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3, 2014

“교회의 참된 터” (고전 3:10-17)

“교회의 참된 터” (고전 3:10-17)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
 

1
냄비 신앙과 가마솥 신앙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인용 냄비에 찌개를 끓일 때 처럼 냄새도 그럴 듯하고 뚜껑도 들썩들썩하고 소리도 나고 제법 상당히 맛있는 요리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끓고 나면 항상 1인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도 중에 대단히 설쳐대면서 큰 소리 치길래 무언가 하겠지 잔뜩 기대해보지만 결국은 기껏해야 자기 몫만 간신히 하는 사람입니다. 이 냄비에 물을 끓일 경우, 두께가 얇아 열 전도 속도가 빨라서 금방 끓치만 식기도 쉽게 합니다. 가마솥에 국을 끓일 때는 소리가 나지 않아 끓는지 안 끓는지, 뚜껑을 열기 전에는 냄새도 퍼지지 않아 맛이 좋을지 나쁠지도 알 수 없지만 한참을 들여 일단 끓여 놓으면, 떠도 떠도 남는 푸짐함과 속에서부터 울어나온 깊은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마솥에 물을 끓이면 그 두께가 두툼하여 더디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한 번 뜨거워지면 오래오래 뜨거움을 간직합니다. 이 가마솥 신앙의 소유자는 교회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소임을 잘 감당하고 남에게 좋은 신앙의 본을 보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인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두 여인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 마리아는 처녀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5세기 신학자들의 논쟁 가운데 하나는 이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 마리아를 ‘Christotokos'(그리스도를 낳은 자)라고 부를 것이냐, 아니면 'theotokos'(하나님을 낳은 자)라고 부르냐 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431년의 에베소 종교회의(Council of Ephesus)에서 theotokos(하나님을 낳은 자)라고 함이 타당하다고 결정하였고, 451년의 칼세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에서도 이를 확인하였습니다. 이로써 중세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리아는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바티칸 교황청은 마리아까지 포함하여 4위 1체의 하나님의 교리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하지만 카톨릭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리아의 원함은 아닐 것이며, 어쨋거나, 마리아는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 중에 커다란 축복을 받은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기에, 마리아가 사촌 언니이며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어찌 된 일인고?” 합니다.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베드로와 요한보다 먼저 만난 여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원래는 비천한 출신인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막달란 마리아, 막달란 마리아” 하며 떼를 쓰며 간청하였기에 주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을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교회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떼를 쓰며 강청할 때, 마음이 약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은 그의 책 「Why not the Best?」에서 “나는 내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에 14년동안 참가하여 1년에 10가정씩 140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6년 내가 주지사에 입후보하고 선거운동 3 개월 동안에 악수를 나눈 사람의 수는 약 30만명에 달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는 3개월 사이에 30만 명을 만나보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14년 동안에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바른 지적입니까?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온통 나 자신과 나와 관련한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마음 구석에 계신 분입니다. 나의 필요가 절실할 때만 그분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아예 찾지도 않습니다. 그의 변명은, ‘벼룩이도 낮짝이 있지 평소에 찾지 않다가 어떻게 필요할 때만 찾아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예 안 찾는 사람보다 그래도 찾는 사람을 반기십니다.

2
10절에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교회라고 하는 나무의 씨를 심는 달란트입니다.
교회의 터를 닦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 교회의 터위에 벽을 세우고, 기둥을 세우고, 문과 창을 만들고, 석가래를 놓고, 천장을 만들고, 지붕을 덮는 일을 맡기십니다. 이 다른 사람이란 교회를 지어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유형교회보다는 무형교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가 말씀하는 교회는 성도의 연합으로서의 교회이요, 또한 각 개인이 지어가는 그의 삶 자체가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에서도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그(=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터 위에 세워지는 교회 또한 성도들의 연합으로서의 교회와 각 성도의 삶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더 가깝습니다.

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삶--교회로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이를 대체할 수도 없고 대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정(情)과 욕심(慾心)이 나의 삶이라고 하는 교회의 터가 될 수 없으며, 우리의 철학이나 사상이 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인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에게 신령한 만나와 신령한 음료를 공급하시는 신령하고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신령한 반석이시며 우리 삶의 터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사건을 기록한 성경(출애굽기 17:6, 민수기 20:7-11)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새로 머무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드릴 때 그 반석에서 물이 솟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오래된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와 이스라엘의 행진하는 여정을 따라다니며 물을 낸 반석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4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磐石)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문학서인 탈무드의 기록은 이스라엘을 따라다닌 반석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바울은 이 반석을 그리스도와 연결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생동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삶의 굳건하고 신령한 터 되시는 반석이십니다.

