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로마서 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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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명이 길면 길수록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재의 생에 아쉬움과 미련이 많을 것이며 이 세상을 떠나고 쉽지 않습니다. 특히 그 삶이 편하고 좋을수록 그 삶이 그대로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한국에서 큰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상류층의 사람들입니다. 한국이 아직 중진국(中進國) 대열에 끼기 전에도 그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생활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건배(乾杯)를 할 때에 “위하여!”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에 “이대로!”라는 말을 사용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현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을 듯 보이던 사람들이지만 그들 가운데도 영혼의 갈급함이 있었고 그들 영혼의 갈급(渴急)함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활에서 해갈(解渴)됨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전의 삶의 모습을 버리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교회에 국회의원들도 있고 교수들도 있고 의사들도 있고 기업인들도 있지만, 자기 차례가 되어서 밖에 나가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의 차량정리를 함에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이상한 행동을 하게되면 그 사람의 신상(身上)에 어떤 변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평소에 지독히 인색(吝嗇)하던 사람이 자선을 베풀거나, 평소에 매우 게으르던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부리면 그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지않던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의 ‘옛사람(old being)’이 죽어야 합니다. 평소에 하지않던 행동을 하는 것이 단회적(單會的), 일시적(一時的)인 사건이어서는 안되고, 지속적(持續的)인 사건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장차 살 곳은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 하늘나라인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지금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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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5장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가 왜 필요하고 칭의의 결과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자고(自高)함과 우둔(愚鈍)함으로 하나님을 알되 인정치 않는 삶을 살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그대로 내어버려두셨는데 그 종국은 스스로는 그 죄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나님은 그들이 의로와질 수 있는 한 방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의로와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의로와지고 소망을 갖게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마련하여주신 값없는 은혜의 선물(膳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問題)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律法)을 주셨을 때 율법주심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으로 의로와지려고 헛되이 달려가다가 망했듯이, 신약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잘못 이해하여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죄된 삶을 반복(反復)하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시니까,’ ‘내가 회개(悔改)하기만 하면 용서(容恕)해주신다고 했으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했으니까’ 하며 죄(罪)인줄 알면서도 그 죄를 짐짓 반복하여 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크리스챤 인구가 전인구의 25%인데, 사기(詐欺)·부정(不正)등 사회윤리적 죄를 범하는 사람들의 50%가 크리스챤이라고 말함이 이를 대변(代辯)해줍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그 삶이 아무래도 좋다고, 행위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행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가르쳐주고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26-27절에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6장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그것이 그 사람의 마지막 단계(段階)가 아니라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첫 단계(段階)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화(聖化)에로 이르는 삶을 설명하기에 앞서 바울은 1-2절에서 앞에서 혹시 오해(誤解)가 있을까봐 중간 중간에 집어넣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앞서, 3장 8절에서,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3장 3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또 6장 15절에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의 모음인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율법을 흔히 토라(תורה)라고 하는데, 이는 좁은 의미로는 모세 5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 전체(全體)를 토라(תורה)--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약백성들의 율법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율법은 구야과 신약의 성경 전체가 율법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율법지킴이 필수사항(requirement)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하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로 성화(聖化)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세례(洗禮)는 의로와지기 위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뜻에서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그의 믿음으로 의로와진 것은 창세기 15장 6절의 사건으로서 그의 나이 86쯤이었을 때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기 이전에 순종(順從)함으로 갈대아-우르를 떠난 것이 창세기 11장말부터 12장에 걸쳐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75세 이전의 일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상호 약속의 표징인 할례를 받는 것은 창세기 17장에 기록되어있는데 이때 그의 나이 99세이었습니다.
할례(割禮)는 상호 약속(約束)의 표징(表徵)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할례를 통하여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의 할례의 표를 보시면서 그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과 민족과 복의 세가지 약속을 늘 기억하시며 지키십니다.
구약의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 세례를 통하여 “내가 이제 이후로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겠노라” 하나님과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표시를 보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사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약속한 우리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4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은 자들 가운데 장사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죄의 짐을 지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罪)와 허물은 죽은 자들과 함께 음부(Hades)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은 하나님께 대한 의(義)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는 우리도 하나님께 대한 의의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다 음부에 장사지낸 바 되었기에 우리의 옛사람은 이제 죽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생명만이 있습니다.
6-7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으로서 죽은 자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었고 우리의 죄에게 종 노릇하던 우리의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10-11절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함은 죄성과 죄로의 유혹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리고 온 ‘죄된 세상과 그 속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고 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살피고 또 찾아서 행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간구와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성령께 의지할 때 이러한 삶이 가능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20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백했습니다.
죄된 우리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나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지부식(不知不識) 간에 행하는 착한 행동으로 사람들 앞에 등불을 비추이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시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요 생활이 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은 우리가 죄와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이요 “하나님께 헌신하며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겠노라”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선포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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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와 사망의 땅 애굽을 나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로 예정되었지만 그들이 불순종과 불신앙을 보일 때, 출애굽한 60만의 장정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우리의 믿음을 지킬 뿐아니라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확실하게 유업으로 얻어야 할 것입니다.
Sunday, September 22, 2013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 (로마서 5:12-21)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 (로마서 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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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말 ‘불’과 영어 ‘화이어(fire)’가 전혀 무관(無關)한 것처럼 보이지만, 몇 개의 언어를 살펴보면 서로 조상이 같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 ‘화(火)’와 ‘화이어(fire)’는 좀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불어 ‘훼(feu)’와 독일어 ‘호이에르(feuer)’, 거기에 결정적으로 헬라어 ‘푸르(πύρ)’를 연결시키면 우리나라 말 ‘불’과 영어 ‘화이어(fire)’의 어원이 같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神)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이름도 사실은 헬라어 푸르(πύρ)가 불에 해당하는 단어임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이름이 아닙니다. 이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신들의 신 제우스(Zeus혹은 Jupiter)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에는 바위에 묶였다가 독수리에게 간(肝)과 내장(內臟)을 파먹혔다고 합니다. 그보다 앞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하여 판도라(Pandora: 인류최초의 여자)에게 상자를 들려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는데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해악(害惡)이 나오고 그 상자 속에는 희망(希望)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보는 해악(害惡)과 절망(絶望), 인류 불행(不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기원이나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들과 인간들의 사랑이 독창적(獨創的)인가 하면 기존(旣存)에 있었던 성경속의 ‘죄악(罪惡)의 기원’을 빌어서 변형(變形)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연유를 세 가지(three accounts)로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 설명중 둘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셋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의 심화(深化)를 의미합니다.
첫째 설명은, 정경(正經)에는 나오지않고 위경서(Pseudepigrapha)중 하나인 에녹2서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의 근원적 태초, 하늘 위의 하늘에도 하나님 이외에 아무 존재가 없을 때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태초 사이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천사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들 중 대천사라고 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이조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도승지에 해당하는 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미가엘, 가브리엘 등도 이에 속하는 천사들입니다. 그 대천사중에 하나인 루시퍼(Lucifer)라고도 하는 사타나일(Satanail)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다보니까 마치 나중에는 자신의 권능이 하나님만큼이나 되는줄 알고 다른 천사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패하여서 공중으로 내어쫓김을 당합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대항한 이 사타나일에게도 사랑을 베푸셔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중의 권세를 그에게 주십니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여섯 날동안의 창조중 둘째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이 빠진 까닭을 하나님이 이 궁창 하늘--곧 공중의 권세를 이 사타나일에게 주실 것이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며 흡족해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합니다. 천사의 타락이 인간 타락(墮落)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둘째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 둘째 설명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창세기 3장(참조: 위경서, 아담과 이브의 삶)에 나오는 사단의 다른 형태(agent)인 옛뱀이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음입니다. 이브만 먹을 뿐아니라 아담도 함께 먹음으로 둘이 선악을 구분하게 되고 그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을 두려워하여 숲속에 숨었습니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때에는 죄짓는 일이 적었는데, 인간이 선악을 알면서부터는 선을 행하려 하지 아니하고 선으로부터 먼 악을 더 행함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더 행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울은 이를 죄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19-21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셋째 설명은 노아의 홍수로부터 백이십년전의 사건으로서 창세기 6장에 그 개략(槪略)이 나오고 위경서중 에녹 1서(1-36장)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창세기 6장 1-2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繁盛)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에녹 1서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아즈(Semyaz)와 아자젤(Azazel)이라고 하는 대천사의 지휘하에 하늘나라의 200명의 파수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지상을 굽어 내려다보니 사람의 딸들인 여자들이 아름다우매,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에게 화장하는 법을, 또 세상의 남자들에게는 전쟁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서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창세기 6:3에, 해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肉體)가 됨이라.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노아로 백년에 걸쳐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백년의 시간을 주신 것은 노아의 순종을 보시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그간에 혹시 ‘인간들이 그들의 패역에서 돌이킬까’ 보시기 원함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함을 아시기에 창세기 6:5-6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罪惡)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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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罪)가 인간세상에 들어와 번짐은 마치 잉크 한 방울을 맑은 물이 담긴 물병에 떨어뜨림과 같습니다. 검은 잉크 한 방울은 처음 떨어진 곳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곧 물병 전체로 번져서 물병의 물을 다 검게 만들어 버립니다.물병을 흔들 때 그 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 삽시간에 물이 검게 변합니다.
본문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최초로 죄를 지은 사람은 이브였지만, 이브도 사실 따지고보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사람이므로 아담의 안사람, 속사람--곧 아담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 아담이란 이름은 ‘한 사람’이란 뜻인데, 땅이나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אדמה)’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창세기 2장 7절의 기록대로 흙으로 지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범죄함으로 그들은 지상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대로, 죽어 그들의 본래 모습이었던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도 인생의 이러함을 3장 20절에서,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했습니다. 흙으로 말미암았지만 아담과 이브의 범죄함이 없었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죄가 세상 가운데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이 사망의 지배하에 놓였었는데, 로마서 1장, 3장에서 바울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의 한 의(義)가 모든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인간들을 징계하시고 심판을 선언하시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이를 귀히 보시고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시고 그들을 흩으시고 포로로 끌려가게도 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떠나 범죄함으로 이스라엘을 징벌하실 때에도 다윗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원래 작정하신 징벌을 줄여주셨고,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선포케 하셨지만 그들의 회개함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하신 벌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범죄함으로 그의 신--성령(聖靈)을 거두시고 그들에게 죽음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에게 내려진 자신의 예정된 심판을 중한 것으로 여기시고 이를 면하게 할 방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마련하실 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해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설교말씀한 대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치 아니할 때에,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아직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에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罪)와 사망(死亡)이 세상(世上)에 들어왔는데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恩惠)와 생명(生命)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문둥병자일 때, 아들은 원치 않지만 문둥병자로 태어나고, 그 아들의 아들도 문둥병자요, 그 아들의 아들의 아들도 자기의 원함과는 상관없이 문둥병자로 태어나 세상을 살다가 죽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저주아래 놓인 문둥병자와도 같이 소망(所望)없는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한 방편을 주셨는데, 그것은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죽음이라는 저주 아래 놓인 질병을 고쳐주시는 대신에 아들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세우시고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나음을 얻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로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게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는 불뱀에 물린 자마다 낳음을 얻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이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생(永生)은 우리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와 구원은 특정한 그룹에 속한 사람만 위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모두가 죄인이요 원수였던--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체적이요 보편적인데도 그 은혜의 자리에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합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란 그리스도를 그 마음 속에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되고 생명에 이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가입으로 말미암아 범죄가 더해진다”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의 법의 가입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범죄가 더해졌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범죄를 더 많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3장 20절에 이른 대로,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깨달음을 더욱 더하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했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이 큽니다. 5달러를 빚진 사람은 5달러를 갚지않아도 된다는 말에 그렇게 큰 기쁨이 넘치지 않을 것이지만, 10만달러를 빚지고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차라리 죽을까 생각하고있던 사람이 10만달러를 갚지않아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아마도 새로 태어나는 희열(喜悅)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넓이와 깊이는 인간의 죄의 어떠한 넓이와 깊이보다도 넓고 깊어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다 감싸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은 무한하게 넓어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품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모든 사람들을 다 품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마치 화창한 날에 내려쪼이는 햇빛과도 같습니다. 그 햇빛을 받을 권이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피함은 햇빛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피하는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마치 3년 6개월의 가뭄 후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습니다. 이 하늘로서 내리는 단비를 맞으며 갈증을 해소할 권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 단비를 피하여 계속 목이 갈함을 느낌은 그 사람의 우준한 마음입니다.
