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9, 2014

“교회내에서 경계할 사람들” (로마서 16:17-20)

                                     “교회내에서 경계할 사람들” (로마서 16:17-20)


                                                                              1
우스개 소리입니다. 옛날에 공자님과 부처님과 예수님이 함께 소풍을 갔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연못에 어떤 청년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공자님은 그 장면을 보고서, “군자는 대로행인데 어찌하여 큰 길로 가지 않다가 물에 빠져 고생하는고?” 라고 혀를 차고 책망하며 그냥 지나갑니다.
부처님은 “허허,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물에 빠져 고난당하는고? 업보로다” 하며 그냥 지나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고 윗저고리를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그 청년을 구해냈습니다. 이것이 생색내지않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신학적인 논쟁꺼리로서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인 믿음과 신본주의(神本主義)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인본주의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높이에까지 우리 인간이 이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을 우리의 형편과 한계로까지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 인간의 성정(性情)을 닮은 우리와 모든 면에서 비슷한 그러나 우리 모다 약간 나은 존재를 마음 속에 그리고 그를 믿고 그에게 나의 문제 해결을 부탁합니다.
신본주의적인 믿음은 우리 인간과는 확연히 구분되어 홀로 존재하시는, 그 절대적이고 높이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신앙(信仰)이란 말 자체가 ‘믿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인본주의적인 믿음은 성경도 나의 편의(便宜)대로 나를 위해서 해석합니다.
신본주의적인 믿음은 성경을 해석하되 나를 합리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서 나를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신앙관에서는 죄의식(罪意識)과 회개(悔改)가 약화되기 쉽습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연약한 존재인데 해서, 죄를 짓고 실수를 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렇게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구주로서의 예수님’의 의미는 그저 내가 약할 때에 어려울 때에 수퍼-맨(Superman)과 같이 갑자기 나타나  나를 도와주고 구해주신 다음 사라지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말과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나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인--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육에 속한 세상사람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다음에는 나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헛맹세를 하고, 세상사람과 마찬가지로 신의(信義)·성실(誠實)을 저버리고,  부당(不當)한 방법으로 이(利)를 취하고, 믿음없는 말을 계속한다면, 이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2
로마서 16장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6절까지는 로마 교인들에게 로마에 있는 바울의 지난 날의 동역자들에게 문안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고, 오늘 본문 17-20절에서는 교회 내에 있는 거짓교사들--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무리들을 경계할 것을 경고하고, 21-27절에서는 편지를 쓸 때 바울과 같이 있는 현재의 동역자들의 문안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전하고 그의 편지의 취지(趣旨)를 요약함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17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교훈(敎訓)’이란 바울이 이제까지 로마서에서 줄곧 말하여온 하나님의 복음--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났는데, 곧,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 구원은 율법으로서도, 할례로서도, 또한 우리의 행함으로서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믿음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로 시작하여,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교회라고 하는 몸을 구성하는 지체로서 교회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땅끝을 향하여 복음증거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7절에서 바울이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이나 세상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그 교훈을 거스리는 거짓교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7-8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경고합니다.

또, 디모데전서 6장 3-5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敬虔)에 관한 교훈(敎訓)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辯論)과 언쟁(言爭)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妬忌)와 분쟁(分爭)과 훼방(毁謗)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腐敗)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敬虔)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장을 하지 않고, 세상사람의 변론(辯論)을 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고 분열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특징(特徵)은 교회가 요동(搖動)하든 깨어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믿음 없는 주장을 관철하여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 사람은 또 교회 내에서 ‘거치게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거치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의 원뜻은 ‘죄짓게 하다’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다’ ‘죄 가운데 빠지게 하다’입니다. 그밖에, ‘넘어지게 하다’ ‘마음을 상하게 하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즉, 이 거짓교사들은 자기만 믿음이 없고 죄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위의 사람들도 믿음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고 해서 죄 가운데로 끌어들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9절 과 고린도전서 5장 6절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있는 선한 행동은 본받기가 어려운데, 믿음없는 죄의 행동은 전파하는 힘이 매우 강합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사단의 세력에 놓여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짓교사가 특정한 인물일 수도 있지만, 우리중 누구나가 어느 때에 이와같은 거짓교사의 역할을 하고있을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인간의 정리(情理)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만류하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는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듣습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대신에 불신앙의 마음으로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회내에서 다른 교우들을 넘어지게하고 거치게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내에 이러한 사람들이 있을 때, 바울은 이들과 대항하지 말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20-21절에서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말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辯論)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없는 말로 변론하고 분쟁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와 맞설 것이 아니라, 피하고 떠나라고 권면하십니다. 이와 맞서서 같이 변론하고 분쟁(分爭)하는 것이 어리석고 무익(無益)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迷惑)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지금은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로 기억되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많은 적으로 곤경을 치렀습니다.
그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지방에서 전도할 때,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들의 무리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그의 전도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뿐아니라, 그가 개척한 교회들에서도 가만히 들어온 거짓교사들이 그가 가르친 복음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세상적인 주장을 가르침으로서 곤욕과 비방과 어려움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를 인간적으로 괴롭힌 사람들도 적지아니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20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破船)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고,
이중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다시 디모데후서 4:14-15에서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고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자기의 배만 섬기고”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우리의 행동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입장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9절에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순종함’이란 말은 15장 18, 31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순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파쿠오(ὺπακούω)는 아래(under)란 뜻의 훞(ὺπ)과 듣다(hear)란 뜻의 아쿠오(ἀκούω)의 합성어입니다. 해서, ‘순종하다’란 ‘아래에서 듣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즉, 겸손한 마음으로 듣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고 풀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순종의 믿음’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안내자의 인도로 알프스산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꼭대기에 우뚝 서서 주변(周邊)을 돌아보려고 할 때에 안내자가 소리쳤습니다. “무릎을 꿇으세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갑니다.” 정상에 올랐다고 우쭐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려고 하다가 자신의 교만 때문에 떨어지기 쉽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교회생활을 30년 이상 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노라 하는 사람은 오늘 이 시간 우리 마음과 삶 속에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권면할 때,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말씀합니다.
‘선한 데 지혜롭다’는 뜻은 선한 일은 잘 분별하여서 이를 행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악한 데 미련하다’는 뜻은 악한 일에 관해서는 미련하고 약삭바르지 못하여서 이를 행하지 못함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남을 속이고 악을 행하는 데는 이력(履歷)이 나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에는 참으로 둔감합니다.

20절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교회 내에서 분쟁을 피하고 여러분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자를 살피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그를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여러분이 분쟁을 일으키고 성도를 거치게 하는 일을 하고있지나 않는가 살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대신에 부지부식중에 나의 배만 섬기고 있는지, 공교하고 세상적인 말로 순진하고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미혹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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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역설적(paradoxical)입니다.
세상에서 가난한 자는 부요한 자요, 세상에서 낮아지는 자는 높아지는 자요, 세상에서 섬기는 자는 섬김을 받는 자요, 세상에서 잃는 자는 얻는 자요, 세상 일에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일에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우리가 힘 쓸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우리 앞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혹 손해가 있더라도 믿음의 마음으로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 때,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을 괴롭힌 사단을 여러분의 발 아래 상하게 하시는 역사를 경험(經驗)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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