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집주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로마서 16:3-5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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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교회는 몇 천명이 모이던 대형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마가의 다락방’이라고도 불리는 마리아의 집에서 120명이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는데,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성령 충만해진 사도들, 특히 베드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증거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침으로 삼천 명이 (행전 2:41), 또한 오천 명이(행전 4:4) 더하여졌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은데, 교회사적으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은 2세기 말 이후에나 찾아볼 수 있으므로 아마도 큰 유대인 공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대형화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사도행전 8장과 12장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교회의 성도들을 흩으시어 각 곳으로 퍼져서 전도하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가정교회(House Church)들은 핍박이 심하던 시절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모임의 형태였는데, 한 지역에 모이는 성도들 중에 비교적 유여(裕餘)하거나 커다란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의 집을 예배의 장소로 제공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의 집을 예배나 기타 모임의 장소로 제공하기에 마음이 넓고 손님대접을 잘 하는 성격의 사람이라야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가 커지기 전에 모였던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행전 12:12)도 가정교회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가정교회의 처음 시작은 자주(紫紬) 장사 루디아의 집(행전 16:40)에 있었고, 로마에서의 가정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롬 16:5; 고전 16:19)에 있었고, 라오디게아에서의 가정교회는 눔바의 집(골 4:15)에 있었고, 골로새에서의 가정교회는 빌레몬의 집(몬 1:2)에 있었습니다. 지역이 비교적 넓은 갈라디아에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데(갈 1:2) 이들 또한 여러 명의 성도들이 자신의 집들을 예배의 장소--가정교회--로 제공한 것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들도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와 동일한 것으로서 이들은 살벌한 문화혁명(文化革命) 기간 중에도 모이기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모여 문화혁명이 끝난 다음에 교회가 말살되지 않고 오히려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혁명 전보다 몇 십 배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거처를 예배 장소로 제공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집과 사역을 축복하셔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놀랍게 증가시키셨습니다.
현재 중국에 있는 교회의 형태 중에 삼자교회와 처소교회와 지하교회가 있는데, 삼자교회는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로서 보통 몇 천명씩 모입니다. 전에는 어용적인 성격을 띈 것도 사실이지만 요즘은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한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지하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이 삼자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변질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북한에도 지하 가정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북한 평양에 봉수교회가 있어서 그곳에서 예배도 드리는 것 같지만, 그곳은 참된 의미에서 교회라고 불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이순옥씨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간증집회도 하는데 2002년도 미의회 증언에서 ‘많은 북한주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러나 환경의 제약 때문에 단지 마음속으로만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는 지하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북한당국이 그러한 지하활동을 단속하고 있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북한의 교회들을 지하교회라고 부른다면 그에 대한 정의는 바뀌어야 될 것입니다. 교회는 3명 또는 그 이상의 신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에서는 단 한 명만으로도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나 폐쇄된 국가에서의 가정교회의 역할은 순수한 복음의 고수였습니다.
현대교회에서의 가정교회에 해당하는 구역의 역할은 우리의 믿음과 말씀에 대한 열망을 더욱 진솔하게 다지고 확인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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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주위에 있는 부부 중에 대표적으로 신앙의 본을 보인 부부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그들은 원래 로마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로마의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킬 때 고린도로 이주해왔습니다.
그들이 처음 바울을 만나게 된 일이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도 바울과 같이 장막을 깁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쉽게 친하여지게 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 로마에 있을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후에 로마서를 쓰게 된 것도 아마도 이들과의 인연과 이들을 통하여 로마에 있던 성도들의 사정을 들었던 까닭일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동역하면서 바울을 위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8장 26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에베소로 옮겨가 그곳에서 아볼로를 만나고 아볼로를 데려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가르치고 믿음의 훈련을 시켜서 나중에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의 제 이대 목회자가 되게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로마에서의 유대인 추방령이 해제되었을 때에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자기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하였고, 그 뒤에 바울의 말년에는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기록된 대로 에베소에 머물면서 디모데의 목회를 돕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6장 3-5절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할 때는 로마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하고 있을 때입니다.
3절: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는 개인적으로 ‘동역자’(co-worker)란 말을 좋아합니다. 교회의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는 여럿이 협력해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는 자신을 드러내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목회자와 교우들의 동역자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4절: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저 바울의 형식적인 ‘동역자’(co-worker)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정도로 바울을 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맞기도 많이 하고, 갇히기도 많이 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위험 가운데 바울과 함께 하기를 원하며 바울은 위험에서 구하고 그들 자신을 위험에 놓기를 자처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에게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다른 교회들에게도 그들의 긍휼과 관용의 마음으로 은혜를 끼친 사람들이었습니다.
해서 이방인의 교회들이 그들에게 감사하였습니다.
5절상: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전문 목회자도 아니었고 어느 교회가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도 아니었지만, 가는 곳마다 주님을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형편 가운데 전도하고 자기들에게 허락된 공간을 가정교회로 내어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 이들 말고 또 압비아와 빌레몬의 부부가 골로새의 자기의 집을 성도들을 위하여 내놓은 것이 언급되는데,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부부가 함께 협력하고 봉사하고 주님을 위할 때 그들은 이미 그들의 삶으로 전도의 상당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희생과 헌신이 현대교회들의 구역, 속, 목장, 셀(cell) 또는 가정교회라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지는 모든 소그룹의 모델입니다.
구역은 사실 가정에서 모일 수만 있다면 가정에서 모이는 것이 더 열린 마음의 장소와 시간이 되기 때문에 좋지만 현대인들의 여러 가지 제약상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모이든지 교회에서 모이든지 구역은 구역원들에게 한 주간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나누며,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한 공동체의 지체임이 느껴지는 곳. 가슴 답답했던 쓰라린 일들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모두가 내 아픔처럼 함께 손잡고 기도함으로 막혔던 가슴이 확 뚫리는 곳.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고 함께 나누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는 곳. 주님의 살아 계심과 환난 중에 역사하심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확인되고 생활 가운데 체험되어 서로의 입술을 통해 간증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이 가장 큰 행복이요 가장 큰 축복임을 깨닫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구역장이나 속장이 말씀을 가르치거나 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말씀을 인도하는 일은 구역인도자가 하고, 구역장은 구역의 행정적 문제와 영적인 관리의 일을 감당합니다.
구역장은 구역의 행정적-영적인 관리자요, 파수군이요, 또한 신앙적 지도자입니다.
구역장은 보통 한 구역에서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사람, 구역원의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들이나 질문들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맡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구역원을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즐기는 사람, 전화로 심방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구역장은 구역을 열린 대화의 광장으로, 신앙의 초보에 있는 사람에게 배움을 제공하는 장소로, 자칫 냉랭할 수 있는 교회를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장소로 만드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의 구역은 교회를 성장케 하며 지탱시키는 작은 교회입니다. 이 구역들이 건강하여야지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구역이 부흥되어야지만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구역부흥의 일차적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구역장들과 구역인도자들인데 각 구역장은 구역을 위해서 특별히 더욱 헌신되어진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역 성장과 교회성장을 위해서 자신의 사명과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서 더욱 믿음의 좋은 본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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