3
찰톤 헤스톤이 주연한 영화 ‘벤허’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시고 힘없이 나약하게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낮에 해가 구름에 가리우고 캄캄하여지고 천둥번개가 치고 세찬 비가 내립니다. 저주의 병 문둥병으로 소망없이 죽을 때만 기다리던 벤허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이 비가 쏟아질 때 그들은 문둥병의 나음을 입고 저주에서 풀리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이른 바와 같이, 저주아래 놓이신 바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영생(永生)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 귀한 체험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나라 말 ‘불’과 영어 ‘화이어(fire)’가 전혀 무관(無關)한 것처럼 보이지만, 몇 개의 언어를 살펴보면 서로 조상이 같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 ‘화(火)’와 ‘화이어(fire)’는 좀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불어 ‘훼(feu)’와 독일어 ‘호이에르(feuer)’, 거기에 결정적으로 헬라어 ‘푸르(πύρ)’를 연결시키면 우리나라 말 ‘불’과 영어 ‘화이어(fire)’의 어원이 같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神)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이름도 사실은 헬라어 푸르(πύρ)가 불에 해당하는 단어임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이름이 아닙니다. 이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유로 신들의 신 제우스(Zeus혹은 Jupiter)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에는 바위에 묶였다가 독수리에게 간(肝)과 내장(內臟)을 파먹혔다고 합니다. 그보다 앞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하여 판도라(Pandora: 인류최초의 여자)에게 상자를 들려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는데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해악(害惡)이 나오고 그 상자 속에는 희망(希望)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서 보는 해악(害惡)과 절망(絶望), 인류 불행(不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기원이나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들과 인간들의 사랑이 독창적(獨創的)인가 하면 기존(旣存)에 있었던 성경속의 ‘죄악(罪惡)의 기원’을 빌어서 변형(變形)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연유를 세 가지(three accounts)로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 설명중 둘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셋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의 심화(深化)를 의미합니다.
첫째 설명은, 정경(正經)에는 나오지않고 위경서(Pseudepigrapha)중 하나인 에녹2서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의 근원적 태초, 하늘 위의 하늘에도 하나님 이외에 아무 존재가 없을 때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태초 사이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천사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들 중 대천사라고 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이조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도승지에 해당하는 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미가엘, 가브리엘 등도 이에 속하는 천사들입니다. 그 대천사중에 하나인 루시퍼(Lucifer)라고도 하는 사타나일(Satanail)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다보니까 마치 나중에는 자신의 권능이 하나님만큼이나 되는줄 알고 다른 천사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패하여서 공중으로 내어쫓김을 당합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대항한 이 사타나일에게도 사랑을 베푸셔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중의 권세를 그에게 주십니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여섯 날동안의 창조중 둘째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이 빠진 까닭을 하나님이 이 궁창 하늘--곧 공중의 권세를 이 사타나일에게 주실 것이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며 흡족해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합니다. 천사의 타락이 인간 타락(墮落)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둘째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 둘째 설명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창세기 3장(참조: 위경서, 아담과 이브의 삶)에 나오는 사단의 다른 형태(agent)인 옛뱀이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음입니다. 이브만 먹을 뿐아니라 아담도 함께 먹음으로 둘이 선악을 구분하게 되고 그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을 두려워하여 숲속에 숨었습니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때에는 죄짓는 일이 적었는데, 인간이 선악을 알면서부터는 선을 행하려 하지 아니하고 선으로부터 먼 악을 더 행함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더 행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울은 이를 죄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19-21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셋째 설명은 노아의 홍수로부터 백이십년전의 사건으로서 창세기 6장에 그 개략(槪略)이 나오고 위경서중 에녹 1서(1-36장)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창세기 6장 1-2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繁盛)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에녹 1서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아즈(Semyaz)와 아자젤(Azazel)이라고 하는 대천사의 지휘하에 하늘나라의 200명의 파수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지상을 굽어 내려다보니 사람의 딸들인 여자들이 아름다우매,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에게 화장하는 법을, 또 세상의 남자들에게는 전쟁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서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창세기 6:3에, 해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肉體)가 됨이라.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노아로 백년에 걸쳐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백년의 시간을 주신 것은 노아의 순종을 보시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그간에 혹시 ‘인간들이 그들의 패역에서 돌이킬까’ 보시기 원함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함을 아시기에 창세기 6:5-6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罪惡)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2
죄(罪)가 인간세상에 들어와 번짐은 마치 잉크 한 방울을 맑은 물이 담긴 물병에 떨어뜨림과 같습니다. 검은 잉크 한 방울은 처음 떨어진 곳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곧 물병 전체로 번져서 물병의 물을 다 검게 만들어 버립니다.물병을 흔들 때 그 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 삽시간에 물이 검게 변합니다.
본문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최초로 죄를 지은 사람은 이브였지만, 이브도 사실 따지고보면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사람이므로 아담의 안사람, 속사람--곧 아담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 아담이란 이름은 ‘한 사람’이란 뜻인데, 땅이나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אדמה)’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창세기 2장 7절의 기록대로 흙으로 지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범죄함으로 그들은 지상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대로, 죽어 그들의 본래 모습이었던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도 인생의 이러함을 3장 20절에서,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했습니다. 흙으로 말미암았지만 아담과 이브의 범죄함이 없었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죄가 세상 가운데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이 사망의 지배하에 놓였었는데, 로마서 1장, 3장에서 바울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의 한 의(義)가 모든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인간들을 징계하시고 심판을 선언하시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인간에게 조금이나마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이를 귀히 보시고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시고 그들을 흩으시고 포로로 끌려가게도 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떠나 범죄함으로 이스라엘을 징벌하실 때에도 다윗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원래 작정하신 징벌을 줄여주셨고,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선포케 하셨지만 그들의 회개함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하신 벌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범죄함으로 그의 신--성령(聖靈)을 거두시고 그들에게 죽음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에게 내려진 자신의 예정된 심판을 중한 것으로 여기시고 이를 면하게 할 방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마련하실 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기도 전에 해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설교말씀한 대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치 아니할 때에,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아직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에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罪)와 사망(死亡)이 세상(世上)에 들어왔는데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恩惠)와 생명(生命)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문둥병자일 때, 아들은 원치 않지만 문둥병자로 태어나고, 그 아들의 아들도 문둥병자요, 그 아들의 아들의 아들도 자기의 원함과는 상관없이 문둥병자로 태어나 세상을 살다가 죽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저주아래 놓인 문둥병자와도 같이 소망(所望)없는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한 방편을 주셨는데, 그것은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죽음이라는 저주 아래 놓인 질병을 고쳐주시는 대신에 아들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세우시고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나음을 얻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로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게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는 불뱀에 물린 자마다 낳음을 얻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이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생(永生)은 우리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와 구원은 특정한 그룹에 속한 사람만 위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모두가 죄인이요 원수였던--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체적이요 보편적인데도 그 은혜의 자리에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합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란 그리스도를 그 마음 속에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되고 생명에 이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가입으로 말미암아 범죄가 더해진다”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의 법의 가입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범죄가 더해졌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범죄를 더 많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3장 20절에 이른 대로,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깨달음을 더욱 더하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했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이 큽니다. 5달러를 빚진 사람은 5달러를 갚지않아도 된다는 말에 그렇게 큰 기쁨이 넘치지 않을 것이지만, 10만달러를 빚지고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차라리 죽을까 생각하고있던 사람이 10만달러를 갚지않아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아마도 새로 태어나는 희열(喜悅)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넓이와 깊이는 인간의 죄의 어떠한 넓이와 깊이보다도 넓고 깊어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다 감싸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은 무한하게 넓어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품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모든 사람들을 다 품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마치 화창한 날에 내려쪼이는 햇빛과도 같습니다. 그 햇빛을 받을 권이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피함은 햇빛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피하는 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마치 3년 6개월의 가뭄 후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습니다. 이 하늘로서 내리는 단비를 맞으며 갈증을 해소할 권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 단비를 피하여 계속 목이 갈함을 느낌은 그 사람의 우준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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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톤 헤스톤이 주연한 영화 ‘벤허’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시고 힘없이 나약하게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낮에 해가 구름에 가리우고 캄캄하여지고 천둥번개가 치고 세찬 비가 내립니다. 저주의 병 문둥병으로 소망없이 죽을 때만 기다리던 벤허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이 비가 쏟아질 때 그들은 문둥병의 나음을 입고 저주에서 풀리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이른 바와 같이, 저주아래 놓이신 바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영생(永生)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 귀한 체험들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의(2)” (로마서 4:16-25)
“아브라함의 의(2)” (로마서 4:16-25)
1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옛날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잠자리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텔레비젼이나 비디오를 통해 아이들을 위한 더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와서 우리 애들도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실 옛날 이야기 왕국입니다. 가까이는 2,000년 전 멀리는 6,500년 전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해당하는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과 관련된 것 중 성경 속에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성경 이야기를 읽기만 하면 듣기만 하면 졸음이 오고 따분한 마음이 듭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야기의 배경이나 무대가 우리와는 좀 거리가 먼 유대나라에서 벌어진 것이라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배경이나 무대를 이해하고 이 성경에 맛을 들리면 다른 어떤 종류의 이야기보다 재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들에도 교훈적인 것이 더러 있지만 성경은 교훈적인 것 위에 우리 삶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섭(干涉)을 발견케 해줍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들과 친숙하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중요한 것은 이 성경 속의 이야기와 나의 삶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 감동적인 것이 많이 있지만,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정착하기 위하여 전쟁을 치루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함께 감동을 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마자 그들 앞에 놓인 과제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 여리고를 점령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성을 점령하기 위한 세밀한 지시사항을 하달(下達)하셨는데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달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잘 청종하고 그대로 따랐더니 그 크고 튼튼한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막상 성이 무너지자 하나님은 사라지고 그들 자신이 다 이루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다음에 그들 앞에 놓인 성은 여리고성에 비하여는 극히 작은 아이성이었습니다. 이 성은 단 숨에 적은 군대로서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여호수아 7:3). 해서, 하나님께 매달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지시도 기다리지 않고 삼천 명의 군대를 보내지만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하나님의 군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면 소수로서도 큰 일을 이룰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만 의지할 때는 다수로서도 작은 일 조차 이루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설교자가 웃기는 이야기를 잘해서가 아니고, 세상 사람들의 즐거운 사교모임(social gathering)의 장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기억지 않으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고 거하시고 죽으셨던 주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또한 사랑함을 찬양과 경배로서 표현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이 듭니다.
2
바울은 로마서 4장 전반부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선한 행위나 할례나 율법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그의 설명의 근거를 성경에서 제시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우리의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나, 우리가 받는 세례나, 성경이 우리의 칭의(稱義)--의롭다 여김을 받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사람이 흔히 ‘아무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말하지만, 그 사람이 세상사람에게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그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를 받아야지만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줄’ 압니다. 해서, 바울 당시에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부모님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으로 반문할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남’이 무슨 뜻인지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의미입니다. 겉으로의 할례는 행하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겉으로의 물세례는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례와 물세례의 중요한 의미는 죄씻음(성결)과 하나님께 헌신입니다. 해서, 바울은 표면적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 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요한 3:5)에서 ‘물로 남’을 어머니 뱃속의 양수가 터져서 태어나는 우리의 자연출산을 가리킨다 해석하고, ‘성령으로 남’은 우리가 자연인의 삶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는 사람을 살기 위한 성령의 인침--곧 하나님의 사람의 표시를 우리 내면에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상당히 근거(根據)있는 해석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서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시느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침을 받음을 “born-again”--‘거듭남’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입니다.
