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고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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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 배우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기쁘게 하며 사람에게 영광 돌리는 장소가 아니라, 회개함과 예배드리는 행위와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때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은 하나님 앞에 쏟아내어지지 않고 여전한데, 목사님의 세상적인 위로 몇 마디는 잠시 잠간의 위안은 될지언정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에 나올 때 나의 죄짐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고 하셨는데, 우리의 참 평안과 안식은 우리의 무거운 죄의 짐을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아직, 마음 속에는 음울하고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여전히 있는데 찬송을 부른들 기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들 은혜가 되지 못함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이사야 29:13)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외식(外飾)을 보시며 마태복음 15장 7-9절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와 교인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과 깨달음이 오직 그 입술에 머물러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고백도 입술과 머리에만 있기 때문에 마음과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평하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머리로는 ‘그렇지, 맞는 말씀이야’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기에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여기에 고린도 교회와 현대 교회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말씀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과 믿음, 그리고 성령의 은사가 부족함이 없이 오히려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교회로 남아있었던 원인은 그들이 입술과 머리로만 믿고 마음과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뜨거움이 없으며 삶은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한 식민지였던 고린도는 그 당시 인구 50만명 내외의 대도시로 로마인, 헬라인, 동양계 인종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고린도는 상업, 무역의 중심지로 선원과 상인, 각종 직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이곳에는 아프로디테([그] 미의 여신=비너스[롬]) 신전이 상당수 있었으며 신전에는 창기들이 여사제로 일하면서 몸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의 도시명에서 파생된 단어인 ‘코린티아조마이(Κορινθιάζομαι: 고린도인처럼 행하다)’가 ‘음란을 범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될 정도로 이 도시는 성적(性的)으로 문란(紊亂)하고, 불륜(不倫)의 문제가 많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18장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이 지방에 들르면서부터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과 행동의 성장(成長)은 더디기만 합니다. 바울과 아볼로라는 훌륭한 목회자들이 이 교회의 사역을 이어갔지만 항상 문제가 있는 교회로 남아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그의 3차 전도여행 말기인 55년경에 에베소에서(고전 16:8)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바울은 그가 전해 듣거나 문의하여 알게된 고린도 교회의 기본 문제들을 인지하고, 교리와 예들로써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더 나아가 교리들로써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치려고 하였으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권면하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기에 앞서서 그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함으로써 편지를 시작합니다. 또 그들 가운데 있는 좋은 것들--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 은사에 부족함이 없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을 칭찬하고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그들 가운데 있는 문제들에 관해서 지적합니다. 곧, 고린도 교회 내에 분당(分黨)이 있고, 그로 인한 분열(分裂)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들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어떤 사람은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말하나 이러한 갈림이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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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에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문안인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하여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습니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인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에는 ‘명령을 전하는 자(messenger)’이외에 '제자(disciple)'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데, 사도로서 바울이 전하는 명령이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감당하여야 할 일--복음증거의 사명에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로 사는 것, 부자로 사는 것을 자랑하는 교인은 많아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교인을 흔히 볼 수 없는 것은, 이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이를 귀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문안인사하는 ‘소스데네(Σωσθένης)’란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7절에 보면 ‘소스데네’란 이름의 사람이 고린도 지방에 있던 공회의 회당장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 1장 1절에 나오는 사람과 동일한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동일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에베소에 와서 바울과 함께 이 편지를 쓰고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절에 소스데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사람이 바울의 편지를 대서(代書)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서를 더디오가 대서하였듯이(롬 16:22), 심한 안질로 글을 쓸 수 없던 바울을 대신하여 소스데네가 고린도전서를 썼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변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항상 무엇이 어떠해서 내가 이 일을 할 수 없고, 무엇이 어떠해서 저 일을 할 수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정작 자기가 그 일 감당하지 못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바울보다 더 나쁜 형편과 여건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심한 안질로 고생한 것이 본래부터인지 아니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 후유증이요 그리스도를 만난 한 증거를 몸에 새겨두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몸의 장애요인과 그당시의 열악(劣惡)한 환경이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증거의 열정을 빼앗아가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신체적 장애 때문이 아니요, 환경이 나쁜 탓도 아니요, 시간이 없는 탓도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4-7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χάρις)는 세상을 골고루 비추이는 햇빛과 같아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던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뿐아니라 분열과 변론이 심했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풍성하게 임하여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이미 임하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비추이는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은혜를 거부한 까닭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 은혜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은혜가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의 선물이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이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줄 알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열거합니다.
그들에게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ἐν παντὶ λόγῳ καὶ πάσῃ γνώσει) 풍족함”이 있었습니다 구변이란 진리의 말씀 혹은 이를 위한 언변이란 뜻으로 고린도 교인들은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또 이에 대한 깨달음이 풍성하게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증거꺼리인 모든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과 방언 통역함--이 그들 가운데 부족함이 없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믿는 맘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8절은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기대(期待)요 소망(所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함은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사람들과 회계하실 것인데, 바울이 바라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셔서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9절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어둠 가운데 머물러있던 우리를 부르시어 은혜의 햇빛이 있는 밝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뿐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적인 교제(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를 갖게 하십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적인 교제를 갖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깨달으며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가 되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교제 갖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자로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기 보다는 다시 돌이켜 나의 세상 욕심에 이끌리어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툼이 있고 분열이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온전히 교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것 보다는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성령의 값없는 선물도 세상의 자랑꺼리로 격하시켜서 교회의 다툼을 자초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미쁘신 분’이십니다.
‘미쁘시다’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πιστός)는 ‘믿음이 많다’(faithful)는 뜻으로 ‘신실하다’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미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한 번 약속하신 것을 변개함이 없이 항상 지키십니다.
미쁘신 하나님을 믿을진데 그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고루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 그리고 이를 바로 전달할 수 있는 언변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여 성령의 많은 은사들이 부족함 없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 다툼과 분열이 있고, 모범적인 교회이기 보다는 말썽이 많은 교회로 존재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여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진정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에 서로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의 가진 바 세상 것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성령의 값없는 선물인 은사까지도 자랑꺼리로 여김이 문제입니다.
하기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사랑을 강조합니다.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어진 것--방언도, 예언도, 지혜와 지식의 말씀도, 믿음도, 어떠한 구제나 희생도 주님 안에서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견고한 믿음과 성령의 은사가 아무리 많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이는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에 오히려 부족합니다. 가진 것이 많고, 받은 은사도 많으나 이 세상 가운데서 자랑하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책망꺼리가 없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 또한 교린도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사랑은 없고, 무관심만 팽배합니다. 옆사람이 어떤 형편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옆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면, 이는 그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험담(gossip)을 늘어놓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이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의 빛이 이제까지 함께 하여왔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고백한 사람이 모인 교회이기에 여러분 가운데 지속적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값없는 선물인 은사가 부족함이 없이 나타납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형제·자매의 연약함을 돌아보고 용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 중에 있는 교우와 함께 고통받고, 기쁨 중에 있는 교우와 함께 진정으로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의 바른 표현인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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