 사람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선하시기에 그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이 다 구원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에는 정원(定員)이 없습니다. ‘아무나 와도 좋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예복을 입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을 알리고 또 알렸는데도 믿음의 예복을 입지않고 와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은 미쁘시지 아니하고 선하지 아니하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구원하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종국에는 모든 인간이 다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만인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분명히 모든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whosoever)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까닭이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미쁘심(=the faith of God), 신실하심을 폐한 까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여전할 때, 그들을 징계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할례를 받게 하시고 후에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심은 그들에게 무거운 의무감을 지우시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속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면서 겉으로만 율법지키는체 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가 불의를 행하는 것도 좋고,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가 거짓말하여도 좋고,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악을 행하여도 좋다’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분이 아니고, 그 스스로 의로우시고, 참되시며, 선하신 분입니다.

                                                                               3
현재 믿음의 생활을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체면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의를 행하고 신앙의 삶을 살고있지만,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있는 건강치 못하고 병든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믿음이 병든 것을 알면서도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믿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참 할례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참 유대인의 마음으로 우리의 신령한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