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3, 2014

“하나님의 밭과 일꾼들” (고전 3:1-9)

“하나님의 밭과 일꾼들” (고전 3:1-9)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각각 주께서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使役者)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
 

1
수천 명이 모이는 미국에 있는 커다란 한인 교회들에 연속적으로 교회가 갈리거나 상당수의 교인들이 떨어져나가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목회자와 장로들 사이의 갈등인데 갈등의 원인은 현재의 목회자와 과거의 목회자와의 비교에서 비롯됩니다. 그 장로님들은 어떤 분들인가 하면 과거의 목사님과 교회의 어려운 시절부터 같이 기도하고 그 교회 성장을 위해서 수고와 봉사를 많이 한 분들입니다. 과거의 목사님의 목회 방침과 목회 철학에 젖어 있기에 새 목사님의 방법과 철학이 쉽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새 목사님과 조그만 문제로 부딪힐 때마다 그들과 함께 어려움을 같이한, 지금은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되어 있는 옛 목사님을 찾아가 호소합니다. 그 원로 목사님이 지혜로와 현재의 목사님과 잘 협력하라고 말하더라도, 현재의 목사님과 문제  없이 잘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에서 25년 이상의 교회 역사를 갖고 있는, 원로목사를 둔 제법 큰 한인교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한 교회의 원로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교회에서 20년 이상을 시무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보니 목사님과 교인들 사이에 고은 정 미운 정이 다 들고 그 목사님 스타일에 맞추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카리스마가 있는 목사님의 경우는 더 합니다. 그런 관계로 새 목사님의 목회하는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단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원로목사를 둔 한국의 교회들에서도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한국의 대표적 장로교회들에서도 오랜 기간동안 이러한 문제로 후임 목사님이 소신있는 목회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래된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 제동을 겁니다: “전에 목사님은 이렇게 하셨는데요. 전에 목사님은 이런 일은 하지 않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목회의 방법을 모르는 것이 문제이며 인간의 편가름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목회의 주인이시요, A 목사나 B 목사나 C 목사는 참 목회자 되시는 하나님을 돕는 보조 목회자임을 알 때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평신도들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목회가 잘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복음이 주위에 전파되어지게 할 것입니다.

2
1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2장 14-15절에서 육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에 대해서 언급한 바울은 3장 1절에서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2장 15-16절에 이른 대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변하는 능력이 있으나 자기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꺼리와 비판꺼리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그 흔적을 몸--곧 그의 삶 가운데 지닌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육에 속한 자와는 달리, 하나님의 일과 성령을 받는 일을 미련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노라 변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기도로써 교통함이 좋음을 알지만, 당장 급한 세상의 일 때문에 할 수 없노라 말하는 사람입니다. 신령한 자는 영--속사람의 지배를 받는 사람인 반면에,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일--곧 욕심과 염려에 의하여 지배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신령한 자의 밭은 좋은 땅이고 육신에 속한 자의 밭은 돌밭과 가시떨기 위입니다. 좋은 땅을 가진 신령한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달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얻는데(마태 13:8, 23), 돌밭을 가진 육신에 속한 자는 말씀의 씨가 떨어지매 기쁨으로 받고 싹은 내나 뿌리가 깊지 않으므로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 곧 말라버립니다(마태 13:20-21). 그런가 하면, 가시 떨기의 밭을 가진 육신에 속한 자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念慮)와 재리(財利)의 유혹(誘惑)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여전히 육신에 속하여 믿음이 자라지 않기에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음입니다.

2장 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대하실 때 온전한 자--성숙한 자를 대하심같이 하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갓난아기의 재롱이 한 살때까지는 귀엽지만, 그 아이가 십년이 지나 이제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도 떼를 쓰고 재롱을 부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부모님에게 귀염이 아니라 근심꺼리가 됩니다.

2절에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젖이란 믿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기본 교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 말씀의 초보이며 그리스도 도의 초보입니다.
곧, 구원에 관한 기본 교리--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와 안수와 부활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6장 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때가 오래이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分辨)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권면합니다.

밥이나 단단한 식물은 어린아이가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자라나기 위해서 필요한 음식물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젖먹이 그리스도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또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성장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불평이나 하고 자기의 필요한 것만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교인이 아니라, 감사하고 하나님과 그의 몸되신 교회를 위해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생각하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조그마한 주님 사랑과 감사에 쉽게 감동하시고, 대견해하시고, 기뻐하시는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증거합니다.

