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로마서 11: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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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일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슬쩍 지나치는 눈길로 책을 보았을 때가 아니라 적어도 여러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할 때입니다. 잠깐동안 책을 보다가 다시 책을 붙잡으면 처음부터 새롭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논문을 쓰려고 할 때, 처음에는 막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잠을 자면서도 그 문제를 생각하고 꿈을 꾸기까지 할 때,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얼핏 지나치면서 하는 신앙생활에는 진보가 없습니다. 평생을 지나치는 자세(姿勢)로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은 평생 어린아이의 믿음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책 한번 펴보지 않다가 주일 날 먼지가 쌓인 성경책을 툭툭 털어서 갖고오고 목사님의 설교본문 말씀을 찾기 위해서만 성경을 펼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보화가 발견될 리 없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말씀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루에 오분 내지 십분씩 잠깐 잠깐 성경을 읽는 사람이 성경을 전혀 안읽는 사람보다야 낫겠지요. 이 사람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또, 운이 좋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 알아질 때도 간혹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깊은 뜻을 알기에는 역부족(力不足)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알아야지 믿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알면 알수록 믿어질 수밖에 없고,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담긴 보화를 발견하게 되고, 읽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크신 비밀의 경륜(經綸)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목사님이 여러 목사님들에게 권면하기로는 기도의 무릎을 많이 꿇으면 꿇을수록 하나님의 응답을 많이 받는다고 하십니다. 30분이하로 기도할 때는 그것은 단지 나의 바램을 아뢰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드리는 기도가 아닐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자리에서의 기도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가면서 나의 기도내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른 대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러가지 여건상, 매일 오랜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기가 어려우면 일주일에 한 날을 정하셔서 하나님께 무릎꿇는 시간을 갖기로 작정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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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짐작하여 알 수 있듯이, 참감람나무는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가운데 선택하신 이스라엘이고, 돌감람나무는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었던 이방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비유로서 말씀하고있는 이 감람나무의 예는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歷史)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중 상당부분의 가지들을 잘라내셨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대신에, 원래 선택 밖에 있었던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중에 얼마를--즉, 돌감람나무 가지들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참감람나무--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포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방인중에 얼마가 참감람나무--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반열에 들어감은 그들이 당연히 누릴 권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 이방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grace)요 인자(kindness)입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榮光)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내 골육(骨肉)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돌아서 계시고 그들을 버리신 것같은 것은 일시적인 일이요, 종국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15절 전반에, “이스라엘을 일시적으로 버리심으로 세상의 화목(和睦)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다리를 건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로마서 5:10에서 바울은 이를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和睦)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15절 후반에 “잘라내어진바 되었던 이스라엘이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그들이 죽은 목숨과도 같았는데, 그들이 일시적 유기(遺棄)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 그들에게 진정한 구원이 있게 됩니다. 그들이 유대교에 머물면서 현재에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믿음을 인정치 않으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시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본체를 그 안에 간직하시고 우리에게 오신 까닭입니다.
바울의 믿음과 소망중에 종국에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라고 함은,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까지 포함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바인과 이스라엘은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16절에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나 뿌리는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이스라엘 믿음의 첫 열매된 아브라함을 가리킴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낳은 야곱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곡식가루가 거룩한 까닭에 그 곡식가루로 만들어진 떡덩이가 거룩할 수 있고, 그들의 뿌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즉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에 붙은 가지도 거룩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가지가 벌레먹음으로 또한 다른 환경으로 더러워지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17-18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중 얼마가 그들 가지의 벌레먹음으로 인하여 농부(農夫)이신(요한 15:1) 하나님에 의해서 잘려지고 대신에 이방인중 얼마가 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여 그 뿌리의 진액(津液)을 받는 자 되었다 하더라도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은 꺾임을 당한 이스라엘의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自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警告)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나무에 접붙여지고 보전을 받는 것이 그들 스스로 보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여주는 뿌리--곧, 이스라엘의 선조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그들의 노력이나 공로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9-20절에,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꺾이운 것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그렇게 된 것이요, 이방인 중에 얼마가 접붙임을 당한 것은 믿음으로 그렇게 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믿음조차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또 일의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자고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믿음의 대상과 주체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고하여질 때, 우리는 믿음의 교만에 빠져 결국은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게 되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리할 때, 이 사람 또한 다시 꺾임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1절에 “하나님께서 원(元)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서고 넘어지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2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두 가지 다른 속성입니다. 사랑은 부족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속성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불의한 자와 함께 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속성입니다. 22절에서는 사랑대신에 인자로, 공의대신에 엄위로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 거하지 못하므로 심판에 이르고 자기들의 불신앙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불평하면서 넘어지는 자마다 엄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자마다 하나님의 인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해서, 어떤 사람은 동일한 하나님의 앞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뒷모습을 보지만, 그들에게 달리 보이는 그분이 바로 그들에게 각각 달리 응답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로 눈을 돌립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말씀합니다.
헬라어 문법의 이중 부정(否定)은 매우 강한 긍정(肯定)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이라 함은 “진실로 이스라엘이 믿는 데 거하면”의 뜻이고, 본절은 해서, “진실로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믿는 데 거하면 접붙임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본래대로 참감람나무에 붙게 할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능력이 없으셔서 능력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할 동기(動機)가 이스라엘 가운데 아직 없기 때문에 능력 발휘를 유보(留保)하고 계신 것입니다.
24절에,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말씀합니다.
우리 돌감라나무의 가지들인 이방인이 품종이 다른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는데, 원 참감람나무에서 일시적으로 꺾인 이스라엘의 가지들이 원래 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은 그만큼 더 쉽다는 뜻입니다.
왜 이 말씀을 이와같이 반복합니까? 이는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교만한 마음 까닭입니다. 별 대단한 것도 없는 믿음이면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을 깔보거나 하나님을 일시적으로 떠난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마음 (anti-Semitism)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거나 이스라엘이거나 간에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제가 버지니아에서 아직 평신도로 신앙생활하고 있을 때, 그 교회에 담임목사님이 안 계셔서 종종 침례교 목사님을 모시는데 이 분은 설교를 마치시면 어김없이 교인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씀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십니다. 그런 다음, “아직 구원의 확신은 없지만, 이 시간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초청의 시간을 갖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대놓고는 반대의 뜻을 표시하지 않지만 뒷전에서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그 목사님은 왜 오실 때마다 그래?”
후에 그 목사님이 왜 그렇게 매번 초청의 시간을 갖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는 상태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기본문제인 구원(救援)에 관하여 확신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평신도이었을 때는 나 한 사람의 구원문제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지만, 목사가 되고나서는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 같은 교인에게는 더욱 신경이 쓰이는 나의 마음을 보면서 그 목사님이 왜 매번 구원을 강조하셨는가 깨달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믿음생활 하시기를 바라고, 그 위에 자고(自高)한 마음이 아니라 겸비(謙卑)하고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를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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