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9, 2014

“바울의 풍자(諷刺)” (고전 4:6-13)


                   “바울의 풍자(諷刺)” (고전 4:6-13)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區別)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勸勉)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1
그리-스의 철학파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큐니코스학파(Cynics=Cynic School)가 있습니다. 주전 5세기에서 4세기를 산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444?-371 BC)란 사람이 창시한 것인데, 영어로는 '시닉스(Cynics)'라 번역하고 한국말로는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부르는데 냉소주의(冷笑主義) 철학자 그룹입니다. ‘큐니코스’란 이름은 원시적이고 반문명적인 삶을 사는 그들을 두고 ‘개’(큐논=κυνόν, 혹은 κυνάριον)라고 경멸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견유학파’란 번역도 아마 ‘개똥철학을 논하는 사람들’ 정도로 경멸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 큐니코스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그 이름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스스로 다른 이름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 큐니코스학파(Cynics)에 속한 사람들 중에 디오게네스(Diogenes: 412-323 BC)란 사람이 유명합니다.
이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과의 일화(逸話)가 또한 유명합니다.
디오게네스는 평생토록 홑옷을 입고 통 속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통 속에서 거지같이 사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무엇이든지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들어주리라.”고 대왕의 위엄을 갖추고 통 속의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며 말합니다.
때마침 햇볕을 쬐고있던 디오게네스는 그의 왕관과 화려한 의복과 위엄에 찬 알렉산더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귀찮다는 듯이 그 젊은이에게 말합니다: “조금만 비켜 서주겠소? 햇볕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말이오.” 알렉산더는 이 말을 들으며 경이감까지 듭니다: ‘이 자가 과연 내가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알렉산더 대왕은 후에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더라면, 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술회하였다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알렉산더보다 56살이 더 많은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는 같은 해인 주전 323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을 이 큐니코스학파에 속한 선생들과 비교합니다.
사람들이 알기에, 목수의 아들이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당당하고, 때로는 냉소적이며, 때로는 독설이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동들이 그들에게 견줄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까지 심한 말씀을 합니다.
  
그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태 16:23)하고 꾸짖으시며, 돈궤를 맡았던 제자, 가룟 유다에게 ‘네가 이럴 수 있느냐? 나를 어찌 팔 수가 있느냐?’고 눈물로 하소연하는 대신에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한 13:27)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인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때로는 독설적이고, 때로는 냉소적인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권위가 있고, 상대방의 폐부(肺腑)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리함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때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약하고 넘어지기 쉬움을 그 앞에 고백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의 보기에 학문이 없는 자요 비천한 자요 약한 자처럼 보이지만, 교만한 자를 꼼짝못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과 지혜가 하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세상에서 교만하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특유의 풍자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개(=큐논)라고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호강 받는) 개보다 훨씬 못한 삶 가운데 있었습니다(“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13절]).

                                                                                       2
6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이란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본을 보였다”고 함은 자신을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처럼 낮추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 일을 감당함에 겸손한 자세로서 충성으로(=신뢰 받을만한 자로) 잘 감당해왔다는 뜻입니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not to go beyond what is written [everything is to be weighed by what God has revealed in His Word], Berkeley Version)”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악에 빠지기 쉽고, 불순종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안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말씀의 판단자가 되어서 말씀의 경중(輕重)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어떤 것은 지켜야 하며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새깁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의 범죄함도 스스로 말씀 밖으로 넘어감으로써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셨는데,
이브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의 중함을 무시하고 스스로 그 말씀의 판단자가 됩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그 가운데 얼마간은 먹고 싶은 실과를 먹지 못하게 금하신 것에 대한 원망이 있고, 또 얼마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판단하고자 하는 교만이 들어있습니다.
이리할 때, 이브와 그 다음에 아담은 옛 뱀의 꾀임에 넘어갑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배워” 한 것은 바울과 아볼로의 주님을 위한 삶이 말씀에 따른 것이지 그 말씀을 벗어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마다 스스로 잘 난 사람이 많아 자신을 주장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잣대로 옆 사람을 판단하고, 바울과 아볼로를 판단하고,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따라서, 교회에 다툼이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나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나의 반대편에 있는 적(敵)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것이 ‘교만한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충성된 종의 삶을 살아가는, 살고자 힘쓰는 바울과 아볼로의 겸손한 모습을 배우라고 합니다. 그리하여서, 교회에 다툼이 없고 분열이 없고, 충성된 일군의 모습만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7절에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 말씀합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What are you so puffed up about?, TLB)라고 함은 쉬운 표현으로 하면, "왜 그렇게 잘난 채 하느냐?“ ”네가 무엇이 그리 잘났느냐?“입니다.
“네가 뭐 그렇게 잘났다고 난 체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느냐?”는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한 질문입니다. 너희들이 현재 갖고있는 것--구원(救援)이나 성령의 은사는 물론이고 세상에 속한 것들까지 어느 하나 하나님꼐로부터 받지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갖고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스스로 만들어내어 소유한 것이 없습니다. 돈을 버는 사람은 자기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으면 일이 꼬여 하는 일마다 실패(失敗)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더더욱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은사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이 그 사람의 행함이 옳고 완전하기 때문에 얻어집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은 또한 무엇입니까? 믿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8절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3장 1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의 신앙적 상태는 아직도 젖먹이 어린아이, “육신에 속한 자”인데, 그 스스로는 이미 믿음의 높은 경지에 이른 자처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이미 영의 양식을 포만(飽滿)할 정도로 먹어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미 성령의 은사를 다 소유하여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기에 더 이상 소유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임하실 때 그와 함께 판단하고, 다스리고, 영광 중에 존귀한 삶을 살 것인데, 아직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지 않고계신데, 따라서 5절에 말씀하는 “때가 이르기 전”인데 다른 사람들 위에 서서 ‘이것이 이러하고, 저것이 저러하다’고 판단하고 정죄하고자 합니다.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도는 말씀을 자주 읽고 그 말씀을 갖고 묵상하고 그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인가 이해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전혀 읽지 않거나 슬쩍 지나치는 눈으로 읽고 귀로 들은 사람은 말씀은 들은 것같지만, 오해하여 전혀 그 말씀과 부합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너희와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풍자(諷刺)의 시작입니다.
이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 왕노릇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너희가 참으로 왕노릇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바울과 아볼로--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왕노릇하고 있겠으니 그것이 사실이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왕노릇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충성된 일을 하면서도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니 아직은 그 때가 아니란 것입니다.

