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 2014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고전 2:1-5)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고전 2:1-5)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1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말이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포스트 모더니즘--‘후기 현대주의’의 시대를 살고있다고 합니다.  믿음과 관련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기준이 없어진 시대적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을 제한하는 절대적인 진리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기는 하지만 임의로 그 말씀을 해석하고 취사선택(取捨選擇)하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그의 삶을 주장하시거나 인도하시는 절대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계시기도 하고 또 때로는 안계시기도 한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생각은 어떤 특정한 이단 집단의 교리가 아니라 많은 기성교회의 교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2-3세기의 교부(敎父)시대를 거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되어왔습니다. 그 말씀--그것이 바르게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든 아니면 교회 지도자의 권위를 옹호하기 위한 편의해석이든--이 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제한하는 절대적인 진리요 가치기준이었습니다.
교회가 선포한 기준에 어긋나거나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은 출교를 당하여 삶의 기반을 잃게되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칼빈의 교회만 하더라도 그 지역사회의 삶의 강령을 정하여주는 강력한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강령을 어기고 무단으로 교회를 연속하여 몇 번 빠지면 이 사람은 교회에서 쫓겨나 더 이상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없기에 교회 지도자에게 잘 보이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진리성이 도전을 받게되고,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은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당시를 산 사람의 신앙적인 생각’ 정도로 여겼습니다.

현대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하면, 성경을 절대적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함에는 초대교회나 루터와 칼빈의 교회와 같이 그렇게 철저하나, 그 절대적 진리요 가치기준인 말씀에 따라 살아가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이나 배우는 성도들이나 성경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전혀 여기에 구애(拘碍)받지 않음이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의 또다른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오랜 기간동안 한국인의 삶 속에 이어져 내려온 무속적(巫俗的)인 현세 구복(求福)의 테두리 안에 여전히 갇혀있음입니다.
불교의 원래 교리에 현세적인 축복이 없었습니다. 석가모니가 처음에 제시한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의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는(이를 해탈이라고 함)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불교가 중국과 한국에 전해지면서 또 물질만능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현세 축복의 종교로 변신하였습니다.

기독교도 한국 사회 속에 정착되어지는 과정에서 현세 축복의 종교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원래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영원한 삶의 복된 소식을 전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장차 우리에게 임할 이 영광(榮光)의 구원(救援)과 영생(永生)을 위하여 현재에 당하는 잠시잠간의 고난을 소망 중에 인내하라는 것이 사도들의 메시지의 주요 내용이었는데, 내·외적인 사변으로 끊임없이 고통 당해온 한국인들에게 이것은 복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오히려 순수한 복음이 전하여지던 것이, 그 이후에는 대중종교로서 생존하기 위해서 한국인의 근저에 흐르는 현세 축복사상과 타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의 원뜻이 살아나야 할 때가 되었는데 그러기에는 메시지의 변질이 너무 심하여 바로 잡기가 어렵습니다. 요즘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무엇을 증거하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믿음생활을 잘하면 현세에서 축복과 영화를 누리고, 믿음생활을 잘못하면 하나님이 현 세상에서 어려움을 주시는 분인 것처럼 엉터리 복음을 전하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행해지는 간증집회는 대부분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양으로라도 성공한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또 이러한 세상축복의 여부와 함께 신앙곡선이 함께 상승하기도 하고 하강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과, 베드로와 바울과 야고보의 순교한 것과 요한과 기타 많은 사도들이 어려움을 당한 것은 마치 이 시대를 사는 교회와 교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리고 축복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믿는 듯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이 과연 그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로 성공과 축복의 삶이었습니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의 삶이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삶이었습니까?
전도하다가 돌팔매질 당하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콜로세움에서 목베어 죽임을 당한 바울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축복이었습니까? 그리스도와 이들 사도들과 제자들의 죽음이 과연 현재를 사는 성도들로 세상축복을 받게 하고자 함이었습니까?

