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 2014

“그리스도께서 나뉘었느뇨?” (고전 1:10-17)

                                       “그리스도께서 나뉘었느뇨?” (고전 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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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이 육신의 부모의 사랑에 뒤지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그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모든 부모의 자녀사랑의 모범일 것입니다.
나를 어버이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자식이 아니요 남의 자식인 것과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는 인간은 하나님에게도 남--곧 어둠(사단)의 자식입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원수관계였던 남의 자식이 그를 어버이라고 부르기를 원할 때 그를 자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지만,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분을 아무리 비방하고 미워하던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돌이켜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두 팔을 벌리시고 크신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양자(養子)로 받아들이시되 친자식과 다름없이 여기시며, 우리의 허물을 전혀 묻지도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애들을 키우다 보면 하찮은 일로 서로 다투는 아이들로 속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면 순간 말을 듣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또 티격태격 싸웁니다. 어릴 때 사소한 일로 다투던 아이들이 커서는 또 다른 일들로 다투며 등을 돌립니다.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이 동일한 부모밑에 형제·자매로서 잘 지내는 일인데, 그들의 그렇치 못함이 부모를 속상하게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이 후에는 부질없는 다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분(憤)이 나있을 때에는 나의 주장이 주님을 가장 위하는 일 같았던 것도, 지나고보면 공연히 나의 목소리를 교회에서 높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이러한 다툼의 모습들을 보시면서 육신의 부모와 같이 속상해 하실 것입니다.

한국의 장로교의 교파가 크게는 세 개로 나뉘어져 있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수십개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는 극보수요, 보수요, 중도보수요, 중도진보요, 진보요 주장하며 자신들이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며 성경에 따른 삶을 산다고 하지만, 또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사람들하고는 어깨를 같이 할 수 없어서 갈라섰다고 하지만, 기실은 자기 목청을 높이다가 관철되지 않아서, 또는 총회장 선거와 관련하여서 갈라서고 또 다른 파를 만들어낸 경우가 많음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분파주의, 분당주의를 잠잠히 지켜보시며 이런 일을 자행하면서도 마치 자기만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양 소리치는 우매하고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서 죽으신 주님은 우울(憂鬱)하시고 근심하실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같은 연배의, 나와 같은 형편과 조건과 성향의 사람들만 있으면 나의 믿음생활이 즐겁고 성장할 것 같습니다. 설령 이러한 환경이 마련되고 나의 믿음이 평탄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믿음의 성장이 아니라 환난과 인내와 연단의 과정을 겪지 못한 믿음일 뿐입니다.
교회에 여러 종류의 사람을 주심은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가시덤불과 폭풍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셨던 그 하나님께서 교회에 나와 전혀 다른 사람, 나를 비방하는 사람을 허락하시고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으로 나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이를 감당하는 사람은 그의 고난 가운데서 ‘오래참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번제로 주셨으며, 교회 안에 나와 다른 사람, 나를 비방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던 나를 사랑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통 상실해 버리고, 오직 불의한 자의 성품을 지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되,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독생자 그리스도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6, 8, 10).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감격이 내게 있을 때, 설혹 나를 비방하고 뒤에서 수근수근하는 교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사랑함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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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序論) 부분(4-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장점에 대해서 먼저 언급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구원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와 지식이 있었으며 이를 전파할 수 있는 언변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으며 성령의 각종 은사가 고루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으며 그것이 그들 가운데 다툼과 분열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막바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10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먼저 권면합니다.
다 같은 말(τὸ αὐτὸ λέγητε=the same word)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다른 생각과 주장을 갖고있는 사람의 말이 같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에 합당한 말을 할 때 그들은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ἐν τῷ αὐτῷ νοῒ καὶ ἐν τῇ αὐτῇ γνώμῃ) 온전히 합하라”고 말씀합니다.
‘뜻’으로 번역된 그노메이(γνώμη)는 ‘의견, 결정, 의지, 의향’의 의미를 갖고있습니다.
우리 서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같은 마음과 같은 뜻(=결정)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나의 마음과 나의 의지는 접어두고 그리스도의 마음과 의지를 가질 때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1장 27-28절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 μιᾷ ψυχῇ) 협력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한 마음과 한 뜻” 보다는 “서로 다른 마음들과 서로 다른 뜻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이 교회를 개척하여 일년 6개월 동안 사역한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11-12절에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分爭)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했습니다.
바울이 몸은 고린도 교회를 떠나 있으나 마음은 항상 그 교회에 머물고 있으며, 그 교회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었는데 인편에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 안에 심한 갈림이 있고 이 갈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조각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어떤 사람은 개척자인 바울을 늘 못잊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설교 잘하던 아볼로만이 옳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게바--베드로를 따른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자기는 그리스도께만 속한 자라 하며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연합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반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은 간격을 없애고 막혔던 담을 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 놓였던 벽을 허시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였던 건널 수 없는 강의 다리가 되고자 함이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이하에서 바울은 “그(=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유대인과 이방인, 사람과 사람)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절이하에서 하나되는 복음을 강조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5-6)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하나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요,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도 한 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한 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그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심한 갈림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빙자한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서 누구에게 세례 받았다 함이 아마도 분열에 일조(一助)를 담당한 것 같습니다. 해서, 바울은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세례 주지 않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례 줌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가 분열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강조입니다.
14-16절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인데, ‘누구에게 세례 받았나’ 하는 것이 교회 내에 갈림을 있게 한다면, 이는 바울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며 주님을 근심시켜드리는 일입니다.
세례를 집전하는 사람이 바울인가 아볼로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세례를 베풂이 바울의 이름으로도 아볼로의 이름으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이기 때문입니다.
또 세례 받는 사람은 세례를 주는 사람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례의 주체되시는 그리스도와만 연합합니다. 로마서 6장 5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사람이 되었는데, 아직도 우리가 나누기를 좋아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옛사람으로 남아있다는 반증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를 줌도 중요합니다. 이는 세례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겠다는 대중 앞에서의 선언이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함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도간의 연합이 아니라, 오히려 갈림을 초래하는 일이 된다면 그러한 갈림의 세례를 주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나 바울을 보내심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선언이요 표시로 사용되어질 때만 그 세례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갈림을 조장할 때 그 세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듭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인간의 철학이나 윤리나 지혜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을 전함으로 교회 내에 ‘나는 누구의 철학이나 사상을 따른다’는 갈림을 초래한다면 이 역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진리를 헛된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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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에 여러 가지 환경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나이와 성이 다르고 믿음의 정도가 다른 교인들이 있음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서로 다른 모습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으로, 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기뻐받으십니다.
교회 안에 분열보다는 일치가, 다툼보다는 화목함이 많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고 돌아보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리할 때 우리는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마음을 바로 깨닫고 헤아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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