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구원(救援)” (로마서 11:1-12)
1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앞서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人間)이기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남들이 가진 것만큼 갖고 싶어하고 남들이 입는 것만큼 입고 싶어하고 남들이 먹는 것만큼 먹고 싶어하고 남들이 사는 것만큼 나도 그렇게 해놓고 살고 싶어합니다. 아니, 남들보다 한층 더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믿음생활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큰 욕심이 없습니다.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어야지,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지, 남들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더 많이 해야지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만일 남들보다 신앙이 어떤 면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것 같으면, 이 사람은 그 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비난이나 합니다. 결국,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미국 땅에서 이민자로서 혹은 유학생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 그렇게 큰 도전(挑戰)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이민와서는 또는 유학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버지니아(Virginia)에서 저와 같이 공부를 하며 교회생활을 하던 대학원생 중에서 80%는 미국에 와서 처음 교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들이 이민와서 혹은 유학와서 교회생활을 하긴 하는데 한국에서 갖고있던 그 열심은 온데간데 없고 그럭저럭 이민교회의 남들 하는 만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잘못된 생각은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나와의 긴밀한 관계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민교회에는 남들 보기에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듣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은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왜, 이와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운가 하면 그것의 결과가 현 세상에서 당장에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믿음생활의 어떠하였음을 가늠하는 구원과 믿음생활을 잘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얼마나 좋은 것을 알면 우리는 그렇게 변변치 못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지 직접 우리에게 한번 보여주시기만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 것인데 말할 교인들이 많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원리가 아닙니다. 아니,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나라의 권능과 축복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40년동안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옷과 신발이 닳지않게 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물의 흐름을 정지시키시고 역류(逆流)하게 만드셨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모형인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지만, 그 땅을 음란과 범죄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시고, 바울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반복하였지만, 우리를 살리는 믿음은 입술에서만 맴도는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숙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7:21) 하셨고, 바울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안다면, 이렇게 시시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자녀들을 일류대학에 보내려고 특별과외를 시키는데 그 비용이 엄청나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과목당 100만원이 넘는 특별한 선생의 지도를 받게 하는데,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가 일류대학을 나올 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그들의 일생에 평안하고 출세의 삶이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민온 부모 가운데 또 많은 분들이 자녀들을 의사나 변호사, 혹은 특별 직종의 전문가로 만들려고 본인들은 허리를 동이면서도 자녀들은 명문대학에 보내는 것을 봅니다. 이들 또한 한국에 있는 부모들과 같은 동기로 이와같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에서의 입신양명(立身揚名)·출세(出世)는 고작 삼사십년을 위한 것인데, 본인과 자녀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영원한 평안과 하나님 안에서 입신양명이 보장되는 구원을 위해서는 그러한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이 없음이 이상합니다. 삼사십년의 불확실한 출세의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과 재산의 반이라도 바치는 사람이 어째 이 지상의 삼사십년의 평안한 삶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나의 시간과 마음과 재물을 나눔에 그렇게 인색(吝嗇)한지 모를 일입니다.
2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함은 이스라엘이 믿음이 없는데도 그들을 구원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 보이는 이스라엘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남겨두셨다는 뜻입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하나님이 고난의 시대에, 평안의 시대에 교회를 버리셨느뇨? 그럴 수없느니라” 말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말함은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믿음이 없음에도 교회에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에 속한 사람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남겨두셨다는 뜻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한 말이 사실임을 보이기 위해서 엘리야의 예를 듭니다. 엘리야는 북방왕국 이스라엘의 네번째 왕 아합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악한 왕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의 더 악한 아내 이세벨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남아있는 선지자들은 오직 아합에게 빌붙어 아부(阿附)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삼년반의 가믐 뒤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권능 가운데, 사르는 불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인을 기손 시냇가에서 죽였지만, 이세벨이 “내일 이맘 때쯤 너를 죽이리라” 말할 때, 그것이 무서워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달라고 떼를 씁니다.
천사의 도움으로 물과 떡으로 배를 채운 다음 40일을 걸려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른 엘리야는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물어보실 때 두번씩이나 동일한 대답을 합니다: 3절에서,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祭壇)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변변치않은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힘쓰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단--바알과 타협하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의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따름이지, 구원을 위하여 여전히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해서, 바울은 5절에서,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로마서 9장 27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이 남은 자의 구원이 선한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이 남은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함으로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죽을 때까지 교회 출석을 잘 하였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켰다는 것은 계산과 실용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봄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이 잘 가지않는 협착(狹窄)하고 좁은 길로 감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서 예수님은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셨고, 또 24장 12-13절에서 마지막 때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3장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確實)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으리라”함은 구원의 보편성이요,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함은 구원의 선택성이요 제한성입니다. 해서, 구원얻을 사람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적은 것 같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모든 인간들이 다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해서, 천국의 합격자 수를 제한시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사는 관계로 합격자 수의 제한이 없음에도 많은 숫자가 그곳에 미치지 못함을 말씀합니다.
7절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頑惡)하여졌느니라”고 했습니다. 택하심을 입은 자는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지킨, 남은 자를 가리킵니다.
8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昏迷)한 심령(心靈)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이는 신명기 29장 4절에 있는 말씀인데,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이적과 기사를 보고 들었음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지 않음을 의미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혼미한 심령을 주신 까닭이 아니요,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준 까닭이 아니요,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고 미련하여 재리를 찾는 데는 밝으나 하나님을 찾는 데는 먼 까닭입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報應)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9-10절) 한탄의 기도를 올립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스라엘이 실족하여 넘어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영 끊겨진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골육의 친척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와 간구 가운데 바울이 믿기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완악(頑惡)한 마음을 돌리시기 위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방인에게 들려지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해서, 그들의 넘어짐과 실패로 인하여서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이방 가운데 전파되었습니다. 이방인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부요함 가운데 들어옴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원래 택한 이스라엘이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가 그리스도의 부요함에 이를 때 이를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3
접붙인 가지 이방인 가운데도 원가지 이스라엘 가운데도 구원은 하나님의 값싼 은혜로 대수롭지 않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은혜가 공짜이긴 하지만, 그 은혜의 가치는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내가 마음 속으로 매우 귀하게 여기는 물건을 어떤 사람에게 선물하였는데 받은 사람이 그것을 멸시하거나 함부로 땅바닥에 팽개치거나 굴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나의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의 모양으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이 찢기심을 당하고 자신의 몸 속에 있는 모든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를 경히 여기는 사람은 그 약속의 선물을 끝까지 지키는 자가 되지 못할 것이며 결국은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구원(救援)의 약속(約束)을 굳게 믿고 소중히 여김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며 믿음을 끝까지 견고(堅固)히 지킴으로 남은 자의 구원을 얻을 수 있으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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