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14, 2014

“하나님의 지혜” (고전 2:6-9)

“하나님의 지혜” (고전 2:6-9)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니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
장자(壯者)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보면, “하늘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지혜에 도달한 사람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자연 그대로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지식이 아는 바를 가지고 그의 지식이 알지 못하는 바를 키워 나가니, 그렇게 타고난 수명을 다하면서 중도에 일찍 죽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바로 지혜가 훌륭한 탓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자(壯者)의 하늘은 옥황상제, 혹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자연 또는 천지만상의 조화에 가까운 뜻이지만,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라고 해석해도 뜻이 잘 통합니다.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지혜에 도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은 모르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뜻은 헤아려 알려고 노력하고 알지 못하더라도 말씀에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있나 하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는 일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고,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더욱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혼란케 하며 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로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때로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자,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데도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윤리적으로 믿지않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축복해주시는 것같음이 우리를 속상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합니다.
보통사람들은 IMF로 실업자의 수가 이미 200만이 넘어선 사회 속에서 고통스럽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 나라의 장관 부인들은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없이 떼를 지어 고급의상실들을 전전하니 이것이 어찌 혼란을 주지 않습니까? 그 장관 부인들의 상당수가 교회 신자들임에 더욱 아연해집니다.

하나님이 잘 믿는 사람들에게는 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다 확실하신 세상 축복도 내려주시면 그 하나님을 잘 믿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바램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계신지 안계신지 묵묵무답이십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일을 참으로 열심으로 자신의 일보다 더 돌보는 사람들을 찾기가 힘듭니다.
믿음을 갖되, 할수만 있다면, 구원에 간신히 턱걸이 할 정도의 믿음만 갖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 삶이 끝난 다음에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칭찬이나 상급은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믿음이 과연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겠습니까?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죄사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소망 중에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은혜를 베푸신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며 몸이 따라가든 따라가지 못하든 주님의 일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히 인도하시며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셨지만 이스라엘의 믿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생활이 하나님을 위하여 진정으로 헌신하는 것이었습니까?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그렇지 못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들 가운데 분명히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공급하여 주시고 옷과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는데, 어찌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렇게 불신과 불경건의 모습으로 살아갔습니까?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문제가 아니요, 인간 마음 가운데 항상 도사리고 있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그 교만이 일이 되어짐의 과정과 종국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 사람의 판단대로 되어지지 아니할 때 이 미련한 인간은 지혜의 하나님을 향하여 불신(不信)의 원망을 발하고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이 항상 인간의 예상대로, 바람대로, 공평의 원칙대로 행하셔야지만 ‘참 하나님’이 되십니까?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모습을 보이실 때나 보이시지 않을 때나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은 있어왔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낮추어 절대주권의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항상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순종은 하나님을 항상 잘 이해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모습을 밝히 보기에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에, 나의 뜻이 그분과 다를 때에라도 그가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지금은 나의 형편이 고통과 슬픔이어도 그가 결국에는 나를 평안과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을 알기에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세상 형편이 되어짐을 보면서 하나님을 얼마만큼 믿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일은 얼마만큼 감당하여야 할 것인가 계산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지혜자’를 원하십니다. 미련한 지혜자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이나 하나님의 눈으로는 순종의 믿음이 있는 지혜자입니다.
구약의 노아를 봅니다. 그는 당시를 산 세상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정확히 얼마 뒤에 세상을 멸하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에게 “세상 끝날이 이르리니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노아가 커다란 방주를 지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웃음꺼리로 삼았습니다. “이 미련한 놈아 왜 이 쓸 데 없는 일을 하느냐?”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보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방주를 지어갔습니다. 때로는, 가족들도 그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살던 곳이 바닷가도 아니고, 하늘이 청청하기만 한데 이 방주는 무엇에 쓸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아 자신도 때때로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음 속에 의문을 던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순종합니다.