설령, 물세례가 우리 구원에 꼭 필요한 필수사항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고 물세례 받지 못하고 주님 앞에 이른 나를 눈감아 주실 때 시비를 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꼭 성경을 많이 알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의 지시사항 중 얼마간을 어겼다 하더라도 염려가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의로움을 결정합니까? 성경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기록한 것 같이 우리의 생명록에 “최 목사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김 집사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기록되어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質問)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는,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선한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세례도 받을 필요도 없고, 성경을 알 필요도 없고 성경말씀대로 살 필요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하는 반문입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바울이 어떠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까?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이 필요하고, 모든 사람 앞에 주님을 시인하는 물세례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도 날마다 읽고 상고하고 지켜 행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함은 우리의 의로움의 요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함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 가운데 자연히 보여지는 믿음의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믿기에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지켜 행하려고 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여러 사람 앞에 고백하는 물세례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와질 수 있는데 왜 번거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분이요 그들이 깨달아 알 수 없는 분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따라서 지킨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너무 피상적으로 알아 그들이 드리는 제사나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았기 때문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고 그 앞에 절하면서도 잘못된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심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별개의 분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러 온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에, 인간의 귀에, 인간의 눈에 멀리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육신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오신 예수님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자기 의로서 멀리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고있노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미리 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세 가지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민족과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가나안 땅 곧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과 같은 유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6절에,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23-24절에,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기록의 효력은 아브라함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자취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요, 의로 여김과 약속의 유업을 확증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주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죽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예수님께 짊어지시게 하시고 죄짐을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의 죄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의를 향한 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심은 예수님께서 의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나신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 의에 대해서 살아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이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문제”를 6장에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3
로마서의 바른 이해가 바른 믿음의 생활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나 루터(Luther)나 칼빈(Calvin)이나 요한 웨슬레(John Wesley) 등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로마서를 통하여 믿음으로 거듭남을 체험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후배 목사님들에게 말씀할 때 로마서를 잘 설교하면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로마서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로마서는 어려운 글입니다. 그러나, 읽고 또 읽을 때 로마서만큼 은혜가 넘치는 성경 속의 글도 드뭅니다. 제가 로마서를 강해하는 동안에 여러분들도 로마서를 자주 읽으심으로서 은혜의 글에 친근하게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느끼시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세 가지 가나안 땅과 민족과 복을 유업으로 받으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옛날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잠자리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텔레비젼이나 비디오를 통해 아이들을 위한 더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와서 우리 애들도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실 옛날 이야기 왕국입니다. 가까이는 2,000년 전 멀리는 6,500년 전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해당하는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과 관련된 것 중 성경 속에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성경 이야기를 읽기만 하면 듣기만 하면 졸음이 오고 따분한 마음이 듭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야기의 배경이나 무대가 우리와는 좀 거리가 먼 유대나라에서 벌어진 것이라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배경이나 무대를 이해하고 이 성경에 맛을 들리면 다른 어떤 종류의 이야기보다 재미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들에도 교훈적인 것이 더러 있지만 성경은 교훈적인 것 위에 우리 삶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섭(干涉)을 발견케 해줍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들과 친숙하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중요한 것은 이 성경 속의 이야기와 나의 삶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 감동적인 것이 많이 있지만,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정착하기 위하여 전쟁을 치루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함께 감동을 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마자 그들 앞에 놓인 과제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 여리고를 점령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성을 점령하기 위한 세밀한 지시사항을 하달(下達)하셨는데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달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잘 청종하고 그대로 따랐더니 그 크고 튼튼한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막상 성이 무너지자 하나님은 사라지고 그들 자신이 다 이루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다음에 그들 앞에 놓인 성은 여리고성에 비하여는 극히 작은 아이성이었습니다. 이 성은 단 숨에 적은 군대로서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여호수아 7:3). 해서, 하나님께 매달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지시도 기다리지 않고 삼천 명의 군대를 보내지만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하나님의 군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면 소수로서도 큰 일을 이룰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만 의지할 때는 다수로서도 작은 일 조차 이루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설교자가 웃기는 이야기를 잘해서가 아니고, 세상 사람들의 즐거운 사교모임(social gathering)의 장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기억지 않으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고 거하시고 죽으셨던 주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또한 사랑함을 찬양과 경배로서 표현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이 듭니다.
2
바울은 로마서 4장 전반부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선한 행위나 할례나 율법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그의 설명의 근거를 성경에서 제시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우리의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나, 우리가 받는 세례나, 성경이 우리의 칭의(稱義)--의롭다 여김을 받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사람이 흔히 ‘아무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말하지만, 그 사람이 세상사람에게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그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데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를 받아야지만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줄’ 압니다. 해서, 바울 당시에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부모님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으로 반문할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남’이 무슨 뜻인지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의미입니다. 겉으로의 할례는 행하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겉으로의 물세례는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례와 물세례의 중요한 의미는 죄씻음(성결)과 하나님께 헌신입니다. 해서, 바울은 표면적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 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요한 3:5)에서 ‘물로 남’을 어머니 뱃속의 양수가 터져서 태어나는 우리의 자연출산을 가리킨다 해석하고, ‘성령으로 남’은 우리가 자연인의 삶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는 사람을 살기 위한 성령의 인침--곧 하나님의 사람의 표시를 우리 내면에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상당히 근거(根據)있는 해석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서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시느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침을 받음을 “born-again”--‘거듭남’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입니다.
설령, 물세례가 우리 구원에 꼭 필요한 필수사항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고 물세례 받지 못하고 주님 앞에 이른 나를 눈감아 주실 때 시비를 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꼭 성경을 많이 알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의 지시사항 중 얼마간을 어겼다 하더라도 염려가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의로움을 결정합니까? 성경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기록한 것 같이 우리의 생명록에 “최 목사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김 집사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기록되어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質問)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는,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선한 삶을 살 필요도 없고, 세례도 받을 필요도 없고, 성경을 알 필요도 없고 성경말씀대로 살 필요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하는 반문입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바울이 어떠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까?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이 필요하고, 모든 사람 앞에 주님을 시인하는 물세례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도 날마다 읽고 상고하고 지켜 행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함은 우리의 의로움의 요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함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 가운데 자연히 보여지는 믿음의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믿기에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지켜 행하려고 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여러 사람 앞에 고백하는 물세례를 받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와질 수 있는데 왜 번거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분이요 그들이 깨달아 알 수 없는 분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따라서 지킨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너무 피상적으로 알아 그들이 드리는 제사나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았기 때문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고 그 앞에 절하면서도 잘못된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심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별개의 분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러 온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에, 인간의 귀에, 인간의 눈에 멀리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육신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오신 예수님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자기 의로서 멀리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고있노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미리 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세 가지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민족과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가나안 땅 곧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과 같은 유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6절에,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23-24절에,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기록의 효력은 아브라함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자취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요, 의로 여김과 약속의 유업을 확증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주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죽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예수님께 짊어지시게 하시고 죄짐을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의 죄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의를 향한 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심은 예수님께서 의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나신 것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 의에 대해서 살아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이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문제”를 6장에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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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바른 이해가 바른 믿음의 생활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나 루터(Luther)나 칼빈(Calvin)이나 요한 웨슬레(John Wesley) 등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로마서를 통하여 믿음으로 거듭남을 체험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후배 목사님들에게 말씀할 때 로마서를 잘 설교하면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로마서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로마서는 어려운 글입니다. 그러나, 읽고 또 읽을 때 로마서만큼 은혜가 넘치는 성경 속의 글도 드뭅니다. 제가 로마서를 강해하는 동안에 여러분들도 로마서를 자주 읽으심으로서 은혜의 글에 친근하게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느끼시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세 가지 가나안 땅과 민족과 복을 유업으로 받으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의(1)” (로마서 4:1-15)
“아브라함의 의(1)” (로마서 4:1-15)
1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다윗에게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특별히 우리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중에 다윗처럼 살인 교사(敎唆)의 죄와 간음의 죄를 저지른 사람이 없고,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셨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회개함이 있어서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허물을 덮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당시에 아브라함보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더 선한 삶을 산 사람도 있었을 것이요, 다윗의 당시에 다윗보다 더 선한 삶을 산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다윗을 축복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윗에게 하나님께 늘 매달려 간구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궁중에서도 기도하고, 산 속에서도 기도하였습니다. 평안할 때도 기도하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믿었던 신하에게 쫓기는 환난가운데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기도의 은사가 특별하였던 사람 같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기도의 은사가 있음을 발견하고, 주옥같은 시편들을 읊조림으로서 개발하고, 자기의 여러 다른 형편가운데 그의 유일한 무기요 방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왕이었지만, 그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더욱 매달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믿음보다도 앞선 순종함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귀히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할 때, 땅과 민족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아내와 조카와 다른 가족들과 함께 갈대아-우르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떠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란쯤 이르렀을 때 그곳의 삶이 편하기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순종함으로 본토 갈대아-우르를 떠났지만, 200세 가까이 된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먼 길을 계속 간다는 것이 마음이 아파 하나님의 지시하실 땅에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하란에 머문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란에서의 데라의 죽음을 11장 32절에서 기록하고, 12장 4절에서 아브라함이 75세때에 조카 롯과 함께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12장 5절에서는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기를 원하셨던 곳이며, 우리 신약백성들이 사모하는 하늘의 가나안의 예표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아내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기는 장막 뒤에 있었던 사라 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청종할 때,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11절에서,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100세 때에 얻은 아들 이삭을 그의 나이 10여세쯤 되었을 때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하심에 의혹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이삭을 받쳤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내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증거합니다.
2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예를 사용합니다. 15절까지의 전반부에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해석하고, 이 아브라함의 의가 어떻게 신약시대의 모든 사람--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말함은 그 당시에 칭의와 구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과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행위와 할례와 율법지킴이 구원의 요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즉, 믿음위에 행위가, 할례가, 율법이 더 있어야 의로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지라 선언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3장 31절에서 바울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한 행위가,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가, 율법지킴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선한 행위나 세례나 율법지킴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의 표시요 결과이지 요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남 다른 선한 행위가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도 겁이 많아 거짓말하고 아내를 남에게 줌으로 목숨을 부지하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를 의로 여기시되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의 선한 행위가 없는데도 의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를 의로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한 잘못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 지적받았을 때 시편 51편으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이에 응답하여 그의 죄를 사하여준 하나님의 긍휼에 시편 32편에서 감사의 시로 찬양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7-8절에서 이를 인용합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한글성경에서는 불법과 죄라고만 표현되었지만 시편 32편을 담고있는 히브리 성경은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므로 우리의 다양한 여러 모양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데 철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탕감하고 죄의 명부에서 삭제하여주실 뿐만 아니라, 가리우시고 (혹은 덮으시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혹 드러날까 우리가 회개한 죄에 대해서는 죄로 여기시거나 인정조차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법한 행위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80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가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언약의 표를 한 것이 99세이므로, 약 20년쯤 전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신약시대 우리에게 세례에 해당하는 할례를 받기 이전에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바울 시대 믿음이외에 할례를 받아야지만 구원에 이른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에 반박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1년쯤 뒤 시내산에 머물 때에 주신 것입니다. 해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600년전의 일이므로 율법으로 의로와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근거없음을 지적합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3장 1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도 그들의 죄와 허물로 하나님의 심판하에 놓인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반문하였었습니다. 그는 답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맡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유대인의 나음이요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 해답이 3장 20졸에 나와있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면, 오늘 15절의 뜻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라고 함은 우리가 율법을 읽음으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우리는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자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이 없을 때 우리에게 죄의 범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의 범함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해서, 율법이 없던 이방인도 죄 아래 놓였다고 3장 9절이하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이 그에게 율법이 있어서가 아니요, 그가 할례를 받아서가 아니요, 그의 행위가 의로와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의로 여기신 것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어느 미국인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설교하러 가시게 되었는데, 그 교회의 비서(secretary)가 전화로 설교 제목을 물었습니다. 해서, 이 목사님은 시편 23편을 설교할 것이기 때문에 “The LORD is my shepherd”(=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secretary)가 반문합니다: “Is that all?”(=그뿐인가요?) 목사님은 짤막하게 대답합니다: “That's enough”(=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설교할 주일이 되어 그 교회로 가서 주보를 받아본 목사님은 빙그레 미소를 짓습니다. 주보에 적힌 설교 제목은 “The LORD is my Shepherd. That's enough”(=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그것으로 충분하네) 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제목에 만족하여 거기에 합당한 설교를 은혜롭게 잘 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깨닫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에 이를 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제가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은 제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님을 압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여 나는 말에 능치 못한 자라.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기피하는 말이 서투른 모세를 부르시고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딸려 보낸 것같이 말이 능하지 못한 저를 목사로 사용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저희 말이 그 (바울의)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중하고 힘있는 편지를 쓰는 사람도 바울이요, 그들이 몸으로 대할 때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은 자도 바울임을 알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데서 온전하여진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을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되 우리의 한계를 깨달아 인정하고 이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다윗에게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특별히 우리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중에 다윗처럼 살인 교사(敎唆)의 죄와 간음의 죄를 저지른 사람이 없고,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셨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회개함이 있어서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허물을 덮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당시에 아브라함보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더 선한 삶을 산 사람도 있었을 것이요, 다윗의 당시에 다윗보다 더 선한 삶을 산 사람들이 더러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다윗을 축복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윗에게 하나님께 늘 매달려 간구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궁중에서도 기도하고, 산 속에서도 기도하였습니다. 평안할 때도 기도하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믿었던 신하에게 쫓기는 환난가운데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기도의 은사가 특별하였던 사람 같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기도의 은사가 있음을 발견하고, 주옥같은 시편들을 읊조림으로서 개발하고, 자기의 여러 다른 형편가운데 그의 유일한 무기요 방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왕이었지만, 그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더욱 매달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믿음보다도 앞선 순종함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귀히 여기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할 때, 땅과 민족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아내와 조카와 다른 가족들과 함께 갈대아-우르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떠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란쯤 이르렀을 때 그곳의 삶이 편하기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순종함으로 본토 갈대아-우르를 떠났지만, 200세 가까이 된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먼 길을 계속 간다는 것이 마음이 아파 하나님의 지시하실 땅에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하란에 머문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란에서의 데라의 죽음을 11장 32절에서 기록하고, 12장 4절에서 아브라함이 75세때에 조카 롯과 함께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12장 5절에서는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기를 원하셨던 곳이며, 우리 신약백성들이 사모하는 하늘의 가나안의 예표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아내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기는 장막 뒤에 있었던 사라 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청종할 때,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11절에서,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100세 때에 얻은 아들 이삭을 그의 나이 10여세쯤 되었을 때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하심에 의혹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이삭을 받쳤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7-19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내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증거합니다.
