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7, 2013

“희락의 기름으로” (이사야 61:1-3)

                                              “희락의 기름으로” (이사야 61:1-3)


                                                                           1
대머리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있었습니다. 낙관주의자인 대머리의 사람이 먼저 말합니다.
    "역시 대머리는 좋아요. 우리는 힘들여서 머리를 빗질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그러자 비관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아, 하지만 우리는 씻어야 할 얼굴이 너무 넓지 않소?"
비관주의자는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릴 것이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먼지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어제가 오늘보다 더 나았다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오늘도 좋다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벌을 보고 사람을 쏘는 곤충이라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꿀을 만드는 곤충이라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죽어야 하는 게 슬프다고 말하고, 낙관주의자는 현재 살아있는 것이 기쁘다고 말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선 속에서 악을 찾고, 낙관주의자는 악 속에서 선을 찾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문학적 재능은 뛰어난데 신체적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냉소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은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요 시인인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1771-1832) 역시 다리를 절었지만, 생활태도는 바이런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자신의 다리가 멀쩡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기회만 있으면 계속 불평을 해댔습니다. 스코트는 정반대였습니다. 스코트는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기뻐하는 듯했습니다.
한 번은 바이런이 스코트를 만나게 되자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내가 누리고 있는 명성을 모두 주겠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닌 장애에 대해서 서로 반응이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그것을 빌미로 방탕한 생활방식을 택했으나, 스코트는 오히려 자신의 부자유함을 감사와 기쁨으로 승화시킨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이 수도원을 찾아올 예정이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수도원 원장은 부지런히 수도원을 정리하고 청소했습니다. 손님이 당도하자 원장은 이곳저곳을 소개하느라 부산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은 왠지 울적하고 심각해 보였습니다. 구경을 모두 마친 손님과 원장이 접대실로 들어섰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수도원은 아주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장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손님의 동의를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되물었습니다.
    "실례지만, 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원장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시간에 맞게 기도하고 일하고 있으며, 수도사들은 규칙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한 가지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손님이 말했습니다.
    "기쁨입니다. 기쁨이 빠지고 나면 기도와 봉사도 고역이 되고 마는 법이지요."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번째 사람--아담과 하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동산,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은 축복과 기쁨의 장소였습니다. 낙원은 blissful, 즉 더없이 행복한 또는 기쁨이 가득 찬 장소란 뜻입니다. 낙원은 늙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병듦이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뱀이 그들을 미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고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장소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에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슬픔이 찾아들었습니다. 썩지 않을 것으로 창조되었던 것이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롬 8:21).
그러나,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본래 허락하셨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륜(=오이코노미아, 인간구원, 엡 1:9)의 때가 이르매 사람들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낙원(=Lost Paradise)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이 그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그곳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도래될 기쁨의 장소를 소망 중에 기다리되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쁨을 함께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쁨의 찬송과 감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습 3:17).

                                                                         2
1-3절: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에서 꽤 자주 사용되는 수사법으로 ‘모순어법’이라고 합니다. 모순되고 상반된, 정반대의 단어의 결합(combination of contradictory words)이라고 사전에 해석된 이 말은 예리하고 총명하다는 뜻의 헬라어 ‘oxys’(sharp)와 어리석고 바보 같다는 뜻을 가진 ‘moros'(foolish)의 합성으로 그 어원자체가 상충하는 두 단어의 결합이며,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합성시켜 상황의 특이성을 강조하며, 단어에 감정을 불어넣어 언어에 맛과 멋을 내는 독특한 비유법입니다.
예를 들면 'open secret'(다 아는 비밀), 'bitter sweet'(씁쓰르 달콤한), 'cruel kindness'(끔찍한 친절), 'thunderous silence'(천둥칠 것 같은 침묵), 'laborious idleness'(고된 나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힘들고 고된 상태), 'sweet sorrow'(달콤한 슬픔), 'crowded solitude'(군중 속의 고독) 등이 있습니다.

3절은 옥시모론의 절정을 이루는 표현입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3).
재대신 화관, 슬픔대신 희락(=기쁨)의 기름, 근심대신 찬송의 옷, 이 얼마나 멋있는 옥시모론적 은혜와 영광의 장면들입니까?

바울의 서신에도 옥시모론적인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6장 9-10절에 “(우리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면 세상적으론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인내(perseverance)를 생산해내고, 인내는 우리를 연단 된 성품과 인격(character)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그 변화된 인격으로 온전한 소망(hope)을 품고 일어서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것”, 이것이 희락의 기름이 있는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환경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옥시모론적인 기쁨의 삶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까닭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안수하실 때 성령의 열매인 기쁨(=희락)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신이 아담과 하와를 떠날 때 사라졌던 그 기쁨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사람의 기준으로 복된 일이 많이 일어나기에만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슬픔이 있으며, 고통이 있으며, 근심이 있지만, 내 영혼이 구원받음을 알기에, 내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주님 되심을 알기에 오는 기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기록된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기에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항상 기뻐하라”(Πάντοτε χαίρετε)에서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의 명사형 카라(χαρά)가 희락 또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삶은 우리 먼저 믿은 성도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나중 믿은 자들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여서 여전히 슬픔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더하여줄 기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이 걱정과 근심과 고통으로 삐걱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락의 기름을 발라서 원활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름통을 들고 다니던 괴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다 삐걱대는 문이나 뻑뻑한 출입문이 있으면 경첩에다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의 기름 바르는 습관은 그의 뒤에 오는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의 매일 우리는 문제들 때문에 삶이 심하게 삐걱거리고 뒤틀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희락의 기름으로 그들의 삶에 발라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몇몇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가지고 있어 기름 역할을 하는 한 마디의 동정적인 말을 그리워합니다. 낙망하여 포기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기름 한 방울 같은 말이 그들의 희망을 다시금 되살릴 수 있습니다.
비열하고 죄로 물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친절이라는 기름을 정기적으로 발라줌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순응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일 어디에서나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기름을 부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함께 기쁨의 기름을 가지고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

                                                                          3
교회는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개하며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상실한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장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우리의 기쁨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는데, 우리에게 기쁨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쁨이 있고,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찬송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위에, 기쁨을 상실하고 여전히 암울한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blessings) 받기를 좋아합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1장, 28장)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축복은 기쁨을 동반합니다. 기쁨(bliss)이 없는 복(blessing)은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번창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어떤 연유(상실, 고통)로 인하여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없다면 이는 진정한 축복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복은 기쁨이 따릅니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복 있는 사람은”)--아슈레이(blessed, happy)--은 “그 마음에 평안(행복, 기쁨)이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쁨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기쁨과 복이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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