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로마서 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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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밝은 사랑이면 이 말은 더더욱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을 생각하며 조금은 흥분되며 그에게 어떻게 잘해줄까? 생각할 때,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의 정신이 건강해지고 이것이 밖으로 드러나 사람의 외모도 아름답게 만듭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이 말이 또한 사실입니다. ‘믿음이 크다’고 함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인데, 해서 좋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 마음이 아름답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장례식에 갈 때 마다 저는 우리 인생(人生)이 그렇게 긴 것이 아닌데 왜 짧은 삶을 살면서 서로 다투고 서로 잘났다고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지려고 할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여 “주님의 일은 나중에, 내게 시간과 물질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미루지만 생을 주관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 삶에 열중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하는 중요한 일이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큰 결실을 이루는 일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부르시면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도, 아무리 큰 부자도 고관도 손을 놓고 겸손하게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나의 나이가 젊다 하더라도 종말론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 부르시지 않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 삶의 마침인 불길한 사형선고는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서의 영원하고 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에 더욱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의 삶으로 끝이라면 어떠한 삶을 산들 어떻겠습니까? 음란하고 방탕한 삶을 산들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다음에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질 세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되어지는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의 쓰임은 세상에서 우리의 학문(學問)이 아니요 우리의 지위(地位)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잘 지키고 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큰 즐거움에 참여케 하실 것입니다.
찬송가 85장의 작사자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소망 가운데 주님뵈올 것을 고대하였는데 이러한 소망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이 생을 살동안도, 떠날 때에도 우리의 삶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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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에서 바울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바라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무감으로 준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함으로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하실 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레위기 19:18; 신명기 6:5, 30:6)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껍데기를 지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맹이인 법정신을 가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이 부모 된 여러분의 명함을 어떤 의무감에서나 마지못해하는 마음으로 혹은 계산적인 마음으로 하고있음을 발견하실 때 그 100% 완전한 행함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은 안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행하되 그것이 다소 부족하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러한 자식에게 더 큰 애정이 생겨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로마서 본문 6-8절 말씀도 원래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신명기 30장 12-14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인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 지키는 삶을 살았지만 다 하나님의 의에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바울이 오늘 본문 앞에서 말했는데, 모세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 말씀 지킴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요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신명기 30:11)고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의 마음이 있을 때 그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 이르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우리나 하나님 앞에 의로와짐은 율법을 통하여도 아니요 우리에게 있는 성경을 통함도 아니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습니다.
바울은, 신명기 30장의 “(하나님의) 명령” 이란 단어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6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말하기를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고 영원히 사는 길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그 별을 따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방안을 모색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인데 우리는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모셔내리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형상으로 이미 오신 까닭입니다.
7절에,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를 이루게 하실 분인 줄 알았는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 여김을 받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끌어올리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원함은 단지 그들이 영원히 살기를 원함이지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올리는 일이 불가능하게 보여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계속 머물러 있으시지 않으시고 사람들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사흘만에 음부에서 올라오셨습니다.
8절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의와 구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입으로 시인하는 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가까이 있습니다.
전에 한자어 가운데 포함되어있는 신기(神奇)함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두 글자 “의(義)와 신(信)” 중에, 의(義)자는 말씀드린 대로 어린 양(羊)되신 그리스도 아래에 내(我)가 있을 때 내가 의로와진다고 풀이했습니다.
신(信)자가 뜻하는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신(信)은 사람이 말씀을 믿는다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8절에 “말씀이 네게 가깝다” 함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도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우리 가까이에 계신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입니다.
9-10절에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是認)하며 또 하나님꼐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是認)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절에서 바울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이사야서 28장 16절인데, 원래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시온에 세운 돌--곧,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급절(急切)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하셨는데, 해서, 바울이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그리스도를 믿고도 죽음을 당함”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13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바울의 말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의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요엘 2:32).
바울은 이어서, 우리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보증을 받은 우리에게 말씀할 때, 이 복음의 기쁨을 우리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나가 전파하라고 합니다.
14-15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복음의 소식이 곳곳에 전해지도록 주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고, 다른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을 “아름다운 발”이라고 이미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삶을 살므로 더욱 우리의 구원의 보증을 다져가고, 하나님의 인간에게 향하신 뜻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3
구원은 미래의 일이요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은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 중에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확실하게 마음에 부딪쳐 오는 사람에게는 구원은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 되며, 현재 나의 삶이 구원과는 별도의 삶이 아니라 구원으로 향한 과정의 삶입니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늘에 올라가는 불가능한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음부에서 올라오셔서 지금 우리 가운데 영으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오직,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를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일 뿐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이 기쁜 소식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삶이 여러분 가운데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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