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9, 2014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고전 4:1-5)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고전 4:1-5)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1
무용지물(無用之物)이란 말은 쓸모없는 물건이란 뜻입니다. 아무 재주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을 비하(卑下)하여서 ‘나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야’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전혀 무용(無用)한--필요없는 사람이었는데, 몸이 불구가 된 다음에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함에 유용(有用)한--참으로 필요한 사람이 된 예를 더러 봅니다.
성한 눈을 갖고있을 때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아무 일을 하지 않다가 맹인이 된 다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밝음을 찾고 육신의 눈먼 사람들을 위한 복음의 증거자가 된 안요한목사님의 예와, 두 손과 한 발을 절단당하는 절망을 이기고 한 발만으로 오똑 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정근자 전도사님의 예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감동을 주는 복음성가의 작사·작곡을 하는 뇌성마비의 불구자 송명희씨의 예 등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용하심은 무용지용(無用之用)--쓸모없는 것의 쓸모있음--이란 고사성어의 뜻과도 상통합니다(장자의 인간세편). 초나라의 접여(接輿)라고 하는 사람의 외침 가운데, “산의 나무는 스스로 베이도록 자라고, 등의 기름은 스스로를 태우며, 계피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지고, 옻은 칠할 수 있기에 그 나무가 베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쓸모있는 것의 쓰임을 알 뿐이며 ‘쓸모없는 것의 쓸모있음’(無用之用)은 모르는구나”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세상적인 유용성만을 따진다면 쓸모없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도(道)의 이치로 보면 쓸모 없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노마지지(老馬之智)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한비자 세림편).
‘늙은 말의 지혜’란 뜻인데,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지혜와 재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춘추시대 때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과 대부 습붕(濕朋)이 환공을 따라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러 갔습니다. 갈 때는 봄이었는데 올 때는 겨울이라서 악천후 속에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모두가 길을 찾으려고 우왕좌왕할 때 관중이 말합니다: “이럴 때에는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 늙은 말은 본능적으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입니다. 과연 늙은 말을 풀어놓고 그 뒤를 따라가니 마침내 길을 찾았다고 합니다.
또 산 속을 가다가 물이 떨어져 갈증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뒤져도 시냇물이나 작은 샘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습붕이 말합니다: “개미는 겨울에 산 남쪽에 집을 짓고, 여름에는 산 북쪽에 집을 짓는다. 개미집이 있는 곳에서 지하 여덟 자를 파면 물이 나올 것이다.” 일행은 개미집을 찾아내 땅을 팠는데, 정말 물이 나왔습니다.
늙은 말이나 개미같이 별로 쓸모 없는 것으로 보이는 존재에게도 지혜가 있으며 재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2
1절에서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했습니다. 일군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페레테스[ὑπηρέτης]는 원래 노예 중에서도 가장 천한 ‘배 밑창에서 노젓는 자’입니다. 그의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도 않고, 귀한 것으로 여겨지기는커녕 가장 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람들이 노를 젓지 않으면 배가 갈 수 없는데도 그들의 하는 일은 비천한 것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잘했다고 칭찬 받기보다는 왜 빨리 노를 젓지 못하느냐고 욕설과 함께 채찍이 가해질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을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일에 비유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것도 아니요, 그 정도밖에 못하냐고 욕을 하고 채찍질하더라도 그저 자신의 달란트와 능력의 한도(限度) 안에서 성심껏 감당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οίκονόμοι μυστηρίων θεού)”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입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이것보다 더 복이 되는 소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맡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모스[οίκονόμος]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 즉, 경제인 혹은 경영인이란 뜻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집주인의 일을 맡은 자와 관련하여 청지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관련해서는 ‘복음증거 사명을 맡은 자’가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을 알리는 복음증거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증거 사명을 맡은 자’로서 바울은 그의 삶에서 오직 두 가지--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밖에 그가 하는 텐트메이커(tent-maker)의 일은 그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할뿐입니다.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πιστός]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님들이 성도님들에게 설교할 때나 성경공부할 때나 또 기회를 얻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시고 충성하십시오’ 말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성도는 답답합니다. 아니, 나에게 노래 부를 줄 아는 재능이 없고, 아이들 가르쳐본 경험이 없는데 무슨 일로 봉사하고 충성하란 말인가? 혹은 이 교회는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저 목사님, 참 답답한 말씀 하네‘ 속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주위에 한국 사람이 없으면, 다른 인종의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맡은 자의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도, 갇힌 자와 병든 자를 방문하는 것도,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과 함께 맡은 자의 할 일입니다.