2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예를 사용합니다. 15절까지의 전반부에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해석하고, 이 아브라함의 의가 어떻게 신약시대의 모든 사람--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연결되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말함은 그 당시에 칭의와 구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과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행위와 할례와 율법지킴이 구원의 요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즉, 믿음위에 행위가, 할례가, 율법이 더 있어야 의로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지라 선언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3장 31절에서 바울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한 행위가, 할례에 해당하는 세례가, 율법지킴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선한 행위나 세례나 율법지킴은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의 표시요 결과이지 요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남 다른 선한 행위가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도 겁이 많아 거짓말하고 아내를 남에게 줌으로 목숨을 부지하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같은 잘못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를 의로 여기시되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의 선한 행위가 없는데도 의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를 의로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한 잘못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 지적받았을 때 시편 51편으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이에 응답하여 그의 죄를 사하여준 하나님의 긍휼에 시편 32편에서 감사의 시로 찬양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7-8절에서 이를 인용합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한글성경에서는 불법과 죄라고만 표현되었지만 시편 32편을 담고있는 히브리 성경은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므로 우리의 다양한 여러 모양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데 철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탕감하고 죄의 명부에서 삭제하여주실 뿐만 아니라, 가리우시고 (혹은 덮으시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혹 드러날까 우리가 회개한 죄에 대해서는 죄로 여기시거나 인정조차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법한 행위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80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가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언약의 표를 한 것이 99세이므로, 약 20년쯤 전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신약시대 우리에게 세례에 해당하는 할례를 받기 이전에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바울 시대 믿음이외에 할례를 받아야지만 구원에 이른다는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에 반박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1년쯤 뒤 시내산에 머물 때에 주신 것입니다. 해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600년전의 일이므로 율법으로 의로와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근거없음을 지적합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3장 1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도 그들의 죄와 허물로 하나님의 심판하에 놓인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반문하였었습니다. 그는 답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맡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유대인의 나음이요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 해답이 3장 20졸에 나와있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면, 오늘 15절의 뜻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라고 함은 우리가 율법을 읽음으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우리는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인 자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이 없을 때 우리에게 죄의 범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의 범함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해서, 율법이 없던 이방인도 죄 아래 놓였다고 3장 9절이하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이 그에게 율법이 있어서가 아니요, 그가 할례를 받아서가 아니요, 그의 행위가 의로와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의로 여기신 것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어느 미국인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설교하러 가시게 되었는데, 그 교회의 비서(secretary)가 전화로 설교 제목을 물었습니다. 해서, 이 목사님은 시편 23편을 설교할 것이기 때문에 “The LORD is my shepherd”(=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secretary)가 반문합니다: “Is that all?”(=그뿐인가요?) 목사님은 짤막하게 대답합니다: “That's enough”(=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설교할 주일이 되어 그 교회로 가서 주보를 받아본 목사님은 빙그레 미소를 짓습니다. 주보에 적힌 설교 제목은 “The LORD is my Shepherd. That's enough”(=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그것으로 충분하네) 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제목에 만족하여 거기에 합당한 설교를 은혜롭게 잘 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깨닫고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에 이를 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제가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은 제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님을 압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여 나는 말에 능치 못한 자라.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기피하는 말이 서투른 모세를 부르시고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딸려 보낸 것같이 말이 능하지 못한 저를 목사로 사용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저희 말이 그 (바울의)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중하고 힘있는 편지를 쓰는 사람도 바울이요, 그들이 몸으로 대할 때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은 자도 바울임을 알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데서 온전하여진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을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되 우리의 한계를 깨달아 인정하고 이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Sunday, September 8, 2013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로마서 3:21-3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로마서 3:21-31)
1
"Boys, be ambitious!"란 말이 있습니다. ‘소년들이여, 큰 뜻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큰 뜻, 큰 목표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매어달리게 되고 전력(全力)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권면합니다. 더욱 큰 은사와 주님의 사업을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이제까지 우리는, 본서의 대전제인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으로 나타났다는 것(1:1-17), 이러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을 알되 인정치 않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고(1:18-32),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주님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1-3:20).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증거한 바 있는 바울은 3장 21절 이하에서 다시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1:2).
21절에 이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1장 2절에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의가 장차 나타날 것을 선지자들이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율법책도 다름아니라 이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데, 해서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25절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길이 참으시는 중에 사람의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나타난다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덮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해서, 26절에 하나님의 의는 “자기도 의로우시고 예수 믿는 자도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다름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평’입니다.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이 자고하고 우준하게되어 죄를 범하고(1:18-32), 해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곁에 거함)에 이르지 못하였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불의와 공존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것,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믿지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죄(罪)는 '하타아트'인데, 그 동사형 '하타아'의 뜻은 ‘길 혹은 목표에서 벗어나다, 표적을 빗마추다’ 입니다. 신약성경 헬라어의 ‘죄짓다’란 단어, 하말타노(ἁμαρτάνω) 역시 ‘표적을 빗마추다, 바른 길 혹은 목표에서 벗어나다, 방황하다’라는 본래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표녁을 빗맞추고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죄는 우리가 부족하여 하나님의 표적판을 맞추는 삶을 맞추려고 하는데도 못미치는 경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표적에서 빗나가게 화살을 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한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믿지 않는 삶,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독생자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셔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합니다. 그의 행위로는 의롭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를 의롭다 하셨습니다(3:24).
예수님의 죽으심은 화목제물이십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벽이 건너지 못할 강이 놓여 있었는데, 예수님의 육체로 드리신 화목제물로 벽이 무너지고, 건너지 못할 강에 다리가 놓아진 것입니다. 해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를 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간과(看過)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용납하심입니다.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로와졌습니다(3:25-26). 해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를 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4-16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으사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우리는 따라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인 까닭입니다. 바울은 28절에서 다시 한 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짐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미칩니다. 율법을 받았던 할례자, 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율법을 받지 못한 무할례자, 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3:30).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졌다고 하여 우리에게 율법이 필요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진심으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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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happiness는 그 어원이 “어떤 일이 일어나다, 발생하다”는 뜻인 happen과 같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행복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외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일이 발생한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내적인 변화나 깨달음에서 옵니다. “행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슈레이(אשׁרי)나 헬라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인간의 지속적인 내면적인 기쁨과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남을 마음 속에서 깨달아 그 삶이 변하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므로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고, 뿐만 아니라 각 가정과 개인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므로 외적인 행복과 기쁨의 조건들도 풍성한 매일 매일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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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s, be ambitious!"란 말이 있습니다. ‘소년들이여, 큰 뜻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큰 뜻, 큰 목표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매어달리게 되고 전력(全力)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권면합니다. 더욱 큰 은사와 주님의 사업을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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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우리는, 본서의 대전제인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으로 나타났다는 것(1:1-17), 이러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을 알되 인정치 않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고(1:18-32),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주님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1-3:20).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증거한 바 있는 바울은 3장 21절 이하에서 다시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1:2).
21절에 이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1장 2절에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의가 장차 나타날 것을 선지자들이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율법책도 다름아니라 이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데, 해서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25절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길이 참으시는 중에 사람의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나타난다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덮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해서, 26절에 하나님의 의는 “자기도 의로우시고 예수 믿는 자도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다름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평’입니다.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이 자고하고 우준하게되어 죄를 범하고(1:18-32), 해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곁에 거함)에 이르지 못하였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불의와 공존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것,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믿지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죄(罪)는 '하타아트'인데, 그 동사형 '하타아'의 뜻은 ‘길 혹은 목표에서 벗어나다, 표적을 빗마추다’ 입니다. 신약성경 헬라어의 ‘죄짓다’란 단어, 하말타노(ἁμαρτάνω) 역시 ‘표적을 빗마추다, 바른 길 혹은 목표에서 벗어나다, 방황하다’라는 본래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표녁을 빗맞추고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죄는 우리가 부족하여 하나님의 표적판을 맞추는 삶을 맞추려고 하는데도 못미치는 경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표적에서 빗나가게 화살을 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한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믿지 않는 삶,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독생자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셔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합니다. 그의 행위로는 의롭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를 의롭다 하셨습니다(3:24).
예수님의 죽으심은 화목제물이십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벽이 건너지 못할 강이 놓여 있었는데, 예수님의 육체로 드리신 화목제물로 벽이 무너지고, 건너지 못할 강에 다리가 놓아진 것입니다. 해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를 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간과(看過)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용납하심입니다.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로와졌습니다(3:25-26). 해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를 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4-16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으사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우리는 따라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인 까닭입니다. 바울은 28절에서 다시 한 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짐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미칩니다. 율법을 받았던 할례자, 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율법을 받지 못한 무할례자, 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3:30).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졌다고 하여 우리에게 율법이 필요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진심으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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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happiness는 그 어원이 “어떤 일이 일어나다, 발생하다”는 뜻인 happen과 같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행복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외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일이 발생한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내적인 변화나 깨달음에서 옵니다. “행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슈레이(אשׁרי)나 헬라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는 ‘인간의 지속적인 내면적인 기쁨과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남을 마음 속에서 깨달아 그 삶이 변하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므로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고, 뿐만 아니라 각 가정과 개인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므로 외적인 행복과 기쁨의 조건들도 풍성한 매일 매일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심판” (로마서 3:9-20)
“이방인에 대한 심판” (로마서 3:9-20)
1
나의 자녀가 더 예쁘게 생긴 다른 사람의 아이보다 나에게 더 사랑스러운 이유들이 여럿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낳은 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원 창조주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나의 육체를 빌어 만들어진 아이이기에 남의 아이보다 더 사랑스럽습니다.
둘째는 나의 자녀가 나를 닮았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못생긴 나보다는 잘 생긴 백인을 닮았으면 하는 마음도 들 것이지만 만일 나의 아이가 그런 얼굴이라면 사랑스럽기 보다는 아마도 마음 속에서 분노와 의심이 들 것입니다.
셋째는 나를 아빠라고,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고, 또 찾기에 귀찮으면서도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을 때에 당연히 나를 제일 좋다고 대답할 줄 알기에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자신의 의사로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넷째는 나의 말을 잘 듣고 행하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말을 안듣는 자식 보다는 말을 잘듣는 자식이 내 생각에 잘 키운 자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사람들이 기도생활을 잘하지 않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나열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나의 속을 꿰뚫어 보고 계신 분이라면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네 하나님이니까 네가 기도하면 응답해주시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이니까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아시대의 주위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시대에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취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도 이런 태도를 흔히 취하였습니다.
셋째는 기도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기도하는 시간 만큼 하나님께서 돈을 쏟아부어주신다면 이 세상에 기도 안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며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주시며 달라는 대로 다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이나 자빠져서 입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인간 부모도 자녀가 한번 요구할 때는 안된다고 말하다가도 계속 강청할 때는 하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께서도 그러실 수 있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넷째는 현재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함이 없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나태함에서 나온 것이지 부족한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세상 일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다섯째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화도 해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고, 여행도 해야 하고, 자녀도 길러야 하고, 밥도 먹어야하고, 직장생활, 학교생활도 해야 하고, 비디오도 봐야 하고, 하기 때문에 정작 하루에 십분만 들이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은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다하고 남은 시간이 있어도 기도할 생각은 안하고 뭐 재미난 일 없나 궁리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여섯째는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고 귀하다”라고 찬송했는데,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응답받는 기도의 즐거움’을 알기만 한다면 기도 그만 하라 해도 서로 다투어 기도하려고 할 것인데 말입니다.
