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전 1:26-31)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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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믿음생활을 꾸준히 잘 해나갈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그보다는 시련을 겪을 때 잠깐 동안만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매어달리다가 시련의 터널(tunnel)을 빠져 나온 듯 하면 금방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기의 길을 갑니다.
해마다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자연 재해와 인간 재해의 시련을 겪을 때마다 교회 지도자들은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강조합니다. 이곳 저곳에서 기도 모임이 마련되기도 합니다. “오늘 미국을 비롯한 세계는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지에 대해서 감각조차도 없다”고 개탄하는 교회 지도자도 있습니다. 이 말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고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더 의지하는 사회가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하여야 할 교회 내에서 조차도 하나님 보다는 세상의 지혜와 방법으로 교회의 일을 처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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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세상의 지혜 있음을, 능력이 있음을, 문벌 좋음을 자랑하는 자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명의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적어도 일곱 명은 어부이었고, 한 명은 세리이고, 나머지도 제대로 교육을 받은 문벌 좋은 집의 사람은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 혹 문벌 좋은 사람이 있었고, 세상의 학문을 많이 한 사람도 혹 있었지만 이들은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라 지혜 있지 아니하며, 능력이 없으며, 문벌이 좋지 않은 이 사람들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의 판단대로라면, 세상의 지혜가 많은 사람과 능력이 많은 사람과 문벌이 좋은 사람이 많이 모인 교회가 학문이 없고, 능력이 없으며,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보다 분명히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잘 운영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야 할 터인데, 우리가 보는 바대로 세상의 교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칭 지혜가 많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목회자나 성경의 말씀은 힘을 잃고 들려지지 않고 각자가 다 자신의 판단대로 교회의 일을 처리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나누는 일을 합니다.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일을 함에도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축복을 걷어들이는 경제법칙을 적용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몸과 시간과 재물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세상의 지혜가 없기에 더욱 하나님의 지혜를 찾으며, 세상에서 능력이 없기에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세상에서 문벌이 좋지 않아 멸시를 받아왔기에 더욱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과 그들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있으십니까? 능력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문벌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어느 것도 없는 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 때에도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가 없고, 능이 없고, 문벌이 좋지 않은 자로 여기는 여러분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크신 일을 이루십니다.
27-29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언젠가 뉴욕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말씀을 합니다: “최목사님, 나는 가끔 여기 뉴욕에서 목회하면서 교인들 때문에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를 괴롭히는 교인들도 더러 있지만, 감격시키는 교인들도 있어요” 하시면서 지금도 그 감격이 되살아나시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습니다. 얼마 전 주일에 한 교인이 만 불을 헌금했는데, 그 교인이 도저히 그와같은 금액을 헌금할 형편이 아님에 이 목사님의 놀라움과 감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헌금을 강요하는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도 없는데 그날그날 벌어 생활하는 성도가 교회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생활비 전부를 드림을 보고 목사님은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때마다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감격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감격하는데 인간의 어리석음과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도 분명히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그 성도가 큰 물질을 드려서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신 “미련하신 하나님”(the foolishness of God, 1:25)께서 당신을 닮은, 세상의 눈으로는 그렇게 미련하고 무지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은 철저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 사람도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지혜자의 사랑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조롱하는 군중들에 둘러 쌓여서 십자가 위에 죽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않으신 “약하신 하나님”(the weakness of God)께서 당신을 닮은, 세상의 눈으로는 너무나 약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너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며 자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잠잠하시는데,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여지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 천대와 멸시를 받던 사람들이요 가진 것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천대와 멸시를 받던, 가진 것이 없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택하시어 있는 것들을 폐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처지가 멸시와 천대 가운데 있더라도, 또 우리가 없는 자라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에 들어갈 수 있으며 부요하신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나라에 들어가심을 믿으십니까?
천국을 소유하심을 믿으십니까?
이를 믿는 사람은 이미 영광과 존귀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요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을 여기는 사람은 이 세상 끝날에 벌거벗은 자로, 없는 자로 발견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이 세상 살 동안만 허락되어진 것이요, 잠시 잠간 후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지혜와 능력과 문벌과 소유와 행위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고 구원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29절에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형편에 사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 자신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세상적으로 학문이 많은 지혜있는 사람이요, 능력이 많은 자요, 문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배경을 자랑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분뇨(糞尿)만도 못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자요, 약한 자요, 천하고 멸시받는 자요, 없는 자로 여기며 철저히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30-31절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익하고 씁쓸한 맛을 남깁니다. 듣는 사람이 이것을 듣고 말하는 사람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세상 자랑은 시기나게 하며, 배아프게 하며,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주님을 자랑함은 유익을 주며 세상에 주님의 나라를 실현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 자랑꺼리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거룩한 자가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온전히 사함받음을 자랑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주를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3-24절에서 빌려온 것인데,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랑하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 카우카오마이(καυχάομαι)는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자랑하다(boast)”는 뜻이고, 둘째는 “기뻐하다(rejoice)"는 뜻이고, 셋째는 ”영광돌리다(glory)"는 뜻인데, 주님을 자랑할 때는 이 세 가지 뜻을 다 포함합니다.
곧, “주 안에서 주님을 자랑하는 자”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주님을 증거함으로 자랑하고, 자랑함으로 그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넘치고, 이로 인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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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하셔서 한 마음으로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던 120명의 성도의 마음을 사로잡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시키신 날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림하시지 않았다면, 그들 중에 상당 수가 예수님의 3년여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닌 자이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미련한 자요, 약한 자요, 천하고 멸시 받으며 없는 자로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일을 이루시는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림하시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세상에서 미련한 자가 변하여 주님 안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고, 세상에서 약한 자가 변하여 주님 안에서 강한 자가 되며, 세상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던 없는 자가 변하여 주님 안에서 존귀한 자와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으십니까?
성령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충만하게 채우심으로 여허분이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지혜자요, 능력이요, 존귀한 자요, 부요하신 자로 발견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주님을 자랑하며, 기뻐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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