목사님이 왜 그것밖에 못하냐고 잔소리를 하건, 다른 사람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건, 일을 안하는 사람이 그것도 일이라고 하는 거냐고 빈정거리건, 나의 하는 일이 사람에게 보이건 안보이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모든 일이 맡은 자가 할 일이요 하고있는 일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이 ‘충성’이라고 했는데, 원어를 직역하면, “맡은 자들은 신뢰할만한 자(=믿을만한 자)로 발견되어져야 한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겼는데, 그 사람이 하라는 일은 않고 갑자기 배탈이 나서 못했다고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또 일을 시켰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누가 찾아와서 못했다고 변명합니다. 세 번째 일을 부탁했더니,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미안한 표정도 없이 별로 하고싶지 않아서 안했다고 대답합니다. 이 사람이 주인에게는 별로 신뢰할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되신 하나님을 위해서 경영을 전혀 하지 않은 한 달란트를 맡은 자의 변명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5장 24-25절에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람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고 했습니다. 과연, 이 게으른 종의 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이 굳은 분이셨습니까? 태만한 사람들은 자기의 게을러 하지 못한 일의 결과를 어떠한 형태로든지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기를 원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맡은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의 변명이 매번 그럴듯하게 들리더라도, 이 사람은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감당하는 사람으로서 ‘신뢰할만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나귀’의 우화(寓話)를 우리가 압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장에서 나귀 한 마리를 사서 집으로 끌고갑니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원 저렇게 미련스럽기는. 나귀를 끌고갈 바에는 타고 가지”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나귀의 등에 타고, 아들은 나귀 옆에서 갑니다.
얼마쯤 가니, 아낙네들의 무리가 나귀의 등에 탄 아버지와 그 옆에서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욕합니다: “저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같으니. 아들은 걸리고 지는 타고 가다니.” 나귀에 타고 가던 아버지가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걷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 말을 듣고는, 자기는 내리고 아들을 태웁니다. 얼마쯤 가는데, 이번에는 노인들의 무리를 만납니다. 이들도 한마디씩 합니다: “저런 몹쓸일이 있나. 저기는 위아래도 없나. 장유유서(長幼有序)인데, 아들은 떡허니 나귀에 타고 가고 나이든 아버지는 걸어가다니.”
이 말을 듣고는 그도 그런 것 같아, 이번에는 둘이 다 나귀의 등에 올라탑니다.
또 얼마쯤 가는데,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합니다: “아유 저런 고약한 사람들이 있나?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저렇게 학대하다니?”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막대기와 밧줄을 사용하여 나귀를 메고 갑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습니다. “야 저 사람들 좀 봐라. 나귀는 타는 짐승인데, 저렇게 메고 가네. 아이고 우스워”하고 놀리며 따라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래도 뭐라고 하고 저래도 뭐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는 싶은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주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일을 안 하면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데, 교회에서 무슨 일이라도 할라치면, 무엇이 이렇다 무엇이 저렇다 뒤에서 말들을 많이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욕까지 먹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욕을 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지 욕을 먹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것이 그 정도의 것이면, 그것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재능과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지금은 위대한 사도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뿐아니라, 그를 비방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그의 서신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가 개척하고 정열을 쏟은 교회에서조차도 그를 중상하고 폄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가 무슨 그리스도의 사도냐? 그가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복음을 증거하느냐? 그의 설교가 왜 그렇게 형편없느냐? 그가 말은 많이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가 말하는 복음은 잘못된 것이고 바른 것은 이러하다’는 등 각 교회에서 그가 머물러있을 때나 떠나있을 때나 반대하는 사람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 그를 못살게 굽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서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표현함으로 바울이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일을 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신껏 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와 그의 하는 일을 두고 이렇쿵 저러쿵 하는 일을 작은 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만을 작은 일로 여길뿐아니라, 자기도 자신의 하는 일을 자책(自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내가 하는 일은 요모양 요꼴이지? 왜 내게 더 큰 달란트가 없어서 큰 결실을 거두지 못하지? 왜 열심히 일했는데도 성과가 없지?’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무를 자라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할 일은 다만 맡겨진 일을 나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열심히 감당할뿐입니다.

4절에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시는 이는 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고 한 말씀은 바울이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완전하고 의로운 사람이라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허락되어진 여건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데 열정을 쏟은 까닭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는 일이 ‘착하고 충성되다’ 아니면 ‘악하고 게으르다’고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의 하는 일을 놓고 가타-부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도의 하는 일을 놓고, 어쩌니 저쩌니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하는 일이 종국에 하나님의 판단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 눈에 뜨이고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하여 나의 하는 일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있고, 사람들 눈에 뜨이지않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는커녕 비난한다고 하여 나의 일이 하나님을 덜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충성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감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5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판단하실 때가 올 것인데, 그때까지 다른 사람의 일이 이러쿵 저러쿵 판단할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고 비방한다고 하여서 낙담할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 중심이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지금은 불분명한 것 같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사람의 마음의 중심과 그의 한 일들을 나타내시어 칭찬을 받을 자에게는 칭찬을 주실 것입니다.

3
자신을 과소평가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각각 다른 모양과 다른 재능으로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과 욕함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일 하기를 주저하십니까? 판단하실 이는 우리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이왕에 할 바에는 충성된--신뢰할만한 성도로 하나님께 발견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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