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머리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하늘로 올리우신지도 벌써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2,000년 가까이 외쳐졌는데 세상은 지금 어떻습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과연 늘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지구 상의 10억이상의 인구가 크리스천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흐른 세월만큼이나, 늘어난 크리스천의 숫자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느껴지지 않음은 웬일인가요?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을 살펴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당(分黨)·분쟁(分爭)의 문제가 있었습니다(1-4장). 어떤 사람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은 아볼로에게, 어떤 사람은 게바에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요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목사파다 장로파다, 원로목사파다 담임목사파다 분파(分派)가 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와 그리스도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그리스도께서 나뉘어서야 되겠습니까? 목사도 장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직분인데 이로써 교회가 나뉘어야 하겠습니까? 교회 안에 부자(富者)와 빈자(貧者)가 섞이지 못하고, 노인층과 청년층이 대화의 단절을 느끼고, 지식층과 비지식층의 관심이 다릅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그들의 관심과 화제는 온통 세상에 쏠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알기로 작정했다면, 대화의 단절이 없을 것이고, 관심이 다를 리 없을 터이요, 교회 안에 섞이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요, 허물지 못할 벽이 없을 터인데, 우리가 알기로 작정한 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음행(淫行)과 송사(訟事)의 문제가 있었습니다(5-7장). 요즘 크리스천의 삶이 고린도 교인의 삶에서 더 나아졌습니까?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 보다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내세울 근거와 건덕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의 비윤리적인 사건의 중심에 크리스천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을 강조하였기에 크리스천의 도덕과 윤리는 타락하여도 좋습니까? 오해(誤解)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자의 삶이 어떠할 것을 그의 서신마다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화(聖化)의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고(10:23-24 참조), 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의 문제가 있었습니다(8-10장). 헬라 문화권에 살던 이방인들에게는 제우스상이, 아프로디테상이 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와 북방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과 그의 후예들에게는 비록 ‘여호와’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금송아지가 우상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거민들의 신들--바알과 아세라, 그모스와 밀곰과 몰록 등이 우상이었습니다. 현대인에게 여전히 우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상당수가 재물과 권력을 그들의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학문과 명예를 그들의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명 또는 두명의 ‘귀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식을 그들의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 6:24).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7-38). 자본주의(資本主義) 경제하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재물에 대한 추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학문을 본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지식 추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부모
에게 자식 사랑함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재물이나 학문이나 자식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에서 떠나 있다면 이는 우상숭배(偶像崇拜)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공중예배(公衆禮拜)의 문제가 있었습니다(11-14장).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 교회에 엄연히 존재하여야 할 질서의 무시(無視) 혹은 경시(輕視)가 교회를 소란케 합니다.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은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개인의 전유물(專有物)인양 오용(誤用) 또는 남용(濫用)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분이신데 부릴 수 있는 영쯤으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전히 잘 사용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13장). 우리에게 제대로 된 하나님 사랑함과 이를 위한 이웃 사랑함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예배와 삶으로 주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에는 예배의 형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사이버 교회와 사이버 예배가 유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이버 교인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리얼플레이어(real player) 혹은 다른 오디오-비디오(audio-video) 매체를 사용하여 사이버 목회자의 설교를 청취하며 인터넷으로 목회자와 성도들간에 교제하고 친교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배와 찬양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며,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며 감동케 하시는 역사(役事)는 계속될 것입니다.
부활(復活)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습니다(15장).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부활과 영생의 문제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과 영생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축복받고 마음이 평안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몸으로 부활될 것은 어쩐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우리 믿음의 본질(本質)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장 14절(또한 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 말씀합니다. 몸으로의 부활이 없이 영혼만 영생함을 믿는다고 하면 이 또한 잘못된 부활-영생 신앙입니다. 2세기 영지주의자들(Gnostics)이 이단(異端)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몸으로의 부활을 믿지 않아서였습니다. 지금도 뉴에이지(New Age)라든가 그럴사한 가면을 쓰고 믿음을 말하지만 유사품(類似品)인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本質)을 오도(誤導) 또는 호도(糊塗)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존재입니다.
가난한 성도를 위한 모금(募金)의 문제가 있었습니다(16장).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을 구제하고, 영접하고, 돌아보고, 방문함이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마태 25:34-40).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막상 주위 사람들을 대함에는 인색(吝嗇)함과 이기심(利己心)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구제(救濟)하고 희생(犧牲)은 하지만 사랑이 없이 행해서도 안될 일입니다(고전 13:3). 바울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2,000년전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살펴봄이 21세기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은 동일한 잘못들을 반복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교회들을 향하신 주님의 축복과 칭찬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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