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1, 2013

“이스라엘의 실패” (로마서 9:30-10:4)

                                              “이스라엘의 실패” (로마서 9: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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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방문하고 오신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일본에 가면 신간생이라고 하는 기차가 있다고 합니다. 그 기차는 보통의 특급열차보다 훨씬 빠르다고 합니다. 보통의 기차들은 객실을 끄는 기관차가 맨 앞쪽에 있습니다. 한 기관차가 여러 동의 객차를 끌고달립니다. 그 기관차가 힘이 좋다고 하여도 여러 객실을 끌어야 하기에 힘이 가해집니다. 그러나 신간생이라고 하는 기차는 각 객실 마다 기관(motor)이 달려 있습니다. 이 기관이 달려있는 각 객차가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자 할 때 힘이 한 방향으로 모아져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이로써, 신간생은 보통의 기차보다 훨씬 더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교회를 우리가 기차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끄는 사람이 혼자 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혼자 끌기에 힘이 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객차의 역할을 감당하고 그 객차에 ‘열심’이라고 하는 기관(motor)을 달고 같은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면 그 기차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잘못되어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없느니만 못한 ‘열심’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가는 길을 느리게 할 것이며 혹은 전복(顚覆)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이 신간생과도 같은 열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그 뜻을 이루는데 신명나게 잘 이루어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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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구절을 보니까 9장 30, 31절에 의(義)와 법(法)에 대해서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30절에 보니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했고, 31절에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란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는데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아니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는데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한 의가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아니한 율법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분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한 의가 나타났을 때 이방 사람들은 그 의--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믿음의 의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1절에 이른 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법을 좇아갔습니다. 이 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잘 지킬 수 있지 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따라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따라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법대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대로 법을 유추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임의해석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법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는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법보다는 사람의 법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것인데 사람들이 법을 편의해석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았기에 결국에 하나님의 의의 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방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면 다 하나님의 율법의 의에는 미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의의 삶을 살아왔노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들 역시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삶을 산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32절에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예에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은 준법정신을 의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참고: 창세기 15:6)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리 법을 잘 지킨다 하더라도 그들은 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의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의로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고속도로 속도제한이 55마일입니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55마일로 달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70마일 안팎으로 달립니다. 교통경찰이 잡으려고 마음먹으면 거의 다 잡을 수 있습니다. 차 만 대가 하이웨이에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전부 속도위반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마일 안팎으로 달리는 많은 차들 가운데 다른 차들보다도 훨씬 속도가 빠른 80마일 이상의 차만을 잡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같습니다. 법으로 따진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한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한 처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서 모든 사람을 대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다소 법을 어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을 때 그들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십니다.

33절에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했는데, 이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 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그 길 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돌이 놓여있습니다. ‘부딪히는 돌이, 거치는 반석’이 놓여있습니다. 그 돌을 통과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 돌 속으로 난 통로를 통하여 천국에 이르려 하지 않고 그 돌을 무시하고 천국에 이르려고 하다가 부딪히고 거치게 됩니다. 그 돌을 우회하여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돌은 천국에 이르는 길 한 가운데 아주 크게 놓여있기 때문에 피하여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아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란 동화책이 있습니다. 아리바바가 숨어서 도적들이 금은보화를 동굴 속에 숨겨놓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 도적들이 다시 도둑질하어 사라졌을 때 그 도적들의 주문을 외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보화들을 갖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주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열려라 참께(Open sesame)”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큰 돌이 놓여있는 길을 통과하기 위하여 아리바바가 한 대로 주문을 외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문은 다름아닌 믿음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문이 열리고 그 길을 통하여 천국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시요,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10장 1절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9장 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가까운 형제·자매의 구원을 위한 이러한 사모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귀한 구원을 우리 가운데 갖고 있을 때, 확실하게 믿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이 확실한 소망의 구원을 증거하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2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열심히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이 잘못된 열심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열심이기에 교회 안에 시끄러움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열심은 사람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열심입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장정 가운데 20세 이상의 장정의 숫자가 60만 가량 되었습니다. 이들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단지 갈렙과 여호수아 둘 뿐이었습니다.
왜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출애굽한 육십만이상의 장정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있었습니다. 그거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여 보기 위해서 열두 지파의 대표 열두 사람으로 가나안 땅 정탐을 하게 하셨는데 그 중에 열명은 하나님 앞에 믿음이 없는, 불신실한 보고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믿음의 보고를 하였기에 그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 행위와 믿음을 대조시켜 놓았는데 행위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무모(無謀)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하는 일이 현실적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 같습니다.
열 명의 정탐군들의 보고가 불신실한 것이라고 말씀했는데 사실은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더 타당한 보고입니다. 열 명이 보고한 것은 그들 자신들을 돌아본 것입니다. 자신들을 제대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형편에 있었습니까? 제대로 훈련된 군대도 아니요 전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식량도 없으며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습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그 중에 있으며, 광야에서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입니다. 제 정신으로 싸운다 하더라도 가나안 거민들을 상대하여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은 어떤 땅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장대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연적인 요새(要塞)를 갖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두 군대가 맞붙어 싸우면 이스라엘이 백전백퇴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열 명이 보고한 것은 현실적으로는 지피지기(知彼知己)한 지혜로운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성적이고 합당한 보고를 한 그들을 믿음이 없다고 물리치셨습니다. 물리치셨을 뿐아니라 그로 인하여 그들을 광야에서 사십년간 유리(琉璃)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상실케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쓰러져 죽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들의 보고가 참으로 무모합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면 능히 이기리라” 외칩니다. 이 얼마나 무모한 외침입니까? 그 사람들이 가진 무기도 변변치 못합니다. 그들의 육십만은 장정이라고는 하난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와같이 무모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좋아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의 발언이 참으로 무모한 것같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현실적으로는 무모한듯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은 믿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이 필요했습니까?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오심이 필요했습니다.
육십만의 장정이 출애굽하였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뿐입니다.
율법 지킴은 차치하고, 믿음의 법만으로 따지더라도 구원에 이를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해서 나와 같이 부족한 믿음의 소유자가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너는 천국에 들어갈만한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더라도, 내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을 볼 때, 나의 믿음이 신통치 못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봅니까? 얼마나 많은 경우에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까? 얼마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믿음의 순종함으로 교회생활을 합니까? 아마 교인들중에 극소수만이 이러한 믿음으로 교회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라, 나의 자녀라’ 부르심이 은혜요 긍휼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달려갈 길을 달려가지만 하나님의 의를 좇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와같이 불완전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나 믿음이 없는 인간들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마다 그의 믿음이 변변치 못하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베푸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구애(拘碍)받음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음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말씀대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성화(聖化)되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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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우리 삶 가운데 항상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교회 다니는 것으로 충분하지 하는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받을지언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늘 안타깝게 해드리며 근심시켜 드리는 삶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말썽꾸러기 아들과 딸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아니면, 부모님께 기쁨과 자랑을 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상급을 풍성히 받으시는 그러한 믿음과 성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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