일곱째는 기도의 영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기도의 영이신데(롬 8:26) 성령의 큰 바람이 우리 마음 속에서 불지않고 있기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기도하다가 정말 예수믿는데 푹 빠져 버릴까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진짜로 내 앞에 나타나시면 어떻게 하나?’ ‘내가 기도생활을 열심히하다 세상의 재미를 잊어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더 좋은 천국은 놔두고 약간은 지옥에 머물기를 원하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2
2장 17절-3장 8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맡기셨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를 행치 못하여 죄 아래 놓이고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그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그러면 이방인인 너희는 유대인 보다 나은 것이 있으며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뇨? 바울이 ‘우리’라고 함으로 자신까지도 이방인의 수에 집어넣은 것은 이방인의 사도인 자신과 그들을 동질화시킨 것입니다. 율법을 맡은 유대인이 하나님 앞에 미치지 못한 것 같이, 이방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하나님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지만 그를 따라 행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함은 한 가지란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선언한 대로 세상에 의인은 없는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변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살 동안 인간이 잘났다 다투지만 따지고 보면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부족하고 무익한 인간을 사랑하시되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11절에,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약속하시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의 뜻을 깨닫는 자가 없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만 합니다. 해서,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되 세상 가운데 자신들의 이기적인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無益)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탄식합니다.
인간이 구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반대 편에 놓인 세상의 쾌락일 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모된 자로서 우리 자식들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와 하면서도 막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일이 무엇인가 헤아리는 지혜가 없음은 어찌된 까닭인지 모를 일입니다. 삶의 노예가 되어서 그런가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단의 권세가운데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13절에,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했습니다. 입 속에 있는 것중 어느 한 가지 선한 것이 없습니다. 목구멍을 통해서 나오는 말도 악하고, 그 말을 놀리는 혀도 속임을 베풀고, 밖으로 표현하는 입술도 궤악하여 ‘독사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입에 저주와 악독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발은 다른 사람을 해하는데 사용됩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감당합니다.
16-17절에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주님의 평강의 길을 앎이 없고 오직 파멸과 고생만 생각하고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육신의 눈이건 마음의 눈이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도 오래참으시는 중에 진노를 쌓아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미치지 못하되 한 사람도 그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해서, 율법을 받은 자는 그 율법의 판단으로 망하고, 율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율법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그들에게 없음으로 망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절대적 부족을 ‘하나도 없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했고, 12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했고,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하나님)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σάρξ)가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육체’라고 함은 우리 부족하고 죄많은 인간을 가리킵니다.
우리 고깃덩이인 신체를 가지고 인간을 지칭함에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를 육체라고도 할 수 있고, 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몸(body)이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데 더 적절하고 긍정적인 용어인 반면, 육체(flesh)라고 함은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 인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할 때, 이 몸은 우리 자신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 자신을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의 몸(σώμα)은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육신은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며 부활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우리 가운데 있는 부정적인 부분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그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다”고 베드로 사도가 표현합니다(벧전 3:18). 육체의 부정적인 모습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함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고 썩어질 수 밖에 없는 종국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육체는 우리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다음에도 여전히 죄의 법 아래 놓여있는 것이며, 해서 그 결국이 죽음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신 다음에도 육신으로 항상 시험의 대상이 됩니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 7장 25절에서,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짐은,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달아 알고, 해서 더욱더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3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만족하고 자랑스러운 일보다는 부족하고 후회되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음을 봅니다. 해서, 우리의 매일 매일 삶 가운데 더 많이 기도하고, 찬송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사업을 감당함으로 주님 안에서 자랑꺼리가 많이 생기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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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녀가 더 예쁘게 생긴 다른 사람의 아이보다 나에게 더 사랑스러운 이유들이 여럿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낳은 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원 창조주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나의 육체를 빌어 만들어진 아이이기에 남의 아이보다 더 사랑스럽습니다.
둘째는 나의 자녀가 나를 닮았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못생긴 나보다는 잘 생긴 백인을 닮았으면 하는 마음도 들 것이지만 만일 나의 아이가 그런 얼굴이라면 사랑스럽기 보다는 아마도 마음 속에서 분노와 의심이 들 것입니다.
셋째는 나를 아빠라고,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고, 또 찾기에 귀찮으면서도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을 때에 당연히 나를 제일 좋다고 대답할 줄 알기에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자신의 의사로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넷째는 나의 말을 잘 듣고 행하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말을 안듣는 자식 보다는 말을 잘듣는 자식이 내 생각에 잘 키운 자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사람들이 기도생활을 잘하지 않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나열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나의 속을 꿰뚫어 보고 계신 분이라면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네 하나님이니까 네가 기도하면 응답해주시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이니까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아시대의 주위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시대에 주변의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취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도 이런 태도를 흔히 취하였습니다.
셋째는 기도하나 안하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기도하는 시간 만큼 하나님께서 돈을 쏟아부어주신다면 이 세상에 기도 안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며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주시며 달라는 대로 다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이나 자빠져서 입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인간 부모도 자녀가 한번 요구할 때는 안된다고 말하다가도 계속 강청할 때는 하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께서도 그러실 수 있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넷째는 현재의 생활에 부족함이 없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함이 없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나태함에서 나온 것이지 부족한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세상 일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다섯째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화도 해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고, 여행도 해야 하고, 자녀도 길러야 하고, 밥도 먹어야하고, 직장생활, 학교생활도 해야 하고, 비디오도 봐야 하고, 하기 때문에 정작 하루에 십분만 들이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은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다하고 남은 시간이 있어도 기도할 생각은 안하고 뭐 재미난 일 없나 궁리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여섯째는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고 귀하다”라고 찬송했는데,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응답받는 기도의 즐거움’을 알기만 한다면 기도 그만 하라 해도 서로 다투어 기도하려고 할 것인데 말입니다.
일곱째는 기도의 영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기도의 영이신데(롬 8:26) 성령의 큰 바람이 우리 마음 속에서 불지않고 있기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기도하다가 정말 예수믿는데 푹 빠져 버릴까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진짜로 내 앞에 나타나시면 어떻게 하나?’ ‘내가 기도생활을 열심히하다 세상의 재미를 잊어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더 좋은 천국은 놔두고 약간은 지옥에 머물기를 원하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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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17절-3장 8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맡기셨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를 행치 못하여 죄 아래 놓이고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그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그러면 이방인인 너희는 유대인 보다 나은 것이 있으며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뇨? 바울이 ‘우리’라고 함으로 자신까지도 이방인의 수에 집어넣은 것은 이방인의 사도인 자신과 그들을 동질화시킨 것입니다. 율법을 맡은 유대인이 하나님 앞에 미치지 못한 것 같이, 이방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하나님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지만 그를 따라 행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함은 한 가지란 것입니다.
시편기자가 선언한 대로 세상에 의인은 없는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변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 살 동안 인간이 잘났다 다투지만 따지고 보면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부족하고 무익한 인간을 사랑하시되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11절에,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약속하시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의 뜻을 깨닫는 자가 없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만 합니다. 해서,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되 세상 가운데 자신들의 이기적인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無益)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탄식합니다.
인간이 구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반대 편에 놓인 세상의 쾌락일 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모된 자로서 우리 자식들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와 하면서도 막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일이 무엇인가 헤아리는 지혜가 없음은 어찌된 까닭인지 모를 일입니다. 삶의 노예가 되어서 그런가요?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단의 권세가운데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13절에,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했습니다. 입 속에 있는 것중 어느 한 가지 선한 것이 없습니다. 목구멍을 통해서 나오는 말도 악하고, 그 말을 놀리는 혀도 속임을 베풀고, 밖으로 표현하는 입술도 궤악하여 ‘독사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입에 저주와 악독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발은 다른 사람을 해하는데 사용됩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감당합니다.
16-17절에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주님의 평강의 길을 앎이 없고 오직 파멸과 고생만 생각하고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육신의 눈이건 마음의 눈이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도 오래참으시는 중에 진노를 쌓아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미치지 못하되 한 사람도 그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해서, 율법을 받은 자는 그 율법의 판단으로 망하고, 율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율법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그들에게 없음으로 망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절대적 부족을 ‘하나도 없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했고, 12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했고,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하나님)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σάρξ)가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육체’라고 함은 우리 부족하고 죄많은 인간을 가리킵니다.
우리 고깃덩이인 신체를 가지고 인간을 지칭함에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를 육체라고도 할 수 있고, 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몸(body)이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데 더 적절하고 긍정적인 용어인 반면, 육체(flesh)라고 함은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 인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할 때, 이 몸은 우리 자신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 자신을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이리할 때, 우리의 몸(σώμα)은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육신은 죄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며 부활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우리 가운데 있는 부정적인 부분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그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다”고 베드로 사도가 표현합니다(벧전 3:18). 육체의 부정적인 모습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함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고 썩어질 수 밖에 없는 종국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육체는 우리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다음에도 여전히 죄의 법 아래 놓여있는 것이며, 해서 그 결국이 죽음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신 다음에도 육신으로 항상 시험의 대상이 됩니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 7장 25절에서,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짐은,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달아 알고, 해서 더욱더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3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만족하고 자랑스러운 일보다는 부족하고 후회되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음을 봅니다. 해서, 우리의 매일 매일 삶 가운데 더 많이 기도하고, 찬송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사업을 감당함으로 주님 안에서 자랑꺼리가 많이 생기기를 소망해봅니다.
“유대인에 대한 심판” (로마서 2:17-3:8)
“유대인에 대한 심판” (로마서 2:17-3:8)
1
사람의 건강을 점검하는 기준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밥을 잘 먹고, 먹은 것 잘 소화(消化)하여 배설(排泄) 잘 하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문제가 있으면 건강치 못하다는 적신호(赤信號)이요 해서 의사의 진단(診斷)을 받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도 몸이 건강해야지 믿음의 생활을 잘 할수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고 괴로우면 교회에 나오는 것도 남을 도와주는 것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만사가 다 귀찮기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육신의 건강 위에 믿음이 건강(健康)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건강 진단법도 육신의 건강 진단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밥이 맛이 있고 잘 먹혀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은 재미있는 소설이나 영화나 텔레비젼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맛있게 느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저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 “너무 어려워.” “목사님의 설교가 오늘따라 왜 이리 긴거야? 집에 빨리 가야 하는데.” 하는 소리가 나올 때 우리의 믿음은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주일날 하루 교회 나가는것도 겨우 가는 것인데 뭐, 주중에도 교회에 나오라고 해?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인줄 알아?” 하는 불평이 내 안에 있을 때, 나의 믿음은 병들어 있습니다.
육신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진 밥 된 밥, 더운 밥 찬 밥, 흰 쌀밥이나 깡보리 밥이 다 맛있는 것 처럼,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도,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전도사님의 설교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 맛있고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밥투정 반찬투정을 하는 사람치고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실 때,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되던 시기에 여러분은 분명히 성경을 가까이 대하시고 목사님의 말씀이 은혜롭고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지 않던 때는 성경도 멀리하고 목사님의 설교도 지루하고 재미없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건강한 목회자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 가정이 평안하고, 사업이 잘 되고, 육신이 건강하고, 믿음의 생활을 잘하는 분들이 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믿음이 떨어질 때 입에서 교인들에 대한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이 건강한 교회는 교인들과 목회자가 서로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교회입니다.
둘째로,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잘 소화하고 배설합니다. 말씀의 밥을 성경을 통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맛있게 먹은 건강한 사람은 말씀을 잘 소화합니다. 위에 들어가서 골고루 잘 다져집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말씀의 밥이 맛이 없어 식사를 거르거나 조금 밖에 먹지 못하고, 먹었다 하더라도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여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장애를 일으키지만, 건강한 사람은 소화가 잘 되어 거뜬합니다.
건강하다는 증거는 내가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먹은 것을 잘 소화하여 필요한 것은 신체 각 부분으로 골고루 보내고 그 기운으로 직장에서 건전한 직장생활을 하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필요 없는 것은 배설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먹기는 잘 먹었는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곧 소화불량이 걸리거나 혹은 비정상적인 비만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식사를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식사를 맛있게 잘하였는데, 믿음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조만간 소화불량에 걸려 더 이상 음식이 맛이 없게 되거나 음식이 맛있어서 계속 먹기는 하지만 사용할 때가 없어서 믿음의 활동을 못하는 바람에 믿음의 비만현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해서, 머리만 살쪄서 비판적이 되거나 몸이 살쪄서 종국에는 전혀 믿음의 활동을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결과를 가져옵니다.