그렇게 100년이 흘러갑니다. 100년에 걸쳐서 노아는 미련스럽게 온갖 조롱과 멸시 속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방주를 완성하고, 그 방주는 미련한 노아와 가족을 구하는 구원의 표시가 되고 그를 조롱하던 사람들은 모두 멸망받습니다. 노아 당시에도 사치하고 부정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세상에는 공평보다는 불공평이 많았고 윤리보다는 비윤리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보는 것보다 더 혼돈스러웠던 세상이었습니다.
100년을 기다리신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미련하게 산 노아를 구원하시고, 세상의 이치에 밝은 삶을 살아간 당시의 사람들을 물로 멸하신 이 간단한 성경의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가운데 공평과 정의보다는 불공평과 비리가 행해지는 이 세대이지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또 어떤 삶의 모습으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할지는 너무나 자명(自明)해집니다.
노아가 1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조롱과 천대 속에 방주를 만들어 갔듯이, 우리는 일생동안 우리의 구원방주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미련한 지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약백성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비롯됩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믿음을 백년도 채 못되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지어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내가 있는 것같이 느낄 때뿐 아니라 없는 것같이 여겨질 때에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2
6절에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온전한 자들 중에서(ἐν τοίς τελείοις)”는 영어 번역으로는 “among the mature (people)" 혹은 ”among the perfect (people)"인데 여기서 “온전한 자들”이라고 함은 ‘성숙한’ 혹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어떤 자들로 여기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자로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곧, 믿음의 마음과 가슴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자로 여기시고자 합니다.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이 세상 관원의 지혜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재리와 성공에 밝은 삶을 살아가게 하지만, 하나님은 이에 대해서 알려주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관원의 지혜(the wisdom of the rulers or princes of this age)”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관원”은 세상의 권력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 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를 갖고있는 이 세상 임금, 곧 “사탄의 지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고 그 뜻을 방해하는 지혜입니다. 사탄의 지혜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도 극성스럽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어지럽히는 불신의 말들이 그것이며, 교회 안에 침투해있는 이단의 사상들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천국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지혜에 반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 임금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 관원 혹은 임금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하면, 쉽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기에,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여 우리의 마음에 접근합니다. 그리고는 속삭일 때,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 네가 내게 복종하면 네게 이 세상에서의 모든 부와 권세와 명예를 주리라”고 말합니다.
이미 2000년전에 예수님을 미혹했던 그 세가지를 가지고 또 우리를 유혹하며 이를 받아들임이 지혜이며 하나님의 지혜에 도달하는 길인양 말합니다. 옛뱀이 이브를 미혹할 때 속삭인 말입니다.
우리는 재리와 출세에 지나치게 밝은 이 세상의 지혜나 이 세상 임금의 지혜에 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없어질”(doomed to pass away) 지혜라고 했습니다. 흥하는 것같지만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7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교회에 출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는 여전히 비밀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이전에는 감취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지혜”가 전에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만세 전에 미리 정하셨던 것입니다.
전에 미리 정하시되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εἰς δόξαν ἡμών) 그리 하셨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삶의 축복(祝福)의 비밀을 깨닫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5절에서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베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말씀하고, 에베소서 1장 7-10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한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 있을 때, 우리는 이제까지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은 창세 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놓으신 것으로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 알기를 원하시는 바인데,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구원의 비밀입니다.

8절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하여 놓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의 관원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이 구원의 길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가렸기에 관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고 결국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고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리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를 깨달아 안 사람은 세상 사람의 모양대로 세상 사람의 욕심과 지혜를 따라서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축복은 세상의 정(情)과 욕심(慾心)에 사로잡힌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그의 귀로는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세상의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 교만하고 목이 굳은 사람에게는 영원히 감추어진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64장 4-5절에서 “주 외에는 자기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나, 하나님이 영으로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크신 역사와 구원의 섭리를  영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영의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영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알게 된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조금 손해를 보며 불공평한 경우를 당하며 때로는 고통 중에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장차 임할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축복을 바라볼 수 있기에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종종 예상치 못한 화를 당하면서 혹은 자연재해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오로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됩니다.

아직 때와 기회가 있을 때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광의 천국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알고,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 어떤 형편에서든지 ‘늘 마음이 평안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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