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동역자들” (로마서 16:1-16)
1
아직 한국 신학교는 그렇지 않지만 미국 신학교에 들어서면 금방 느낄 수 있는 것은 여학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프린스턴신학교를 다닐 때에도 여학생 수가 반 가까이 되었는데 지금은 교회 내에서 여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치 않는 극보수(極保守)의 신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학교의 여학생 수가 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남자들 가운데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는 수가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떤 미국 교계지도자는, ‘남자 목사님들이 떠난 자리를 여자 목사님들로 채울 수밖에 없는 실정인데 이렇게 가다가는 언젠가는 남자 목사님들의 품귀현상까지 생길 것’이라고 심각한 우려(憂慮)를 표명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남자 목사님이 절대적 다수를 이루고있는 한국교회에서는 이 말의 뜻이 쉽게 공감되지 않지만, 최근들어 여러 미국교회를 방문해보면 이 말씀의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에는 미국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자목 사님들은 거의 전부 부목사이거나 음악목사였는데 요즈음은 상당수의 담임목회를 하고있는 여자 목사님들을 발견합니다. 남자 목사님들이 목회현장을 떠나는 이유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에 가장 많은 것이 목회사역에서 목사로서 느끼는 보람은 줄어들고 대신에 평신도들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불화, 또 이로 인한 압박감등으로 목회를 중도포기하는 목사님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브루스 모힌리 목사님의 소설 “목사님 설교가 아주 신선해졌어요”(원제: Preaching with Freshness)에 등장하는 폴 앤드루스(Paul Andrews)목사는 한 교회에서 10년을 목회한 목사인데 최근 들어 여러 가지로 압박감(pressure)을 느낍니다. 그가 교회에서 하는 일들 하나 하나가 반대에 부딪히고 그위에 가장 그를 짖누르는 것은 그의 설교가 ‘시원치 않다’는 불평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를 ‘훌륭한 목사님’이라고 청빙에 앞장섰던 사람까지 자기가 실수를 하였다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폴목사는 ‘지난 10년동안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남이 알게 모르게 구석구석의 작은 일까지 감당했는데’ 하며 교인들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던 중 폴목사는 그동안 찾지않던 신학교에 들를 기회를 얻게 되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의 설교학 스승 비커슨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후 비커슨교수와 정기적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폴목사는 목회자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에 대해서 설명을 듣습니다.
폴목사는 그의 은사에게 교인들이 목사로서 그에게 바라는 일--곧, 그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이야기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제가 시내를 지나서 병원 심방을 해주기를 원하고, 집으로 심방해 주기를 원하고, 운영위원회를 주관하고, 교회행정 사무를 작은 일까지 처리하고, 지역사회 일들에 봉사하는 일 등등 그 모든 일들을 다 제가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비커슨교수는 그에게 권면할 때, 사도행전 6장 2절과 4절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供饋)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우리는 기도(祈禱)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에서 낙담(落膽)하고 기진(氣盡)하는 까닭은 혼자서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감당하기 때문에 정작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은 등한시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일을 분담하기 위해서 직분자를 세운 것처럼 이러한 일들을 과감히 교인들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생각에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도 그대로 놔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할 일이란 기도와 말씀 전함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비커슨교수는 폴목사에게 “설교는 목사의 고귀한(high) 부르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적인(whole) 부르심이라네. 설교는 목사의 전체 일이라네” 말씀합니다.
그는 이후 교회의 행정과 봉사의 일은 놔두고 기도와 설교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작정합니다. 그가 생각할 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던 것이 현실화되어 더많은 교인들이 봉사와 구제의 일에 참여하고, 그는 더 능력있고 신선한 설교를 하게 됨으로서 목회자의 위기를 넘깁니다.
교회의 발전과 성장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갈등하고 반목할 때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큰 일--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말씀의 꼴을 준비하기에 전념하고,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자신들을 목회자의 동역자(co-workers)로 여기고 목회자를 도와 목회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목사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설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구제와 봉사의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2
바울이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목회와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위에 그를 돕는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예와 같이 그의 목회가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낙담과 좌절가운데 빠지지 않았던 것은 실패할 때에도 그를 위로하고 용기를 돋우워줄 목회의 말없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꾼을 부르심에는 각각 그 받은 은사대로 다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권면의 일로, 어떤 사람은 구제하는 일로 부르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그러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장인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자상하게 현재 로마에 거주하고있는 그와 고난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던 복음의 동역자들과 말없이 그의 선교사역을 지원했던 성도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게중에는 바울이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도운 것은 그들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요,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기에 주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돕고자 함이었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먼저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갖고 갈 뵈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한 돈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가므로 그의 편지는 뵈뵈 편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달하고자 함입니다. 뵈뵈가 “겐그레아(Cenchreae) 교회의 일꾼”으로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 겐그레아(Cenchreae)라는 지명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의 끝 무렵에 들러 서원함이 있어 머리를 깎았던 곳으로 아가야지방 고린도의 옆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바울이 현재 3차여행의 말기에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서를 쓰고있다고 추정되므로 아마 고린도와 겐그레아를 통털어 뵈뵈가 가장 편지 전달하기에 적격자라고 판단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가 이 일을 자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서로 이웃한 나라이긴 하지만 당시에 여자의 몸으로서 이와같은 여행을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도 바울이 그에게 편지전달의 일을 맡긴 것은 그만큼 뵈뵈가 책임감이 있고 믿을만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우리에게까지 읽혀지는 것으로 보아 뵈뵈는 이 일을 잘 감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천거할 때에 2절에 보니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칭찬입니까?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뵈뵈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과 다른 크리스찬들을 숨겨주고 보호하기 위해서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짐작케 합니다.