처음 믿음생활을 시작하여 성경에서 현세축복의 말씀을 발견하고자 성경을 펼쳐든 사람은 얼마 안있어 성경을 덮습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란 말을 듣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성경 어디에도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복받고 부자의 삶을 산다는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세상에서 욕심의 삶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계속 현세축복에 초점을 맞춥니다.
                                                   
과연 믿는 사람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 축복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사람 가운데 거하시다가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 축복이 무엇이길래,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이를 위하여 자기의 생업과 집과 전답과 가족을 버리고 이를 위해 그들의 일생을 바치고 또한 순교하였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으로 축복되고 축복된 진리의 복음(福音)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므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셔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죄와 허물을 묻지 않으시며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며 그와 함께 영원히 사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잠시동안 누리는 세상 축복과 비교될 수 있습니까?
이 무한(無限) 감사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바울과 많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기쁘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2

복음증거는 우리 인간의 지혜와 세상 학문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가 달려 죽으신 십자가만을 전할 때 가능합니다.
뜨거운 신앙체험과 고백과 열심이 있던 바울이었지만, 그의 복음전파가 항상 성공을 거두었나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자기의 동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합니다.
이는 바울이 기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기 위함이며, 그로 하여금 자고(自高)하지 않고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 주님께 매어달리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골육의 친척, 유대인들을 위하여서 기도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기를 간구합니다.
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들고 나갈 때에도 실패함이 있었는데, 그 원인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전도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전도자의 초기에 인간의 지혜와 논리와 철학에 의지하여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깨달은 바는, 오직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만 복음증거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농촌교회의 농부에게 전하는 복음이나 학교촌 교회의 지식인에게 전하는 복음이나 한결같이 사람의 지혜나 방법으로 전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전하여야 합니다. 전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받고 우리가 의로와지고 구원함과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중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이곳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훗날 신앙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을 만나고, 그를 대적하고 변론하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행전 18:1-11). 헬라 문화와 철학의 중심인 그리-스 남부 아가야 지방에 위치해있는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웅변술이나, 논리나 철학이나 세상의 지식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지혜와 능력, 감동하심에 의지함이 중요합니다.

2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증거할 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그가 달리신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바 된 것입니다. 의로와짐과 구원함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서 보혈 흘리심을 믿는 믿음이외에 어떤 것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들(lost souls)에게 증거할 것도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과 그의 십자가’뿐입니다.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 아덴에 머물 때,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또 장터에서는 에피큐로스파와 스토아파 철학자들과 변론하였습니다. 헬라 철학자들과 변론할 새, 그는 그의 바리새인으로서 받은 교육과 철학과 논리로서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참으로 우주의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와 구주로 오셨음을 증명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증거는 우스개거리가 됩니다(행전 17장). 이 실패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을 증거함은 우리말의 능함으로,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지혜와 도우심으로만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철학과 논리로 변론하려는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과 전통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들의 대적과 훼방을 경험한 바울은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파함이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외적 장애요인 외에 그의 마음 속에 불일 듯 일어나는 자만과 인간의 지식이 성령의 역사를 가리워 복음증거에 또다른 내적 장애요인이 될까봐 바울의 심정은 늘 약함에 처하고 떨립니다.
그가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함은 인간적인 염려와 근심에서 나온 걱정의 말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함이 너무나 중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하는 바울의 심경은 그의 약함--때로는 그의 자만심이요, 또 때로는 그의 육체의 약함과 언변의 부족--으로 인하여 복음증거가 혹 가리워지지나 않을까 주님을 위하여 두려워하고 떨렸습니다.

4절에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무엇을 어떻게 말하여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되심과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해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를 알지만 복음의 증거는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마음 가운데 있는 자만과 자고의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려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며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여 상대방에게도 확신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할 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는 사람은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의 나타나심과 사람의 마음을 여시는 능력”을 믿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를 믿는 사람에게도 복음증거가 어려운데, 하물며 기도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말로 복음이 증거될 수 없습니다.

5절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람의 지혜와 방법으로서 믿음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록 중에도 증명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과학적 접근방법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철학적, 논리적 접근방법으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시며 머물러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심을 우리가 “믿음으로 알기에”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위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나 자신과 내가 세상에서 소유한 것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세상에서 움켜 쥐고있는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움켜쥔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보다는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의와 유익을 구하는 대신에 먼저 나의 의와 유익을 구합니다.

교회에 다니는데 아직도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에게 속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구주로 영접하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신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진리가 마음 속에 믿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인데 아직 입을 벌려 구원(救援)의 복음(福音)을 증거한 적이 없습니까?
복음 증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도우심의 능력과 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증거할 때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과 그가 죽으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진리만을 말씀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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