3절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육신에 속하였나 영에 속하였나’는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판단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생각하고 행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근심시켜드리며, 상심시켜드리며, 슬프게 해드림은 그 사람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편가름을 하고, 다른 성도를 비방하고, 자신의 배나 채우는 사람은 아직 육신에 속한 교인입니다.

4절에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원로목사님을, 나는 현재 목사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참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앞에서 언급한 원로목사파와 현재목사파로 갈린 LA의 한 대형 한인교회는 그들의 교회 건물이 누구에게 속하여야 마땅한지를 묻기 위해서 소송을 제기하고 세상법정에 판단을 의뢰하였습니다.
어디 그 교회뿐입니까? 적지 않은 한인 교회들이 갈라질 때 마다 교회 건물과 재산의 귀속문제로 소송을 제기합니다.

나는 이 교회를 개척한 바울에게 속하였다, 나는 설교를 잘 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며 분당, 분파의 행위를 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인이긴커녕 사람도 아니다”라고 꾸짖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연합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때문입니다.
1장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질문한 바 있습니다.

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도 아볼로도 고린도 교인의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능력과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며 고린도 교인들로 하나님을 믿게 하고 또한 그들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사역자(διάκονοι)일뿐입니다.
사역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는 영어의 ‘deacon’이나 ‘minister’로 번역되는데, 교회 직분 중 목사나 집사가 다 이에서 나왔습니다. 그 원래 의미는 ‘일꾼’이란 뜻입니다.
목사뿐아니라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대형화 되어가면서 목사가 일꾼으로 사역하지 않고 주님의 자리에 앉아서 교회 주인의 행세를 하며 대접받고자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는 다른 교인들과 함께 일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함에 있습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선포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6-7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를 개척한 사람도 현재 교회를 사역하는 목회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일꾼이요 도구일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무와도 같은 교회를 자라나게 하시는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무의 씨를 공급하시며, 나무가 자랄 수 있게 비와 햇빛을 고루 내리십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교회라고 하는 나무의 씨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심은 사람일뿐입니다. 아볼로는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내리신 비가 저수지에 고여있는데, 이 빗물을 떠서 나무에 물을 준 사람입니다. 그들이 씨를 심고 물을 주지만 햇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나무는 자랄 수 없습니다.

8절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우리가 어떤 일을 맡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리의 씨를 뿌리고, 어떤 사람은 이에 물주는 일을 맡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겨자씨를 뿌리고, 또 어떤 사람은 소나무에 물주는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각자의 재능과 달란트에 따라 다른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일꾼들이 어떤 일을 맡았느냐가 아니라, 그 일꾼들이 그 일을 감당함에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열심히 일하였나로 상급을 주시는 공평하신 분입니다.

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하나님의 동역자들(συνεργοί)”이라고 표현합니다. 동역자란 ‘함께 일하는 자’란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심고, 이 말씀의 나무가 자라도록 물을 주는 일을 맡음에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하나님의 밭이 어떤 질(質)의 밭인가, 또 하나님의 집이 어떤 재료를 사용한 집인가는 하나님이 결정하시지 않고, 그 밭과 집되는 교인들에 의하여 결정되어집니다.
목회자를 포함하여 교인 전체로 교회라고 하는 밭의 질과 집의 재료가 결정됩니다.
또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각 개인의 밭의 질과 집의 재료가 결정됩니다.

밭은 길가의 밭이 될 수도 있고, 돌밭이 될 수도 있고, 가시 떨기 위의 밭이 될 수도 있고, 좋은 밭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길가의 밭일뿐입니다. 씨가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육에 속한 자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는 하되 환난과 핍박에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 사람은 돌밭입니다. 씨가 뿌리는 내되 곧 말라 죽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또 자라기도 하되 시시때때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비비꼬이면서 제한적으로밖에 자라지 못하는 사람은 가시 떨기위의 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자라되 곧게 뻗은 침엽수처럼 높게 자라는 사람은 좋은 밭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겸손과 순종으로 그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갑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걷우는 밭을 가진 이 사람은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입니다.

3
씨를 심는 사람이나 물주는 사람은 자기의 일한 것에 따라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일꾼일뿐입니다.
밭으로서 성도가 주의하고 경계하여야 할 것은 씨뿌리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렸나 아니면 사단의 독의 씨를 뿌렸나 입니다. 물 주는 이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주었는가 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진 것이 확실하다면 이제 나의 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를 자라나게 하는 이가 하나님 되심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결실이 달라집니다.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여러분의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시며 많은 결실을 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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