셋째로, 잠을 잘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건강한 사람도 중단없이 밥을 먹고 활동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수면이 필요하듯이 믿음의 사람도 자신의 영혼을 쉬게 하여 내일 또 건강한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들 가운데는 믿음의 밥을 먹고 소화시키고 활동하는 것이 좋다고 중단없이 하다가 단명(短命)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慾心)이요 자기의 의(義)를 드러내고자 함에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2
바울은 2장 전반부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지 못하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 때,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주님의 날에 나타날 것인데, 그 심판은 진리대로, 행한 대로, 공평하게 나타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없이 모든 불의한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그들이 택함을 받은 자로서 율법을 받은 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율법의 정신을 무시한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산다고 했지만 이는 그들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지만 구원(救援)에 이를 것이라는 잘못된 이해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해서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되 마음에서는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극단적으로 말씀하시지만 기실 잘못을 범하는 주체는 눈이 아니고 손이 아니고 우리 인간의 중심인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범죄케 하는 마음을 제하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2장 21-2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힐문(詰問)합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반문할 것입니다: “내가 언제 도적질하고, 내가 언제 간음하고, 내가 언제 신사 물건을 훔쳤느냐?” 그들이 겉으로는 설령 그러한 일을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고 음욕을 품었다면 그와같은 일을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왜 합니까? 이는 유대인들의 율법지킴과 하나님을 경외함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뿐 마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함입니다.
25절에서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헌신은 형식적으로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살고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율법의 정신을 범할 때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28-29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할 것은 신약시대 바울이 처음 말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새를 통하여 율법을 주실 때에 이미 말씀한 것입니다. 신명기 10:16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했습니다. 또, 예레미야 4:4에,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이 중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 중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으면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참 유대인됨은, 우리의 참 하나님의 택한 백성됨은 우리가 교회 교적부에 등록되어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령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인치셨느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문은 사람의 일로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령으로(in the spirit) 하나님께 속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3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질문합니다. 유대인도 다른 이방인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고 유대인의 율법지킴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므로 유대인의 나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이 범사에 많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우선적인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심은 그들이 잘났거나 의로와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있지만 자랑할 것이 없음은 하나님의 긍휼인 까닭입니다.
3절에 “어떤 사람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선하시기에 그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이 다 구원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에는 정원(定員)이 없습니다. ‘아무나 와도 좋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예복을 입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을 알리고 또 알렸는데도 믿음의 예복을 입지않고 와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은 미쁘시지 아니하고 선하지 아니하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구원하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종국에는 모든 인간이 다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만인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분명히 모든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whosoever)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까닭이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미쁘심(=the faith of God), 신실하심을 폐한 까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여전할 때, 그들을 징계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할례를 받게 하시고 후에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심은 그들에게 무거운 의무감을 지우시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속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면서 겉으로만 율법지키는체 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가 불의를 행하는 것도 좋고,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가 거짓말하여도 좋고,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악을 행하여도 좋다’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분이 아니고, 그 스스로 의로우시고, 참되시며, 선하신 분입니다.
3
현재 믿음의 생활을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체면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의를 행하고 신앙의 삶을 살고있지만,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있는 건강치 못하고 병든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믿음이 병든 것을 알면서도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믿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참 할례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참 유대인의 마음으로 우리의 신령한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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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건강을 점검하는 기준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밥을 잘 먹고, 먹은 것 잘 소화(消化)하여 배설(排泄) 잘 하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문제가 있으면 건강치 못하다는 적신호(赤信號)이요 해서 의사의 진단(診斷)을 받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도 몸이 건강해야지 믿음의 생활을 잘 할수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고 괴로우면 교회에 나오는 것도 남을 도와주는 것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만사가 다 귀찮기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육신의 건강 위에 믿음이 건강(健康)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건강 진단법도 육신의 건강 진단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밥이 맛이 있고 잘 먹혀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은 재미있는 소설이나 영화나 텔레비젼 연속극보다 더 재미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맛있게 느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저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 “너무 어려워.” “목사님의 설교가 오늘따라 왜 이리 긴거야? 집에 빨리 가야 하는데.” 하는 소리가 나올 때 우리의 믿음은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주일날 하루 교회 나가는것도 겨우 가는 것인데 뭐, 주중에도 교회에 나오라고 해?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인줄 알아?” 하는 불평이 내 안에 있을 때, 나의 믿음은 병들어 있습니다.
육신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진 밥 된 밥, 더운 밥 찬 밥, 흰 쌀밥이나 깡보리 밥이 다 맛있는 것 처럼,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도,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전도사님의 설교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 맛있고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밥투정 반찬투정을 하는 사람치고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실 때,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되던 시기에 여러분은 분명히 성경을 가까이 대하시고 목사님의 말씀이 은혜롭고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지 않던 때는 성경도 멀리하고 목사님의 설교도 지루하고 재미없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건강한 목회자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 가정이 평안하고, 사업이 잘 되고, 육신이 건강하고, 믿음의 생활을 잘하는 분들이 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믿음이 떨어질 때 입에서 교인들에 대한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이 건강한 교회는 교인들과 목회자가 서로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교회입니다.
둘째로,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잘 소화하고 배설합니다. 말씀의 밥을 성경을 통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맛있게 먹은 건강한 사람은 말씀을 잘 소화합니다. 위에 들어가서 골고루 잘 다져집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말씀의 밥이 맛이 없어 식사를 거르거나 조금 밖에 먹지 못하고, 먹었다 하더라도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여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장애를 일으키지만, 건강한 사람은 소화가 잘 되어 거뜬합니다.
건강하다는 증거는 내가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먹은 것을 잘 소화하여 필요한 것은 신체 각 부분으로 골고루 보내고 그 기운으로 직장에서 건전한 직장생활을 하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또 필요 없는 것은 배설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먹기는 잘 먹었는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곧 소화불량이 걸리거나 혹은 비정상적인 비만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식사를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식사를 맛있게 잘하였는데, 믿음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조만간 소화불량에 걸려 더 이상 음식이 맛이 없게 되거나 음식이 맛있어서 계속 먹기는 하지만 사용할 때가 없어서 믿음의 활동을 못하는 바람에 믿음의 비만현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해서, 머리만 살쪄서 비판적이 되거나 몸이 살쪄서 종국에는 전혀 믿음의 활동을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결과를 가져옵니다.
셋째로, 잠을 잘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건강한 사람도 중단없이 밥을 먹고 활동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수면이 필요하듯이 믿음의 사람도 자신의 영혼을 쉬게 하여 내일 또 건강한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들 가운데는 믿음의 밥을 먹고 소화시키고 활동하는 것이 좋다고 중단없이 하다가 단명(短命)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慾心)이요 자기의 의(義)를 드러내고자 함에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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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2장 전반부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지 못하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 때,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주님의 날에 나타날 것인데, 그 심판은 진리대로, 행한 대로, 공평하게 나타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없이 모든 불의한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그들이 택함을 받은 자로서 율법을 받은 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율법의 정신을 무시한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산다고 했지만 이는 그들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지만 구원(救援)에 이를 것이라는 잘못된 이해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해서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되 마음에서는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극단적으로 말씀하시지만 기실 잘못을 범하는 주체는 눈이 아니고 손이 아니고 우리 인간의 중심인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범죄케 하는 마음을 제하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2장 21-2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힐문(詰問)합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반문할 것입니다: “내가 언제 도적질하고, 내가 언제 간음하고, 내가 언제 신사 물건을 훔쳤느냐?” 그들이 겉으로는 설령 그러한 일을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고 음욕을 품었다면 그와같은 일을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왜 합니까? 이는 유대인들의 율법지킴과 하나님을 경외함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뿐 마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함입니다.
25절에서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헌신은 형식적으로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살고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율법의 정신을 범할 때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28-29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할 것은 신약시대 바울이 처음 말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새를 통하여 율법을 주실 때에 이미 말씀한 것입니다. 신명기 10:16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했습니다. 또, 예레미야 4:4에,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이 중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 중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으면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참 유대인됨은, 우리의 참 하나님의 택한 백성됨은 우리가 교회 교적부에 등록되어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령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인치셨느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문은 사람의 일로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령으로(in the spirit) 하나님께 속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3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질문합니다. 유대인도 다른 이방인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고 유대인의 율법지킴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므로 유대인의 나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이 범사에 많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우선적인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심은 그들이 잘났거나 의로와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있지만 자랑할 것이 없음은 하나님의 긍휼인 까닭입니다.
3절에 “어떤 사람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선하시기에 그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이 다 구원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에는 정원(定員)이 없습니다. ‘아무나 와도 좋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예복을 입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을 알리고 또 알렸는데도 믿음의 예복을 입지않고 와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은 미쁘시지 아니하고 선하지 아니하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구원하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종국에는 모든 인간이 다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만인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분명히 모든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whosoever)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까닭이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미쁘심(=the faith of God), 신실하심을 폐한 까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여전할 때, 그들을 징계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할례를 받게 하시고 후에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심은 그들에게 무거운 의무감을 지우시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속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면서 겉으로만 율법지키는체 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가 불의를 행하는 것도 좋고,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가 거짓말하여도 좋고,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악을 행하여도 좋다’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분이 아니고, 그 스스로 의로우시고, 참되시며, 선하신 분입니다.
3
현재 믿음의 생활을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체면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의를 행하고 신앙의 삶을 살고있지만,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있는 건강치 못하고 병든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믿음이 병든 것을 알면서도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믿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참 할례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참 유대인의 마음으로 우리의 신령한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Sunday, September 1, 2013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로마서 2:1-16)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로마서 2:1-16)
1
돼지 열 마리가 소풍을 가기로 결정하고 먹을 음식을 풍성히 장만하여 집을 나섭니다. 가는 길에 개울을 만나 조심조심 한 마리씩 개울을 건넙니다. 더 이상 건너올 돼지가 없자 그들은 무리의 수를 헤아립니다. 아무리 헤아려도 아홉 마리뿐입니다. 그들은 수십번 반복하여 교대로 헤아려 보지만 그들의 숫자는 아홉 마리뿐입니다. 돼지들은 ‘혹시 없어진 친구가 있나?’ 살펴보지만 없어진 친구는 없는데 숫자는 여전히 아홉입니다. 그들은 소풍의 즐거움을 맛보는 대신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개울가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합니다. 개울을 건너기 전에 그들이 열마리인 것을 안 것도 아마 그들 스스로 세어서 안 것이 아니라 같이 소풍을 떠나지 않은 다른 돼지가 세어서 알려준 것일 껍니다. 그들 가운데 한 마리가 부족한 것은 자신은 그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은 까닭이며, 이러한 셈을 ‘돼지셈’이라고 합니다.
한국사람들의 언어습관에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의 경우에는 다 ‘I,' 'my'로 표현될 것들인데, 한국사람들은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공동체, 연대 의식이 강함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부정적으로 보면 ‘내’가 빠져 나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며, ‘나’는 책임을 면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잘 되었으면, 그 여러명 가운데서 특별히 수고한 유집사님은 ‘내’가 그 일을 성공적으로 끝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이 있는 듯이 떠벌립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잘못되었으면, ‘우리’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책임소재를 약화시켜버립니다. 목사님이 설교시간을 통하여 혹은 광고시간을 통하여, ‘우리 모두 교회를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모이기에 힘씁시다’ 힘주어서 말하지만, 그 우리 모두 가운데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서 혹은 자연스럽게 빠져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데, 우리 교회가 냉냉하대요’ 말하는 오집사님은 자신은 우리 교회의 구성원이 아닌 듯, 따라서 자신은 그 냉냉함의 책임이 없는 양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렵다구?!’ ‘그래, 우리 모두가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신하고, 헌물해야지!’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말고 다른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와 ‘나’를 혼용하는 한국사람의 언어습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와 ‘나’의 사용 자리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할 상황에서는 ‘나’란 말을 더욱 더 자주 사용하고, ‘칭찬꺼리나 기쁨꺼리’가 되는 상황에서는 ‘우리’ 혹은 ‘다른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은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할 기독교의 기본교리와 실천사항들을 설명합니다. 1-8장이 교리부분이요, 9-11장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위한 괄호안의 사항이고, 12-16장이 실천부분입니다.
바울은 ‘이신칭의(以信稱義)’--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음--의 교리를 전개함에, 1:1-17에서 먼저 ‘이신칭의’의 로마서 주제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설명해나갑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인간의 죄성을 먼저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밝히 보여 알게 하셨는데도,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져 하나님으로 점점 멀어집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부끄러운 욕심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주시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 판정으로서의 죽음은 ‘존재의 정지’--‘영면(永眠)--영원한 안식’이 아닙니다. 심판의 결과로서의 죽음은 ‘영원한 형벌--영원한 고통’--‘영원히 죽는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닌 두려움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지만 동시에 ‘선하시기에’ 인간이 이러한 고통 당함을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심판하시는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한 사람도 예외없이, 우리가 빼기를 바라는 나까지도 포함하여--이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하였습니다. 바울은 2:1-16에서, 이러한 인간의 죄의 종국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17-3:20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모든 인간--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심판의 세 가지 속성을 증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according to truth) 되어집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함으로서 자신은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하지만 진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그러한 판단의 말로 인해 그 사람을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냉냉해요”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도 그 냉냉함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너부터 잘해” 하실 것입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만, 그렇다고 목사님은 ‘그가 증거하는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좋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개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했고, 3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했습니다.
