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를 마치면서” (로마서 16: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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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중국선교를 위한 모임에 참석차 영국에 갔을 때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영국의 교회건물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교인의 수는 20-30명이 고작이라고 합니다. 50-60명이 모이면 제법 큰 교회축에 듭니다.
자연, 교회에서 지급하는 목사님들의 월생활비도 적어 보통 700-800 파운드(미화로는 1150-1250불)에 불과하여 집세와 자동차세를 내고 나면 전혀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해서, 국가에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생활비보조를 주는데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사모님들이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부러워하고 어떤 목사님들은 될 수 있으면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미국에 와서 미국교회를 목회하고 싶어합니다.
영국신학자들은 독일, 미국과 영국의 신학의 차이를 3C로 표현하였는데, 즉, 독일이 신학을 타락시키고(corrupting), 이를 이어받은 미국이 무너뜨리고(collapsing), 영국이 이를 고치고있다(correcting)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바로잡고있다는 나라의 교회가 여전히 침체의 늪을 헤매고있는 것은 그들이 말과 생각으로만 바로 잡고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교회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끊임없는 변혁(reforming)을 요구합니다.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믿음은 잘못된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말로는 바로잡고(correcting) 변혁한다(reforming)고 하면서 자신은 변화가 없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로마서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로마서의 전부가 믿음으로 인한 구원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교리부분을 설명함입니다. 로마서의 또 다른 중요한 나머지 부분은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은 성화되어지는 과정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모습은 역동적(dynamic)인--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력이 있으면서도 점진적(漸進的)으로 진보(進步)하는 삶입니다.
나는 이제 늙어서, 나는 죽을병이 들어서, 나는 하나님께 갈 날이 가까워서 그냥 이대로 살다가 가겠노라 말하는 사람은 잘못된 믿음의 삶을 살고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면 이를수록, 주님 만날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모습은 더욱 더 변혁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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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23절에서 바울은 현재 그와 함께 있는 동역자들의 안부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합니다.
21절에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Timothy)는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바울이 아들처럼 여기며 사랑한 그의 동역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만난 것은 2차 전도여행 초기에 소아시아의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요 그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줄곧 바울을 따라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디모데전·후서에서 알 수 있듯이 후에 디모데는 소아시아 에베소지방에서 목회를 감당하고 바울은 이 디모데에게 선배 목회자로서 또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목회에 관한 소견과 비전을 권고합니다.
누기오(Lucius)는 바울이 아직 선교활동을 하기 전 안디옥교회에 머물 때 알던 사람인데(행전 13:1) 현재 바울과 같이 있습니다.
야손(Jason)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마게도냐 지방의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에 만난 사람으로 바울에 대신하여 매까지 맞은 사람입니다.(행전 17:5-9)
22절에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바울을 위해 편지를 써주고 있는 더디오(Tertius)도 자신의 문안을 전합니다.
바울이 세 차례의 전도여행을 감당한 것은 그의 나이 50에서 62-3세에 이르는 시기였습니다. 요즘은 한창 활동하는 나이이지만 그 당시의 기준으로는 노인중에 노인에 해당합니다.
신약성경의 반에 해당하는 바울의 저서들은 그의 나이 60-70에 쓰여진 편지들입니다.
평안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쓰여진 편지들이 아니라 6편은 전도여행을 하는 도중에, 4편은 가택연금이나 구금의 상태에서, 나머지 3편 목회서신은 지하의 감옥에 쇠사슬로 묶인 상황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하나같이 다 다른 사람들이 대신 써준 편지들입니다. 몸이 묶여있는 상태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도 바울의 눈이 시원치 않아서 거의 글을 쓸 수 없는 형편입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바울은 몸에 여러 가지 불치의 병이 있어서 몸이 참으로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몸의 불편함과 노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함으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스트로크(stroke)로 다리가 마비된 어느 미국인이 휠체어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였습니다. 그가 동경에 이르렀을 때, 어느 목사님이 그에게 어떻게 그런 몸으로 세계일주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내가 비록 몸은 이와 같이 중풍병에 걸렸지만 내 마음은 중풍병자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멀쩡한 몸으로 중풍병자와 같이 마비된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감사를 감사로 여기지 않고,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맛보고도 감격함이 없을 때 이 사람은 마음에 중풍병을 앓는 사람이며 이런 마비된 마음으로는 주님의 선(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입니다.
겉사람이 날로 낡아지고 병듦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우리의 본향(本鄕)인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보일수록 더욱 더 새로와져야 할 것입니다.
23절에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Gaius)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Erastus)와 형제 구아도(Quartus)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서 보는 바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오직 두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는데 가이오가 그 둘중 한 사람입니다.
가이오는 고린도 가정교회(House Church)의 주인으로서 바울과 자기 집에서 모이는 성도들을 위해서 음식으로 잘 대접하였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달란트와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도, 성도들을 대접하는 것도, 헌물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감당하든지 부득이함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할 것이며,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감사함으로 할 것입니다.
25-26절에서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傳播)함은 영세(永世)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에게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라.”
바울이 전한 것은 복음(Gospel)과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입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good news)으로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될 수 없고 의로와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한 방법을 마련하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의로와지고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오래 전부터 때가 찬 경륜의 날이 이를 때까지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 쉬임 없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약속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소망 중에 이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 비밀은 다름아니라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민족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로와지고 하나님나라의 약속을 보증으로 얻은 시민들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또 1장 13-14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讚美)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26절 후반부터 27절에서 바울은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고 축복기도합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시는 그 복음의 진리로 우리를 견고케 하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견고한 반석 위에 우리의 성화의 삶을 이루어나갈 때 이로서 우리는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합니다.
‘말미암아’(διὰ)는 영어로는 ‘through(통하여)’로 번역되었는데 곧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움에 나아갈 수 있고 영광의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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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D. L. Moody)는, “회개(Repentance)는 마음의 변화로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마음이고, 회심(Conversion)은 삶의 변화로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삶이고, 거듭남(Regeneration)은 성품의 변화로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가슴이고, 의로와짐(Justification)은 상태의 변화로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입장이고, 양자 됨(Adoption)은 가정의 변화로서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관계이고, 성화(Sanctification)는 봉사의 변화로서 하나님에로의 구분(區分)이고, 영화(Sanctification)는 장소의 변화로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조건”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삶은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고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으로, 새로운 가슴으로, 새로운 입장으로, 새로운 관계로, 새로운 구분으로, 새로운 조건으로 발전적으로 변화하며 매 순간 하나님께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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