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거부(拒否)” (로마서 10: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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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적(宣敎史的) 입장에서 고려해볼 때,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한국이 36년동안 일본에 종속되어있었던 것과 유관하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기독교가 들어가긴 했지만 한국에서와 같이 발전되지 못한 것은 그 나라를 식민지화(植民地化)하려는 나라에 의하여 전해졌기 때문에 민족정신을 깨어주지 못했고 그 식민기간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믿지만 식민기간이 끝남과 함께 기독교에 반감내지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시들어져 갑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을 통하여 전파된 것이 아니라 제삼국인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파된 까닭에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 적대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민족의식이 고무되고, 일본이 한국인을 돕는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자 그 자생력을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인 출신 선교사님들은, 해서, 한국이 일본에 36년동안 예속(隸屬)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攝理)라고 말합니다. 한국이 일본에 의해 고통당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통해 한국의 교회를 성장케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란 말씀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가난으로 하나님을 원망만 하고있는 사람은 그러한 극한 환경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그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작은 교회이든 큰 교회이든 목사님들의 공통적인 아쉬움은 교회에 일군이 적다는 사실입니다. 소수나마 교회의 일을 자기 일처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성장합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것은 마치 어떤 운동팀에서 코치를 고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좋은 코치로부터 좋은 작전을 지시받아 운동경기에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가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입니다. 그들이 경기에서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좋은 작전을 그들에게 알게 하여 그들이 그 작전에 따라 열심히 경기장에서 뛰는 것입니다. 해서, 교인들은 그들로 경기에서 승리하게 할 수 있는 목사라고 하는 코치를 청빙합니다. 그런데, 막상 전문가 코치를 청빙하였는데, 그로 코치의 직분을 감당케 하는 것이 어찌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해서, 교인들이 선수 노릇을 하려고는 하지 않고 대부분이 보조코치를 자원하고 그들이 청빙한 목사로는 코치 대신에 선수의 일을 감당케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향하여 작전(作戰) 지시를 합니다. 목사님, 이것 하셨어요? 목사님, 저것 하셨어요? 목사님, 이쪽으로 가야 해요. 목사님, 아무개 말은 듣지 말고 내 말만 들어요.
2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더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그 땅과 그 족속 가운데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여의 공생애를 그들 가운데 사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사역을 규정함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의 복음은 전 인류를 향한 것이지만, 그의 지상생애는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잃은 양 이외에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의 숫자가 한 때는 남자만 치더라도 5,000명 가량 되었는데 공생애가 끝날 즈음에 그에게 남은 제자의 수는 11명에 불과하였습니다. 11명도 그분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여 남은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시면 한 자리 해야지 하는 심산으로 그렇게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그 남은 11명마저 다 도망갑니다. 그들이 복음의 생명력을 깨달은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다음에야 입니다.
16절에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순종치 않은 것은 그들의 편견과 교만한 마음으로 인하여 성육신하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들을 귀와 깨달아 알 마음을 갖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입장이 바뀌면 생각하는 것도 바뀌는가 봅니다. 제가 아직 목회자가 되기 전에는 목사님들이 답답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저분은 목회를 왜 저렇게밖에 못하실까? 목사가 된 후에는 마음 속으로 답답해하던 어떤 목사님의 그 정도밖에 하지 못하던 형편이 깨달아 알아집니다. 때때로, 성도들의 하나님 말씀 깨달음이 더디고 삶이 눈에 띄게 변화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그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이라고 자위하여 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함으로도 믿지 않던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족한 나의 전하는 것으로야... 그러나,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게 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거부(拒否)하였습니다.
18절에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말씀이 전파되긴 전파되었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한 까닭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버려진 모습으로 남아있던 것입니다.
19절에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하심이 나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猜忌)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32장 15절이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수룬(=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15). ...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라.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猜忌)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20-21).”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직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이요, 그들이 살찌고 부대하여지고 윤택하여지기도 전인데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들이 어떤 모양으로 나올지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발로차고 경홀히 여기는 것은 그들이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여지므로 인함이라 했습니다. 세상 삶에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것 같지만, 그리 아니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집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삶의 내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갑니다.
이스라엘이 모양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지 않았지만, 내용이 없는 삶을 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6)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까닭에 선지자들의 이러한 외침이 거북스럽게 들리고 그들을 외면(外面)하고, 멸시(蔑視)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다시 이사야의 말을 인용(引用)합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이사야 65: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21절에 이스라엘에 관하여 이르기를, “순종(順從)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이사야 65:2)말씀하십니다.
구약(舊約) 시대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 머문 것이지만, 그들의 믿음없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실 때, 그들이 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심이 아니요 그들로 시기(猜忌)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해서,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되, 하루 종일 팔을 벌리시고 계십니다. 집나간 방탕한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되, 그가 오면 기꺼이 맞겠다는 약속으로 노란 리본을 나무에 주렁주렁 달고 기다리는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3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잘 믿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믿어지기 위해서는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에게 신뢰가 가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6절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하여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못마땅하고 신뢰가 가지 않으면 그 분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따라서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더더욱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도 듣지 않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데 하물며 사람을 통한 말씀이야 더욱 거부하기가 쉽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훌륭하고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사가 어딘지 미덥지 않고 신뢰가 가지 않을 때 그 의사를 통하여 나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의 소식이 들려지게 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것은 바울의 말씀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까닭입니다. 그것이 원래부터 예정된 것이든 아니면 변경된 예정의 섭리이든 그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고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우리를 돌아봄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마음에서 주님을 떠난 삶을 살 때, 원가지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또한 아끼지 아니하시고 꺾어버리실 것이라고 바울은 11장 21절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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