죄(罪)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4절에서와 같이,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으로 그가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가 끝내 돌아오지 않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이거나,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하는 처사입니다.
5절에,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잘못 가운데 즉각 즉각 하나님께서 징벌하지 않으심을 보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징벌이 없다고 주장하며 더욱 더 죄된 생활을 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이 얼마나 큰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큰 줄 아시기에 될 수 있는대로 오래 참으심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모든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며 그의 과거 죄와 현재 죄와 미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시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 쌓여가 마지막에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진리대로 된다고 함은 하나님의 심판선언이 거짓이 아니라 참이며, 신실하며, 영원하며, 반드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판단하시되, 그 행한 대로(according to his deeds) 심판하십니다.
7절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절에,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오래 참음으로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행한 대로 이루어지는 공정한 판단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외의 방법으로,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입을 육체가 없습니다.
행한 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는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공력심판 혹은 상급심판에 원용되어지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부끄러운 구원과 상급이 있는 구원이 그것입니다.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환난과 곤고의 징벌을 주실 것인데,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유대인과 헬라인 모두가 그 대상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공의로(according to impartiality) 판단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판단은 공평하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없이 모든 인간에게 행해진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없이 범죄한 이방인은 율법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하나님을 알만한 것에 따라서 판단하시고, 율법이 주어진 유대인은 율법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들려졌다고 해서 그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인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함은 하나님의 심판이 율법을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나 구별없이 공의로 모두에게 임함을 밝히고자 함이지, 율법이 주어진 자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함은 율법을 받지 못한 자나 받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그 스스로는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마음에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산 사람들이나, 과거나 현재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겸손하고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14-15절에,“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그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했습니다.
원용하여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와 같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이와같은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이 사람이 온전한 까닭이 아니요 하나님의 긍휼이 그에게 나타난 까닭입니다.
인간들의 죄와 허물은 은밀한 가운데 다른 사람이 모르게 저질러지는 것 같지만, 우리 인간의 심중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되 진리대로, 행한 대로, 공의로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을 하시는 날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3
우리 가운데 아직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자신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까? 요한1서 1:10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 보다는 나를 더 나타내고자 합니까? 교만의 마음을 버리시고 자신의 마음 속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직 죄사함의 확신이 없으십니까?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서 죄사함 받음의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1
돼지 열 마리가 소풍을 가기로 결정하고 먹을 음식을 풍성히 장만하여 집을 나섭니다. 가는 길에 개울을 만나 조심조심 한 마리씩 개울을 건넙니다. 더 이상 건너올 돼지가 없자 그들은 무리의 수를 헤아립니다. 아무리 헤아려도 아홉 마리뿐입니다. 그들은 수십번 반복하여 교대로 헤아려 보지만 그들의 숫자는 아홉 마리뿐입니다. 돼지들은 ‘혹시 없어진 친구가 있나?’ 살펴보지만 없어진 친구는 없는데 숫자는 여전히 아홉입니다. 그들은 소풍의 즐거움을 맛보는 대신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개울가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합니다. 개울을 건너기 전에 그들이 열마리인 것을 안 것도 아마 그들 스스로 세어서 안 것이 아니라 같이 소풍을 떠나지 않은 다른 돼지가 세어서 알려준 것일 껍니다. 그들 가운데 한 마리가 부족한 것은 자신은 그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은 까닭이며, 이러한 셈을 ‘돼지셈’이라고 합니다.
한국사람들의 언어습관에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의 경우에는 다 ‘I,' 'my'로 표현될 것들인데, 한국사람들은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공동체, 연대 의식이 강함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부정적으로 보면 ‘내’가 빠져 나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며, ‘나’는 책임을 면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잘 되었으면, 그 여러명 가운데서 특별히 수고한 유집사님은 ‘내’가 그 일을 성공적으로 끝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이 있는 듯이 떠벌립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잘못되었으면, ‘우리’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책임소재를 약화시켜버립니다. 목사님이 설교시간을 통하여 혹은 광고시간을 통하여, ‘우리 모두 교회를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모이기에 힘씁시다’ 힘주어서 말하지만, 그 우리 모두 가운데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의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서 혹은 자연스럽게 빠져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데, 우리 교회가 냉냉하대요’ 말하는 오집사님은 자신은 우리 교회의 구성원이 아닌 듯, 따라서 자신은 그 냉냉함의 책임이 없는 양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렵다구?!’ ‘그래, 우리 모두가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신하고, 헌물해야지!’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말고 다른 사람이 그러한 일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와 ‘나’를 혼용하는 한국사람의 언어습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와 ‘나’의 사용 자리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할 상황에서는 ‘나’란 말을 더욱 더 자주 사용하고, ‘칭찬꺼리나 기쁨꺼리’가 되는 상황에서는 ‘우리’ 혹은 ‘다른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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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할 기독교의 기본교리와 실천사항들을 설명합니다. 1-8장이 교리부분이요, 9-11장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위한 괄호안의 사항이고, 12-16장이 실천부분입니다.
바울은 ‘이신칭의(以信稱義)’--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음--의 교리를 전개함에, 1:1-17에서 먼저 ‘이신칭의’의 로마서 주제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설명해나갑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인간의 죄성을 먼저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밝히 보여 알게 하셨는데도,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져 하나님으로 점점 멀어집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부끄러운 욕심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주시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 판정으로서의 죽음은 ‘존재의 정지’--‘영면(永眠)--영원한 안식’이 아닙니다. 심판의 결과로서의 죽음은 ‘영원한 형벌--영원한 고통’--‘영원히 죽는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닌 두려움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지만 동시에 ‘선하시기에’ 인간이 이러한 고통 당함을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심판하시는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한 사람도 예외없이, 우리가 빼기를 바라는 나까지도 포함하여--이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하였습니다. 바울은 2:1-16에서, 이러한 인간의 죄의 종국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17-3:20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모든 인간--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심판의 세 가지 속성을 증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according to truth) 되어집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함으로서 자신은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하지만 진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그러한 판단의 말로 인해 그 사람을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냉냉해요”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도 그 냉냉함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너부터 잘해” 하실 것입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만, 그렇다고 목사님은 ‘그가 증거하는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좋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개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했고, 3절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했습니다.
죄(罪)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4절에서와 같이,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으로 그가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가 끝내 돌아오지 않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이거나,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하는 처사입니다.
5절에,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잘못 가운데 즉각 즉각 하나님께서 징벌하지 않으심을 보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징벌이 없다고 주장하며 더욱 더 죄된 생활을 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이 얼마나 큰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큰 줄 아시기에 될 수 있는대로 오래 참으심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모든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며 그의 과거 죄와 현재 죄와 미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시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 쌓여가 마지막에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진리대로 된다고 함은 하나님의 심판선언이 거짓이 아니라 참이며, 신실하며, 영원하며, 반드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판단하시되, 그 행한 대로(according to his deeds) 심판하십니다.
7절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절에,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오래 참음으로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행한 대로 이루어지는 공정한 판단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외의 방법으로,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입을 육체가 없습니다.
행한 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는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공력심판 혹은 상급심판에 원용되어지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부끄러운 구원과 상급이 있는 구원이 그것입니다.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환난과 곤고의 징벌을 주실 것인데,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유대인과 헬라인 모두가 그 대상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공의로(according to impartiality) 판단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판단은 공평하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없이 모든 인간에게 행해진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없이 범죄한 이방인은 율법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하나님을 알만한 것에 따라서 판단하시고, 율법이 주어진 유대인은 율법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들려졌다고 해서 그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인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함은 하나님의 심판이 율법을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나 구별없이 공의로 모두에게 임함을 밝히고자 함이지, 율법이 주어진 자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함은 율법을 받지 못한 자나 받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그 스스로는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마음에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산 사람들이나, 과거나 현재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겸손하고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14-15절에,“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그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했습니다.
원용하여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와 같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이와같은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이 사람이 온전한 까닭이 아니요 하나님의 긍휼이 그에게 나타난 까닭입니다.
인간들의 죄와 허물은 은밀한 가운데 다른 사람이 모르게 저질러지는 것 같지만, 우리 인간의 심중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되 진리대로, 행한 대로, 공의로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을 하시는 날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3
우리 가운데 아직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자신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까? 요한1서 1:10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 보다는 나를 더 나타내고자 합니까? 교만의 마음을 버리시고 자신의 마음 속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직 죄사함의 확신이 없으십니까?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서 죄사함 받음의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내어버려두시는 하나님” (로마서 1:18-32)
“내어버려두시는 하나님” (로마서 1:18-32)
1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도 이를 말함입니다. 갚을 길 없는 일만 다라란트 빚진 자가 임금의 탕감함을 받았을 때 그는 마땅히 임금께 감사함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 감사를 나눔으로 표시했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는 입으로는 임금께 감사하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감사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을 때 그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당장 갚으라고 호통하며 그가 이를 갚지 못할 때 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그의 인색한 마음을 안 임금은 그의 은혜를 취소하여 버립니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Think God)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Thank God)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마음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머물기를 원하시는 곳입니다.
영국의 작가 아이작 윌톤(Issac Wilton)은 말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천국이요, 또 다른 한 곳은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사랑으로 같이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2
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의 한 표현으로 경건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불경건하고 불의한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건과 의를 어떻게 헤아려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느가?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바울은 바로 그 해답을 제공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배우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악을 배우지 않고도 악을 행하는 속성이 우리 가운데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배우지 않고도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대강은 압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부연(敷衍)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리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우리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아는 힘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하기를 “저는 하나님께소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 경건치 않은 삶을 살고 불의를 범하였나이다”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앞에 핑계할 것이 없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긴 알지만, 불의한 인간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영어로는 know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뿐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것--know and accept, 즉, acknowledge--인데, 곧 인정하는 것인데 불의한 인간은 그 자신의 욕심과 교만이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되, 받아들이지 않고, 입으로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한 입술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해서, 22절에 기록된 대로, “스스로 지혜있는 척하나, 우준한 자가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썩어질 것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되 ‘내어버려두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를 넓은 가슴으로 맞아주시지만, 그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어 하나님 대신에 썩어질 것을 계속 찾을 때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어버려두사’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했고, 26절에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사” 했고, 28절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했습니다. 해서, 인간의 죄와 허물은 점점 더 심화해갑니다.
24절이하에서 바울은 “내어버려두사”라는 말과 함께 인간의 죄를 세 구분했는데,
첫째는 24-25절에 있는 대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조물주--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권력을, 돈을 더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26-27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순리(順理)대로 살게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순리를 버리고, 역리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한 쌍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여자와 여자가 혹은 남자와 남자가 서로 결합하고자 하는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잘못을 범하면서도 이를 당연시 여길 뿐아니라, 합리화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러한 성향을 갖고 태어났는데 생긴 모양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 무슨 잘못이냐? 일리있는 반박같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맞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 태어날 때부터 악이 있다고 그 악한 생각과 마음을 당연시 여기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악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리듯이 순리를 거스리고 역리대로 살고자 하는 성향의 악도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아뢰고 이를 없이하여 달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28-31절에 열거된 기타의 모든 합당치못한 나쁜 행실과 마음입니다. 이러한 악은 인간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그 상실(喪失)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중의 심화된 잘못으로 인간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그 스스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사형(死刑)’입니다. 그런데 악한 인간은 자신들이 죽을 자들인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와 삶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도 부추기어 자기와 같은 불경건과 불의를 행하게 만들고 그 일을 행하는 그들을 옳다고 하므로 집단적 죄를 범하게 하고 이로서 위안(慰安)을 삼고자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인간들은 우리를 돌이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3
오늘을 사는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십니까? 잘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사모하며,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1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도 이를 말함입니다. 갚을 길 없는 일만 다라란트 빚진 자가 임금의 탕감함을 받았을 때 그는 마땅히 임금께 감사함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 감사를 나눔으로 표시했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는 입으로는 임금께 감사하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감사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을 때 그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당장 갚으라고 호통하며 그가 이를 갚지 못할 때 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그의 인색한 마음을 안 임금은 그의 은혜를 취소하여 버립니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Think God)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Thank God)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마음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머물기를 원하시는 곳입니다.
