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1, 2013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 (로마서 10:11-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 (로마서 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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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무언가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특별히 어디에서 좋은 소식이 올 것도 아닌데 하루에 한 번 우편함을 체크해야 합니다. 만일 공휴일이 들어있어서 우편배달부가 안 오는 날이면 왠지 답답함을 느낍니다.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는 이곳 저곳 산골 구석에 사는 사람에게도 소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다닙니다.
소식을 전하여주기 위하여 다니는 그들의 발이 튼튼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는 소식을 제 때에 전달받을 수 가 없을 것입니다. 해서, 그들의 모든 수고에 감사하며 그들의 발에 이상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한국에서처럼 기독교가 단기간 내에 널리 속속들이 퍼지고 기독교 역사 100년만에 전체인구의 4분의 1이 크리스천이 된 사례가 없습니다. 이는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미국인 선교사들--언더우드(Underwood), 알렌(Allen), 그리고 아펜젤러(Appenzeller) 등의 공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 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일시적인 부흥운동이 아니라 성경보급을 통한 말씀역사로 말미암아 튼튼한 기초를 쌓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개척의 최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성경보급에 힘쓴 사람들을 '권서(勸書)'라고 부릅니다.
‘권서’는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걸어 물건을 운반한다는 뜻으로 행상인을 가리켰는데, 그 말이 후에 성경책을 사서 읽도록 권하는 사람, 성격책이나 전도 책자를 파는 행상인의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권서’가 시작된 것은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한글로 번역될 즈음이었습니다. 만주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Ross)에 의하면, 이 무렵 간행된 복음서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에 반입되었는데 그들은 무보수로 수백 권의 단편성경을 팔거나 배포했습니다. 로스는 1882년 10월 6일 한국 최초의 권서인 서상륜에게 500권의 단편성경과 그 밖의 기독교 관계 소책자들을 주어 평안도 의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권서들’은 초기 한국교회에 몰려온 온갖 시련과 모진 풍상을 온몸 으로 감당하며 황무지를 개척한 믿음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일제하의 민족 수난기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성경봇짐'을 메고 다니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이들의 헌신과 봉사의 발이 한국 교회 설립의 모태이자 그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좋은 소식 또는 아름다운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 61장 1-3절에서 그 좋은 소식 또는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서 61장 1-3절의 말씀을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인용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 자체가 좋은 소식이, 아름다운 소식이 우리에게 임함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10절에 나오는 팔복에 관한 설교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과 구원과 영생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이 그를 찾아오매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먹이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병든 자들, 눈먼 자들이 찾아오매 그들의 병을 치유하시고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영혼이 병든 자들이 찾아오매 영혼의 병을 고치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하나님의 사람들 사랑하심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신 것입니다. 그가 3년의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걸으신 발걸음 하나 하나가 좋은 소식을 전하신 아름다운 발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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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절에서 바울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이사야서 28장 16절인데, 원래 이사야서에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되어있는데, 해서, 바울이 말씀하는 부끄러움이란 “그리스도를 믿고도 죽음을 당함”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헌데,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만 ”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른 삶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12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봐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정하신 인간구원 방법에 따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함은 하나님의 구원이나 하나님 나라 기업을 허락하심이 제한적이거나 인색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한적이거나 한정적이어서 그 은혜가 사람이 많아지면 점점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여 다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께 나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해서,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부요한 은혜를 전하는 사람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알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이미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약속입니다.
요엘서 2장 31-32절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를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은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요 그를 찾는 자를 내치시는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함은 주님을 그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요,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고, 그를 바라보고, 그를 믿을 때 우이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 구원의 축복이 우리에게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기쁨이 너무나 크기에 가족에게 전하게 되고 해서 우리 가정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바울은 그의 옥문을 지키고 있던 간수에게 증거하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 예수님을 믿을 때 나의 집이 구원이 자동적으로 보장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 예수님을 믿은 기쁨을 내가 가족에게 증거할 때 그들도 주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해서 온 집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기쁨과 평안이 내게 없을 때 나는 나의 삶을 가장 잘 아는 가족에게 주님을 삶으로 증거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기쁨이 내게 클 때, 나는 가정식구들에게만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는 감격과 기쁨을 전하고자 할 것입니다.

1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내가 믿고 부르는 그 예수님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려지기 위하여는 그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선행되어져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들려지기 위하여서는 내가 예수님을 그들에게 전파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 된 다음에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주위에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10년이 넘도록 자기에게 교회 가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이 좋았는데, 믿는 사람이 되고 나서는 그 사람이 자기에게 한 번도 교회 가자는 얘기를 안한 것이 섭섭했다고 얘기합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 가자’거나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전도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 이유는 그 말을 하다가 거절 당함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면 어떡하나? 그 말을 함으로 그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싫어서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점잖음’이라고 지적합니다.
전파하는 사람이 없이 좋은 소식은 들려지지 않을 것이요, 좋은 소식이 들려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주님을 믿을 수가 없고, 사람들이 주님을 듣지 못하여서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주님을 부를 수가 없기에 구원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사람들로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주님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죄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입니까?
좋은 소식을 우리 가까이에서부터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서 52장 7절에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표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미 예수님에 의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계 곳곳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널리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좋은 소식이 먼저 전파되어 한 사람도 좋은 소식을 전해듣지 못한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이며, 좋은 소식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전파되어지기를 바라되 우리 교회가 이 일에 앞장 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발이 아름다운 발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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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그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의 삶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좋은 소식을 증거하기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바울과 그를 위하여 주변에서 조용히 도운 바나바를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파송한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의 교회처럼 그렇게 커다란 교회가 아니었으며, 그 당시의 복음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 비하여 그저 변두리 이방인의 땅에 위치한 작은 교회였지만, 이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인하여 세계를 향한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만일 안디옥 교회가 우리는 작은 교회란 이유를 들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지 아니하였다면 안디옥 교회의 이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며 안디옥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이나 사람들의 칭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사역은 다른 교회에 의하여 감당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주변에, 그리고 땅끝까지 전하는 교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주변사람들에게는 긍휼의 마음을, 세계를 향해서는 더욱 커다란 비전을 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외경 바울행전에서 바울의 생김새를 기술한 것을 보면, 그는 대머리와 매부리코에 안장다리를 한 키가 작은 볼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그 마음에 품은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나’만을 생각하는 좁은 마음이 아니라 주변과 세계를 생각하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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