9절에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바울의 형편은 왕노릇 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어찌 보면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는 자의 모양같습니다.
사도(使徒)--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인 바울과 기타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높음 가운데 두셨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죽이기로 정하신 자같이, 높이심과는 전혀 거리가 먼 가장 낮은 자의 말석에 두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인 바울 등을, 왕노릇 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하는 일을 구경하고 판단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극장의 무대에 서서 관객들의 웃음꺼리가 되는 어릿광대나 콜로새움에서 맹수와 싸우다가 처참히 죽어가는 노예와 같이 뭇사람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그리스도의 때가 아니며, 성도들이 왕노릇 할 때가 이르지 아니한 것이 분명합니다.

10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연고(緣故)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모습은 미련하고--약하고--비천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은 지혜롭고--강하고--존귀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믿음이 없는 자나 적은 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침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바울 자신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함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이 감당하여야 할 일--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낮고 겸손한 자의 삶은 살지 않고, 바울이 이렇고 아볼로가 저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는 식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친 사도들과 그리스도를 판단하여,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나는 게바 에게라 나는 그리스도에게라 편가름이나 하고, 아직 그리스도의 때가 이르지 않아 아직 성도들이 영광을 얻을 때가 아니며 존귀히 여김을 받을 때가 아닌데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기에 이렇게 말씀함입니다.

사람들 앞에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의 삶을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만드시고, 사람들 앞에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한 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의 모습이 되게 하십니다.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하는 바울의 삶을 고린도 교인들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셔서 그리스도가 아직 이 세상에 임하지 아니하셨지만,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데, 바울이 사는 모양이 참으로 딱하고 때로는 한심하기까지 여겨집니다.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바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11-13절에서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서 둘째 가라면 매우 섭섭하게 생각했을 바울의 현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사람들 눈에)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자이기에,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 증거의 사명을 맡은 자로서 죽도록 충성하였는데도 이 세상에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부귀와 영화와 권세자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손으로 일하며, 후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비방을 당하고, 마침내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끼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버림받은 자같은 형편 속에서도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12절-13절에 “후욕(詬辱)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逼迫)을 당한즉 참고, 비방(誹謗)을 당한즉 권면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람으로서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령께서 바울을 사로잡으실 때 이것도 가능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일부러 궁상맞고 비참한 삶을 자청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 속에서도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되시며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섭리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3
어떤 모습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역(終着驛)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의 끝장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복음--좋은 소식(Good News)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세상의 기업에 충실하시되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소망 중에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시지 않은 지금은 우리가 왕노릇 할 때가 아직 아닙니다.
스스로 높은 자가 되어서, 자고하고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남의 하는 일에 이러쿵 저러쿵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을 낮추며 ‘과연 내가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충성된 삶을 사는가?’ 살피고 그 일에 정진할 것입니다.
나의 모습이 부족하다고 하여서 스스로를 책망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지혜의 주님께 간구할 때, ‘그 일을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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