영국의 작가 아이작 윌톤(Issac Wilton)은 말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천국이요, 또 다른 한 곳은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사랑으로 같이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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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의 한 표현으로 경건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불경건하고 불의한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건과 의를 어떻게 헤아려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느가?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바울은 바로 그 해답을 제공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배우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악을 배우지 않고도 악을 행하는 속성이 우리 가운데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배우지 않고도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대강은 압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부연(敷衍)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리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우리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아는 힘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하기를 “저는 하나님께소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 경건치 않은 삶을 살고 불의를 범하였나이다”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앞에 핑계할 것이 없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긴 알지만, 불의한 인간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영어로는 know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뿐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것--know and accept, 즉, acknowledge--인데, 곧 인정하는 것인데 불의한 인간은 그 자신의 욕심과 교만이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되, 받아들이지 않고, 입으로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한 입술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해서, 22절에 기록된 대로, “스스로 지혜있는 척하나, 우준한 자가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썩어질 것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되 ‘내어버려두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 그를 넓은 가슴으로 맞아주시지만, 그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어 하나님 대신에 썩어질 것을 계속 찾을 때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어버려두사’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했고, 26절에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사” 했고, 28절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했습니다. 해서, 인간의 죄와 허물은 점점 더 심화해갑니다.
24절이하에서 바울은 “내어버려두사”라는 말과 함께 인간의 죄를 세 구분했는데,
첫째는 24-25절에 있는 대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조물주--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권력을, 돈을 더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26-27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순리(順理)대로 살게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순리를 버리고, 역리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한 쌍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여자와 여자가 혹은 남자와 남자가 서로 결합하고자 하는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잘못을 범하면서도 이를 당연시 여길 뿐아니라, 합리화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러한 성향을 갖고 태어났는데 생긴 모양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 무슨 잘못이냐? 일리있는 반박같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맞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 태어날 때부터 악이 있다고 그 악한 생각과 마음을 당연시 여기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악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리듯이 순리를 거스리고 역리대로 살고자 하는 성향의 악도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아뢰고 이를 없이하여 달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28-31절에 열거된 기타의 모든 합당치못한 나쁜 행실과 마음입니다. 이러한 악은 인간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그 상실(喪失)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중의 심화된 잘못으로 인간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그 스스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사형(死刑)’입니다. 그런데 악한 인간은 자신들이 죽을 자들인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와 삶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도 부추기어 자기와 같은 불경건과 불의를 행하게 만들고 그 일을 행하는 그들을 옳다고 하므로 집단적 죄를 범하게 하고 이로서 위안(慰安)을 삼고자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인간들은 우리를 돌이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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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십니까? 잘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사모하며,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로마서 1:11-17)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로마서 1:11-17)
1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기도하는 일도 함께 시작됩니다.
혼자 속으로 기도하는 것은 겉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할 수 있는데,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속으로 기도하는 것도 주저되거나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집안식구들이 믿지 않을 때 식구들과 하는 식사자리에서 식사 기도하는 것도 주저됩니다.
집에서는 식사 기도를 잘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레스토랑이나 학교, 직장에서는 식사 기도함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혼자 조용히 예수 믿으면 되지 뭐 구태여 공개해야 되나?’ 하는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곧잘 소리내어 기도도 잘하는데,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라고 하면 주눅이 들고 해서 기도가 잘 나오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그 가운데는 나보다 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있기에--기도함이 부끄럽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창한 기도가 잘하는 기도가 아니고 어눌하고 부족한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진실한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기도한다면 이것이 잘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기에 친척이나 친지들에게 쉽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정치 얘기나 스포츠 얘기는 쉽고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인데도 성경얘기는 잘 꺼내지 못합니다. 친척이나 친지들은 ‘나’의 삶을 잘 알아서, ‘내’가 복음을 증거할 만한 삶의 모습이 없어서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낯선 사람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과 삶이 아직도 복음을 여전히 확신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본 사람은 자기가 본 호랑이에 대해서 아직 호랑이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호랑이에 관하여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기쁨을 맛본 사람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에 관하여 자기가 경험한 기쁨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없기에 자신 있게 입을 열어 증거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으로 인한 기쁨을 경험하였지만 증거하기를 주저하기도 합니다. 이는 그 증거함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부족한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는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를 나왔고 대학시절에도 홀리 클럽(Holy Club)을 열심히 하였고 25세에 엥글리칸(Anglican) 교파의 목사로 일찍이 목사가 된 장래가 촉망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자원하여 조지아주에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제대로 증거할 수 없는 그 자신을 발견하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는 목사였지만,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이 없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가운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요한 웨슬레가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를 걷고 있다가 조용한 찬송이 흘러나오는 교회의 문을 들어섭니다. 무명의 목사가 루터의 로마서강해 서문을 읽고있는데 이를 듣고있던 요한 웨슬레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믿음의 진리를 발견한 웨슬레는 그 작은 교회 한 구석에 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후에 요한 웨슬레는 그 일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밤 8시 45분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 마음 속에 일으키던 변화를 묘사하고 있는 동안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습니다. 나는 정말로 구원을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신뢰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만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그는 동생 찰스(Charles)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 "나는 믿는다!" 하고 큰 소리로 기쁨에 넘쳐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18일 후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네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불후의 명 설교를 합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복음에 대한 증거가 이제는 부담이나 부끄러움이 아니고 기쁨이요 감격이 된 것입니다.
혼자 속으로 기도하는 것은 겉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할 수 있는데,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속으로 기도하는 것도 주저되거나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집안식구들이 믿지 않을 때 식구들과 하는 식사자리에서 식사 기도하는 것도 주저됩니다.
집에서는 식사 기도를 잘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레스토랑이나 학교, 직장에서는 식사 기도함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혼자 조용히 예수 믿으면 되지 뭐 구태여 공개해야 되나?’ 하는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곧잘 소리내어 기도도 잘하는데,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라고 하면 주눅이 들고 해서 기도가 잘 나오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그 가운데는 나보다 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있기에--기도함이 부끄럽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창한 기도가 잘하는 기도가 아니고 어눌하고 부족한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진실한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기도한다면 이것이 잘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기에 친척이나 친지들에게 쉽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정치 얘기나 스포츠 얘기는 쉽고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인데도 성경얘기는 잘 꺼내지 못합니다. 친척이나 친지들은 ‘나’의 삶을 잘 알아서, ‘내’가 복음을 증거할 만한 삶의 모습이 없어서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낯선 사람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과 삶이 아직도 복음을 여전히 확신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본 사람은 자기가 본 호랑이에 대해서 아직 호랑이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호랑이에 관하여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기쁨을 맛본 사람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에 관하여 자기가 경험한 기쁨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없기에 자신 있게 입을 열어 증거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으로 인한 기쁨을 경험하였지만 증거하기를 주저하기도 합니다. 이는 그 증거함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부족한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는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를 나왔고 대학시절에도 홀리 클럽(Holy Club)을 열심히 하였고 25세에 엥글리칸(Anglican) 교파의 목사로 일찍이 목사가 된 장래가 촉망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자원하여 조지아주에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제대로 증거할 수 없는 그 자신을 발견하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는 목사였지만, 자신의 구원에 관한 확신이 없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가운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요한 웨슬레가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를 걷고 있다가 조용한 찬송이 흘러나오는 교회의 문을 들어섭니다. 무명의 목사가 루터의 로마서강해 서문을 읽고있는데 이를 듣고있던 요한 웨슬레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믿음의 진리를 발견한 웨슬레는 그 작은 교회 한 구석에 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후에 요한 웨슬레는 그 일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밤 8시 45분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 마음 속에 일으키던 변화를 묘사하고 있는 동안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습니다. 나는 정말로 구원을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신뢰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의 죄를 담당하셨고 그만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그는 동생 찰스(Charles)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 "나는 믿는다!" 하고 큰 소리로 기쁨에 넘쳐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18일 후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네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불후의 명 설교를 합니다.
요한 웨슬레에게 복음에 대한 증거가 이제는 부담이나 부끄러움이 아니고 기쁨이요 감격이 된 것입니다.
2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이방인 로마에는 바울이 아직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 믿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에 앞서 무명의 크리스천을 통하여 이미 로마에 복음이 증거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만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습니다.
믿는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고자 한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박해를 소망가운데 견디는 능력과 오래 참음의 은사일 것입니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이 로마에 여러 번 가기를 원하였으나 길이 막혔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고자 하나 때로는 우리의 원함대로 잘 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시는 대로 되어짐을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서도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맺게 하기를 원하였던 “열매”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이 그의 3차 전도여행 말기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들 돕기 위한 모금운동에 동참케 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로 인한 구제의 열매, 은혜의 열매였을 것입니다.
다른 이방교회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구제의 일에 동참하였는데, 바울이 바라기는 로마의 성도들도 그들의 핍박당함과 고난 가운데서도 구제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debtor, ὀφειλέτης)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왔노라고 했지만, 기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잔해(殘害)하고 죽이는 일에 동참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한 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恩惠)로 함께 하시며 그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죽음에 이르는 죄의 빚을 진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죽을 죄인들을 사랑해주셨으니 또한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진 빚은 하나님께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빚을 갚는 방법입니다.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6-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세 가지를 기술합니다:
첫째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태도(態度)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밝히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까닭입니다.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함이 하나님을 자랑함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의 성격(性格)입니다.
17절 전반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하나님의 두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선하시다’(good)는 속성과 ‘의로우시다’(righteous)는 속성이 있으신데,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속한 것이라면, 불의(unrighteousness)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불의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이십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데, 불의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 못하며, 이것이 바로 어둠이요 형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불의한 인간에게 나타남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불의한 인간이 의로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만 이를 수가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속에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우리의 행위로, 노력으로, 돈으로도, 학식으로도, 명예로도--의로와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로와질 수 있습니다.
‘의로와진다’(justified)는 말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의했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덧이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의의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죄가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의 내용(內容)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영의 눈, 믿음의 눈이 가리워져 발견치 못한 따름입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본체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반문(反問)할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굳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때에 우리가 의로와질 수 있고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는 사랑치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 하는 헛된 고백(告白)과도 갖습니다.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서 제 갈 길로 가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육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셨는데 이를 거부하고 믿지 않으며 이제까지 믿지 않던 하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미련하고 연약한 인간들은 보이게 임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임으로 의로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영생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에 앞서 무명의 크리스천을 통하여 이미 로마에 복음이 증거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뿐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만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습니다.
믿는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고자 한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박해를 소망가운데 견디는 능력과 오래 참음의 은사일 것입니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이 로마에 여러 번 가기를 원하였으나 길이 막혔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고자 하나 때로는 우리의 원함대로 잘 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시는 대로 되어짐을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서도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맺게 하기를 원하였던 “열매”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이 그의 3차 전도여행 말기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들 돕기 위한 모금운동에 동참케 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로 인한 구제의 열매, 은혜의 열매였을 것입니다.
다른 이방교회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구제의 일에 동참하였는데, 바울이 바라기는 로마의 성도들도 그들의 핍박당함과 고난 가운데서도 구제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debtor, ὀφειλέτης)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왔노라고 했지만, 기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잔해(殘害)하고 죽이는 일에 동참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한 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恩惠)로 함께 하시며 그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죽음에 이르는 죄의 빚을 진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죽을 죄인들을 사랑해주셨으니 또한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진 빚은 하나님께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빚을 갚는 방법입니다.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6-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세 가지를 기술합니다:
첫째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태도(態度)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밝히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까닭입니다.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함이 하나님을 자랑함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의 성격(性格)입니다.
17절 전반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하나님의 두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선하시다’(good)는 속성과 ‘의로우시다’(righteous)는 속성이 있으신데,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속한 것이라면, 불의(unrighteousness)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불의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이십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데, 불의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 못하며, 이것이 바로 어둠이요 형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불의한 인간에게 나타남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불의한 인간이 의로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만 이를 수가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속에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우리의 행위로, 노력으로, 돈으로도, 학식으로도, 명예로도--의로와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로와질 수 있습니다.
‘의로와진다’(justified)는 말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의했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덧이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의의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죄가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의 내용(內容)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영의 눈, 믿음의 눈이 가리워져 발견치 못한 따름입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본체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반문(反問)할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굳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때에 우리가 의로와질 수 있고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는 사랑치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 하는 헛된 고백(告白)과도 갖습니다.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서 제 갈 길로 가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육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셨는데 이를 거부하고 믿지 않으며 이제까지 믿지 않던 하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미련하고 연약한 인간들은 보이게 임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임으로 의로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영생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로마서의 기본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위하여 창세기 15장 6절과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긴 바 된 것은 바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에서 의인이 삶을 얻는 것은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킬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둘을 연결하여서, 우리 인간이 의로와지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킴으로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게된다고 증거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인간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했지만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에서 우리 연약한 인간이 의인이 되는 길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믿음의 선배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담대하게 증거한 것 같이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에 관하여 좀더 말할 기회를 얻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증거할 수 있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다른 믿음의 선배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담대하게 증거한 것 같이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에 관하여 좀더 말할 기회를 얻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증거할 수 있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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