3절이하에서 바울은 현재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지난 날의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3-4절에서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이 처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난 것은 6-7년전 2차 전도여행중 그가 현재 머물고있는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원래부터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이었는데 당시 로마황제 글라우디우스(Claudius)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고린도로 왔고 바울처럼 그들도 장막을 만드는 직종을 가진 까닭에 가까운 사귐이 있었습니다. 그 후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도 교회를 위해서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26에 있는 바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또한 에베소에 머물면서 아볼로라는 청년을 보고는 그를 데려다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침으로서 장차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의 뒤를 잇는 훌륭한 목회자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합니다.
이제 로마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잠잠해짐에 그들은 로마로 돌아갔지만, 바울은 그들과의 사귐과 동역함이 늘 감사하던 터에 그 마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어놓을만큼 그를 위해서 헌신·봉사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5절에 바울은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베네도의 이름은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해서, 그가 어떻게 바울의 사역을 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절을 통하여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10년여전 소아시아에서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에베네도를 만나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는 이를 받아드렸습니다. 이제 그가 로마에 거주하고있는 것을 바울이 알고있는 것으로 보아 에베네도가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인 이후에 줄곧 바울을 도아왔고 그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한 것을 짐작케 합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이제까지 좋은 신앙의 삶을 살고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6절에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말씀합니다.
성경에 마리아란 이름이 많이 등장하여 이 마리아가 누구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짐작컨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일 것입니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곳에 널찍한 집을 한 채 갖고있었는데 이곳은 초대교인들의 모임의 장소로 제공되었습니다.
그집이 넓어서 사도행전 1장에 보는 대로 그 다락방에서 120명의 문도(門徒)가 모여서 기도에 전념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이후로도 계속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예배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바울도 마가와 사귐이 있어 이곳에 종종 들렸을터인데, 이 마리아가 지금은 로마에 머물고 있습니다.
7절에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안드로니고는 남자이고 유니아는 여자인데 이들은 육체로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던 적이 있습니다. 그보다 앞서 그들은 다른 사도들의 사역을 도왔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바울보다 먼저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로서 그들 뒤에 그리스도를 믿은 바울을 열심히 도운 사람들입니다.
8절이하에서 15절까지 계속하여 바울은 크고 작은 일에 그를 도운 사람들을 일일히 소개하고 열거합니다.
“주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8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9절),”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10절),”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2절),”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버시(12절),”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12절)”라 함으로 길고 짧은 수식어와 함께 그들에게 문안을 전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름과 함께 자신의 행적이 들어남이 좋은 일인 듯 합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와 후세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과 치적이 들어나야 세상을 산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가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했던 사도보다 전도자보다 목회자보다 하나님의 칭찬이 더 큰 성도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감사하는 생을 살고 갔더니 주님께서는 그를 어떤 유명한 목사보다도 더 큰 상급으로 칭찬하시고 가까이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내고 이 세상에서 나의 한 일에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칭찬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위한 우리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특별한 달란트가 없어서 교회와 목회자를 도울 수 없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를 위한 기도, 전등 불을 끄는 것, 의자를 하나 접는 것, 말씀을 깨달아 이웃에게 전도하는 것, 이 모두가 동역자로서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크리스천 신문에 어떤 목사님이 그분의 교회의 한 권사님에 대한 글을 실음으로서 성도에 대한 자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을 소개함에 “물 권사”라고 하였습니다. 이 권사님이 목사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성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매주일 물컵을 준비함으로써 목사님의 설교를 돕는 일을 하셨는데, 목사님이 식상할까봐 한 주일은 보리차로 또 다른 주일은 옥수수차로, 또 다른 주일은 무슨 차로 메뉴를 바꾸어가며 준비하였는데 그 권사님의 정성이 목사님에게 큰 힘이 되고 해서 목사님은 매 주일 신명나게 설교한다고 자랑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모양으로 교회와 목회자의 동역자가 되고 계십니까?
생색이 안나고 궂은 일일지라도 열심과 정성으로 목회자와 함께 협력 목회를 하시는 여러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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