12-13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반석되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이나 건물로 표현되기도 하는 교회를 세웁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24-27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첫째로는 그 집의 터가 반석이신 그리스도시요, 둘째로는 그 집의 재료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또한 그의 마음 밭이 옥토(沃土)인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되 말씀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거나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로는 말씀을 듣지만 마음에 전혀 받지 아니하고 따라서 행하지는 더욱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삶을 모래라고 하는 터 위에 짓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 터가 전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그 마음이 길가의 밭입니다.
둘째로는 말씀을 듣고 머리에는 담아두는 것 같지만 그 말씀을 따라 행하지는 않고 하나님을 자신의 정과 욕심을 채우는데만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세우는 자같지만 그렇지 않은 자이거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세우기는 한 것같은데, 그 집의 자료로 나무나 풀이나 짚을 사용한 자입니다. 환난이나 핍박이라고 하는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가 나고 바람이 몰아치매 날아가거나 흩어져버리거나 무너져내립니다. 지진 뒤에 불이 일어나면 다 타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돌밭이거나 가시 떨기의 밭입니다.

그리스도의 굳건한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건물을 세우는 사람은 비바람에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커다란 환난이나 시련이 그에게 닥쳐와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사단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다가 지쳐서 물러갑니다.

각각 공력(功力)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공력이란 각 사람의 행위--삶의 모습인데, 믿음의 결과로서의 행위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 기실은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 날(the Day)"이란 심판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공력(功力)의 어떠함을 판단하시는 날이 임할 것인데 사르는 불(Consuming Fire)로서 임하실 것입니다.

14-15절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삶을 살았기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은 사람이면, 이 사람은 불로 공력이 어떠함을 보고자 할 때 그 건물이 끄떡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집니다. 곧 생명의 면류관이요, 의의 면류관이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그 집을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믿음이 적은 자요 육신에 속한 자이기에 그 집이 불에 다 타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의 믿음의 모습은 벌거벗은 자와도 같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는데 그의 구원은 벌거숭이의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16-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때(요한 2:19-21),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는데, 그때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인 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믿는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몸 안에 “하나님의 영”--성령이 거하시는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걸어 다니는 교회요 성전입니다(walking church or temple).
모세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동안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이동(移動)하는 성막(moving tabernacle)에 거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에서 스데반은 이를 광야교회(ἡ ἐκκλησία ἐν τῇ ἐρήμῳ: the church in the wilderness)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인생이라고 하는 광야를 지나 영적 요단 강을 건너 영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행진하는 광야교회”(a marching church in the wilderness)입니다.

광야를 행진할 때 우리에 앞서 가시며 우리의 길을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우리의 행진에 함께 하시는 우리에게 영의 양식과 신령한 물을 공급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서 느끼십니까?

우리는 일생을 거쳐 성전을 더 아름답게 더 거룩하게 지어갑니다.
우리의 참된 성전은 유형의 건물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는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7년에 걸쳐서 지어졌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 후에 스룹바벨 성전은 4개월만에,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은 80년에 걸쳐서 완성되었습니다.
헤롯 성전이 웅장하고 아름다웠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계시지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폐하실 때, 예수님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신대로, 철저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는 헤롯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사용한 외적 재료는 금이나 은이었을지라도 마음 중심의 재료는 나무나 풀이나 짚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형 건물에 대한 한국 교회들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대형 건물이 교인들에게 뿌듯함이 되며 자랑거리가 됩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나’라고 하는 ‘주님의 교회’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가 함입니다.
내 속에 역사하시며 나의 삶을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며 바라봄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위로가 있으며 믿는 사람의 자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원하시는 궁극적인 삶의 모습은 거룩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씀하실 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고 명하십니다.
우리의 거룩은 구분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獻身)하는 삶입니다.

3
우리의 믿음의 삶이 교회이요 성전입니다.
우리의 삶--교회는 그리스도와 그 말씀이라고 하는 참된 터 위에 지어져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믿음의 집을 지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인생이라고 하는 광야를 행진하는 광야교회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우리의 삶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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