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9, 2014

“선교사로서 바울의 바람” (로마서 15:22-29)

                                           “선교사로서 바울의 바람” (로마서 15: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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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에 구(舊) 소련연방(the Soviet Union: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 무너져 내리고 한국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그곳에 들어갔을 때 많은 러시아인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러시아에 러시아정교(Russian Orthodox)가 있었지만, 그곳에는 말씀을 증거하는 예배가 없었기에 새로운 형태로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찬송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의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해서, 천 명이상 모이는 교회들이 이곳저곳에 생겨났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러시아인들이 빵을 구하기 힘들었을 때 교회를 찾으면 빵을 얻을 수 있었기에 찾았던 것이며,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형태의 예배와 찬송에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빵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한 가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에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러시아인들을 복음화시키기 위하여 한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까레이스키’라고 불리는 ‘고려인들’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까레이스키’-‘고려인’이란 이름은 조선조 말기인 1864년에 극심한 가난을 피하여 구 러시아의 연해주로 한인(韓人) 13가구가 이주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중국의 동포들을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구 소련지역의 한인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처음에 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에 몰려 살았는데, 스탈린(Joseph V. Stalin, 1879-1953)이 정권을 잡고 있던 1937년 9월, 러시아 극동지방의 한인들이 일본과 내통하고 일본을 지지할 것이라는 이유로 강제 이주를 결정한 지 단 두 달 만에 18만여 명을 기차에 태워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 중간 중간에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강제 이주된 중앙아시아에서 천신만고 끝에 자리를 잡았는가 했는데 이 지역에 새로 현지 민족에 의한 이슬람공화국들이 들어서면서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강요당하는 바람에 다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해서, 그들은 구(舊) 소련연방이 무너져 내린 다음에 다시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상당히 많은 수가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의 여러 도시들로 옮겨와 살고자 하지만 러시아 당국이 그들에게 쉽사리 시민권을 주지 않고 있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에 20만 명, 카자흐스탄에 10만여 명, 키르키즈스탄에 2만 명, 타지키스탄에 1만 5천 명 정도가 살고 있고, 우크라이나에 1만여 명, 그리고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에 11만여 명 등 45-50만 명가량이 구소련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고달프고 불안정하지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얼마를 그들을 무시하는 러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구소련 공화국들-지금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공화국들에 한인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200-300개 교회들에서는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을 위한 예배가 러시아어로 드려지는데, 90-95% 가량의 교회들에서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고려인들을 사용한 통역예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2005년 러시아를 방문하는 동안 두 차례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을 위한 예배에서 설교를 할 기회를 가졌었는데, 한 번은 빼쩨르부르그에서 다른 한 번은 블라디보스톡 공항 근처의 도시인 아르쫌에서였는데 두 번 모두 교인들 가운데 고려인이 통역을 맡았습니다. 이제는 상당히 많은 교회들에서 고려인들에 의한 통역예배가 전문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려인들의 구소련에서의 삶은 참으로 어려움의 연속이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복음의 도구로 또한 한인선교사들과 러시아인들 또는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공화국인들을 연결하는 다리로 축복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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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4절: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한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22-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로마방문의 원함과 계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고자 여러 번 원했지만 다른 사정으로 말미암아 갈 수 없었습니다. 현재 삼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지방인 아가야의 한 도시 고린도에 머물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우여곡절 끝에 모금이 완수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이곳 아가야에 있을 필요가 없음(23절)을 말합니다.
그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한 다음에는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서바나(=Spain)로 가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19절에서 보는 바대로 그리-스 반도의 북서쪽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땅끝보다 더 먼 땅끝인 서바나까지 갈 계획을 말합니다.
이는 말씀을 맡은 자의 나아갈 곳이 어디까지인가 우리에게 가르쳐줌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는 평안함 가운데 현재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항상 말씀을 전파할 기회를 얻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25-26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예루살렘에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몇 년씩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데다가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정부에서 주는 구제의 대상에서도 제외되어있습니다. 게다가, 때로는 박해가 심하여 숨어 다니다가 보니까 자연 굶주림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현재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지역에서 그의 대부분의 날을 보내지만 그 마음 속에 늘 그의 동포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별로 반기지 않지만 그는 자기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가슴속이 사무치도록 그들을 사랑합니다.
자신은 장막 만드는 일을 감당하며 때로는 배를 곯으며 살아가면서도 교회들에게 자신의 생활비를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지만 예루살렘의 가난한 동포들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모금 캠페인을 벌입니다.

바울의 일생은 전도여행의 삶입니다. 제 일차 전도여행은 소아시아를 다니며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제 이차 전도여행은 그리-스 반도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다니면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제 삼차 전도여행은 전도목적과 함께 일 이차 전도여행지였던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두루 다니면서 그가 이삼년에 걸쳐서 몇 차례의 편지를 띄우면서 당부해왔던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모금을 부탁한 돈을 수금하러 다녔습니다. 그가 직접 돈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신뢰성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수금케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아진 돈을 불우이웃인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그의 주요 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 돕는 일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9-10절에서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만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여 실천합니다.
해서, 고린도전서 16장 1-4절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어떤 방안을 마련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여 매주 이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금한 것을 바울은 ‘은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신 것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서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이 말씀한 대로 매주 구제헌금을 떼어놓았는데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에 바울은 다른 편지인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이 구제헌금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12-14절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케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고린도후서 9장 7-8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吝嗇)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신에게 백만 불이 생긴다면 그 돈을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질문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흔히 그중에 10-20만 불쯤은 교회를 위해서, 또 다른 10-20만 불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60-70만 불쯤 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수중에 갖고 있는 여유 돈 5만 불 중에 5천 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냐고 하면, 이 사람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화를 낼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그걸 나눠줘?”

27절: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7절에 ‘저희’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고 ‘그들’이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입니다.
저희가 그들에게 진 빚이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이 유대인들로 말미암고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파된 사실을 말합니다.
‘그들의 신령한 것’이란 좋은 소식-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복음을 나눠받아 이제 영생을 얻은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물질로 그들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그의 주요서신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누누이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평균의 경제원리(經濟原理)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세상을 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평균의 적당한 삶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로서 내려주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출애굽기 16:18)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공생주의(Commonism)의 삶도 평균의 경제원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 입을 것과 다른 쓸 것들을 서로 통용하였다(행전 2:44-47)고 했는데, 그들이 나눈 물건들은 그들의 창고를 일단 꽉꽉 채우고도 남은, 더 이상 두면 썩을 것을 나눈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외하고 모두 나누어주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균의 경제원리는 바울에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5병 2어의 기적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떼어 나눌 때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4,000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따라온 아이가 자기의 점심으로 준비한 어른 한 사람의 식사로도 오히려 부족한 양이었지만 이를 떼어 나눌 때 커다란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기를 원하는 기적은 우리의 계산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제한할 때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업을 감당한다고 하는 어떤 교회나 어떤 기관은 모으기는 잘하지만 나누어줄 줄은 전혀 모릅니다. 해서, 매년 은행에 몇 만 불, 몇 십만 불을 잔고로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업을 잘 감당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나 교회에 속한 기관의 일 년 예산은 거두어들인 만큼 내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평균의 경제원리를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전건축 목적이외에 달리 비축할 이유가 없는데도 교회나 기관이 무용(無用)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돈을 비축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물질을 바라봄에서 안전함을 찾고자함입니다.
마음을 든든히 하기 위하여 몇 십 만 불씩 은행에 채워두고도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하면서도 자칭 “하나님의 자녀”라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님 저에게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어찌 여기시겠습니까?
                                                   
29절: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29절에서 “충만한 축복”을 갖고 로마의 성도들에게 갈 것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1절에서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한다”고 표현했는데, “무슨 신령한 은사”나 “충만한 축복”이라 말씀한 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간증꺼리일 것입니다. 이를 로마의 성도들과 함께 나눔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를 바울은 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마음은 비장(悲壯)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가 모금한 돈을 가난한 성도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는 있을 것인가?
이러한 그의 심정을 우리는 사도행전 20장 이하를 읽을 때에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소아시아의 한 곳 에베소에 들른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할 때,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結縛)과 환난(患難)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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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로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그리고 아가야의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눠주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와 성도의 삶은 움켜지는 것이 아니라 유여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선교사로서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함이 물질적인 것을 나누고자 함이며 그의 동포인 유대인들에게 복음 증거할 기회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면, 그가 로마에 가기를 원함은 무슨 충만한 축복이나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자 함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어떻게 그를 견고케 하시며 위로하셨으며, 여러 가지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를 보호하시고 피하게 하셨는지,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약한 그를 사용하셔서 어떻게 복음증거의 사명을 해나가게 하셨는지 증거하고 나누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선교사로서 바울은 서바나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이 서바나에 가기를 원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명하신 바와 같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로마의 감옥에서 놓임을 받은 바울은 그가 소원한 대로 서바나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고 다시 로마에 돌아온 후에 붙잡혀 콜로세움에서 처형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기도하고 소망한 대로 하나님의 귀히 쓰임을 받은 복음전도의 일꾼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여러분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들 가운데 얼마를 예배통역자로 구소련 복음화를 위한 다리로 사용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사용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와 선교, 복음 증거를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하여 자원함과 기도함과 소망함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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